〈 13화 〉 동이 틀 때까지(1)
* * *
달이 보인다. 너무나도 밝은 보름달.
아직 견습 성기사였던 시절부터, 달은 나에게 희망이 되는 존재였다.
달의 모습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다. 달이 차오를 때도, 달이 사그라들 때도, 그것은 여전히 달이다. 나도 달이고 싶다. 어떤 모습이든 '나'임을 입증하고 싶다.
기도를 올려라. 달의 여신 난나께서 화답해주실 것이니.
달을 받아들여라. 너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라.
내 이름은 크루거. 영원불멸할 성국의 충성스러운 방패이다.
* * *
우리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크루거의 감실 앞, 지하감옥의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곳이 '지하'인 이상 확실하게 탈출할 수 있는 방향은 위가 된다.
"설마 위로 올라간 건가?"
"추기경 님, 지하감옥의 상층부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한스의 질문을 들은 레오르 추기경이 뜸을 들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광장이 있네."
"광장이요?"
한스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추기경에게 다가갔다. 그 한스조차 예의를 차릴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성국 최대의 위험 시설이 성도 한복판에 있다니?"
"지하감옥의 유지에만 어마어마한 양의 성력이 필요하네. 그것을 지속적으로 충당하려면 성력의 밀도가 가장 높은 성도의 중심, 광장 밖에 답이 없었어. 그렇다고 교황청 밑에 마왕 후보자를 둘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신도들이 머무르는 곳은 괜찮고요?"
흥분한 한스를 크리스가 말렸다. 지금은 책임을 가릴 시간이 없다. 시간은 약 9시. 앞으로 몇 시간 뒤면 자정이 된다.
"크리스, 크루거의 성법에 대해 알려주시겠습니까?"
"크루거 님의 성법은 '월광식'이라고 불립니다. 기원은 제국 기사들의 검술에 있는데, 크루거 님께서 자체적으로 성법으로 전환하여 자신의 기술로 만든 것입니다."
"대충 느낌이 오는군요. 달과 공명하는 성법이라고 했었죠?"
"맞습니다. 삭월일 때는 성법을 사용할 수 없고, 망월일 때 가장 성법의 힘이 강력해집니다."
"공략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사제들을 불러 모으세요. 하늘의 달을 가리는 겁니다."
"소용 없습니다."
크리스의 단호한 대답에 흠칫 놀랐다. 본래 마법이나 성법은 힘의 주체가 되는 '기원'을 파괴하거나 무력화시키면 해결되는 법. 그런데 그게 소용 없다니?
"크루거 님의 성법은 '신앙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분께 필요한 것은 달빛 그 자체가 아니라, 달이 하늘에 떠있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그 말대로면 이미 늦었겠군요."
"그렇습니다. 크루거 님이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는 걸 인지한 순간... 그 달이 지는 걸 볼 때까지 성법은 지속되겠지요."
"뭐 하나 쉬운 게 없군요."
그때 성기사의 시체를 뒤지던 에델이 말을 꺼냈다.
"찾았다."
그녀가 찾은 것은 꼬깃꼬깃하게 구겨진 양피지였다.
"탈출용 마법 스크롤이야. 비상상황에 쓰라고 준 거겠지. 이 사람은... 아쉽게도 쓸 새도 없이 당해버린 것 같지만."
"그럼 결정 났네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성국의 신도로서, 신의 뜻이 꺾이지 않게 어린 신도들을 수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니까.
"추기경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도 가겠네. 늙은 몸이라 너희만 한 힘은 없다만, 난 성국의 추기경이야. 바로 지원을 부르도록 하지."
"지원은 최소 상급 성기사 수준으로만 부탁드립니다. 조종당하는 성기사. 아마도 '광란'이 가진 힘이겠죠."
"자네, 어떻게 그걸...? 그건 최고위급 성직자들에게만 공유되는 정보인데?"
대답은 하지 않는다. 괜히 말을 덧붙여 봐야 의심만 살 뿐이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에델은 마법 스크롤을 찢었다. 하얀 빛이 우리를 감싼다.
* * *
성국의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환한 달빛을 만끽하며, 안경을 쓴 남성이 미소를 짓고 있다. 한스의 후배로 위장한 남성. 가면의 남자였다.
그리고 그 뒤로, 사제복 차림의 의문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 당신이 왜 여기 있죠?"
"즐거워 보이는군, 레서."
레서라 불린 남자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즐겁고 말고요. 대륙 어디를 가도 이것만큼 재미있는 공연은 찾기 힘들 거예요. 광기에 사로잡힌 기사! 비명을 지르는 신도들! 그리고 그들을 막는 성직자 무리..."
"어째서 성도 한복판에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내 입장이 난처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나?"
"아아, 그렇죠. 성도는 엄연히 당신이 맡은 영역이니까요."
그 대화가 둘은 같은 집단임을 시사했다. 빛의 성녀가 로렌스에게 경고한 악의 뿌리. 그것은 비단 부패한 성국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운명'이 시킨 일이니까요."
"그분께서?"
레서의 조소 섞인 말에, 사제복을 입은 그림자는 놀람을 금치 않았다.
"그분이 어째서 이렇게 이른 시기에..."
"이른 시기가 아니에요."
흡사 달빛을 쬐듯, 레서는 양팔을 활짝 벌렸다.
"드디어 때가 된 겁니다. 마왕의 시대가! 우린 너무 깊은 어둠 속에 숨어있었어요. 그동안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죠? 비참한 죄의 시대잖아요. 사람들은 겉으로만 신을 따르고, 뒤에서는 죄를 짓죠. 큰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작은 전쟁은 국경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피를 마르게 하고요."
"하지만 깨어나신 마왕은 그분밖에 없지 않은가."
"일종의 연쇄 반응이죠. 마왕 후보자들이 하나둘 씩 각성하면, 그중에 진짜 '마왕'이 태어나는 거예요. 두근거리지 않나요?"
"그조차 '운명'의 뜻이시라면..."
그림자는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마왕의 부활을, 세계의 재탄생을 강하게 바라는 세력. '마왕 추종자'. 마왕 추종자 레서가 광장을 바라보았다. 달을 품은 짐승... 오늘로 성도는 공포에 빠질 것이다.
* * *
감싸던 빛이 사라졌다. 하늘을 올려본다. 매끄러울 정도로 둥근 보름달이다. 오늘만큼 저 달이 싫었던 적이 있었을까.
"운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한스가 앞을 가리켰다.
"저거지? 달의 기사 크루거."
"끔찍하네."
에델의 말대로였다. 달을 받은 크루거의 모습은 감실에서와는 달랐다. 두 배로 커진 덩치. 우락부락한 근육. 여기서까지 느낄 수 있는 불길한 마력. 무엇보다... 저 털들.
"크리스. 혹시 크루거가 인외종이라는 정보가 있었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저 모습은 그거 아닙니까."
"웨어울프."
등을 덮은 털 갈기.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러나는 늑대의 치아. 흉기로 변모한 손톱. 붉게 빛나는 두 눈동자. 과거에 사라졌다던 웨어울프의 묘사와 똑같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설사 크루거 님이 타락하셨다 해도 웨어울프일 리는...!"
아니, 이단심문관의 시야로 바라볼 때, '그럴 수 없다'라는 말이야말로 있을 수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한다. 눈 앞의 있는 저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선배한테 들었는데, 크루거 씨가 실종된 이유는...'
한스의 증언. 크루거는 왕랑 라이카를 막기 위해 뒤에 남았다 실종되었다.
'크루거 님은 달과 공명하는 성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크리스의 증언. 크루거가 가지고 있는 힘은 '달'과 관련되어 있다.
'왕랑 라이카는 누군가에게 토벌당했어.'
한스의 증언. 라이카는 정체 모를 자에게 토벌되었다.
'마왕을 부활시키려는 세력이 있다는 보고가 있어.'
에델의 보고서. '마왕 추종자'라 불리는 무리들. 그들이 암약했다는 증거가 속속히 드러나고 있다.
'진실을 밝히는 등불. 그게 되어주세요.'
성녀의 말. 성국에는 밝혀야 할 진실이 있다.
'광란의 밤을 견뎌보시죠.'
한스의 후배로 위장한 의문의 남자. 그와 크루거의 접촉.
모든 단서가 종합되어 하나의 사실을 이끌어 낸다.
"이 모든 일은 계획된 일입니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로렌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건 모두 가정입니다."
사실에 한없이 가까운 '가정'일 테지만.
"2년 전, 크루거는 원정대의 뒤에 남아 왕랑 라이카를 막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연재해와의 싸움에서 죽었다고, 다들 그렇게 여겼죠."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겁니다. 크루거는 살아 있고, 라이카는 죽었죠. 크루거는 왕랑 라이카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던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왜 성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겁니까?"
크리스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비참한 사실을 담담히 말하는 것뿐이다.
"돌아올 수 없었던 겁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더라도 왕랑은 왕랑. 그도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겁니다."
여기에 한 명의 인물이 더 추가된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설계였다면? 공상의 영역인 가정이었지만, 우리가 본 재수 없는 사내 덕분에 퍼즐이 맞춰지죠."
갑자기 나타난 마왕 후보자. 웨어울프가 된 크루거. 성국의 혼란.
"마왕 추종자. 그들이 라이카의 핵과 크루거를 '합성'한 겁니다."
"......!"
모든 연결고리가 이어졌다. 본래 크루거는 자력으로 마왕 후보자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그에게 힘을 불어넣는다면.
"대충 맞는 것 같네. 마왕 추종자들은 단순한 광신도가 아니야. 어떤 높은 자의, 어쩌면 '마왕'에게 직접 지시를 받는 집단일 수도 있지."
에델의 말대로다. 성녀가 말한 진실. 대륙에 뿌리내린 어둠. '마왕 추종자'라는 조각 하나로 모든 것이 이어진다.
그리고 신시아를 노린 놈들의 정체도.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저."
쩔그렁, 쩔그렁. 눈 앞의 괴물이 손과 발에 묶인 사슬을 질질 끌며 다가온다.
"저 괴물을 처단하는 거죠."
에델이 코웃음을 치며 권총을 든다. 한스는 이미 주위에 성법진을 완성해 놓았다. 크리스도 마음을 다잡아 방패를 들고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나는.
"일단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봅시다."
손을 올려 신호를 내릴 준비를 한다.
"다들 죽지만 마."
"목숨만 붙어 있으면 내가 한 번 살려보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 뒤에만 있으십시오."
"다들."
손을 내리면 전투가 시작된다. 저 달이 저물 때까지 살아남는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는데.
"로렌스? 왜 그래?"
"정신 차려!"
저 멀리 이쪽으로 소녀가 달려온다. 아이보리색 머리를 흩날리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숨을 헐떡이며.
"신시아?"
"신부님!"
안됩니다, 신시아. 당신이 왜 여기에...!
"달이 빛나는구나... 광기에... 취해..."
크루거가 신시아를 바라본다. 저 짐승에게 이성은 없다. 그저 움직이는 모든 것을 '먹잇감'이라고 규정할 뿐.
바닥을 박찬다.
"로렌스!"
그리고 '광란'도 묵직한 걸음을 떼었다. 손날은 하나의 검이 되어, 달빛을 머금고 소녀를 향해 하얀 검기를 뿜어낸다.
그리고 나는.
* * *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그저 신부님이 걱정되었을 뿐인데. 신부님이 다치지 않았으면 했을 뿐인데.
"괜찮습니까, 신시아?"
"응..."
머리에 피를 흘리며 신부님이 내게 말을 건네. 아냐, 전혀 괜찮지 않아. 신부님이 다쳤잖아. 나 때문에 신부님이...
"신시아, 여기 이 추기경 님 곁에 계시면 안전할 겁니다."
"알겠네. 마왕 후보자는 내가 보호하지."
신부님이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뒤로 물러났어.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조심하게나. 내 성법으로는 마왕의 공격을 모두 막을 순 없어."
"아시잖습니까. 저 자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신부님이 다시 멀어져 가.
"마왕이 아닙니다."
"신부님!!"
큰 소리로 신부님을 불러보지만, 신부님은 미소만 지을 뿐이네.
내가 보아온 것 중 가장 길고 끔찍한 전투가 시작됐어.
"늦었잖아, 얼간아!"
"아까는 우리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세 명은 무리야!"
총알과 총알이 맞부딪히고.
"한스, 좀 더 뒤로!"
"알고 있어!"
바닥에는 깨진 포션과 찢어진 스크롤로 엉망이야.
"크리스, 버틸 수 있겠어?"
"아직은 가뿐합니다."
방패와 손날이 맞부딪히고.
"어째서 너희들은... 믿지 않는 거냐... 맹목적인 신념만이..."
"닥쳐!"
저주어린 말과 광기가 녹아들어.
난 어째서 지켜봐야만 하는 거지? 나도 '마왕 후보자'인데. 힘이라면 있을 텐데. 아까부터 내 안의 '마왕'이 움직이지 않아.
"젠장,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은데?"
"자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시간 뒤면 누구도 못 막겠군요."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추기경 님이 말씀하셨잖습니까. 반절은 교황의 호위. 반절은 신도들을 대피시키고 있다고요."
심장이 두근거려. 설마 겁먹은 거야?
"달의 여신이시여, 난나시여! 저에게 광기를, 인간의 본질을!"
"로렌스! 조심해!"
넘실거리는 마력. 흉터로 가득한 광장. 부서진 동상. 떠오르는 보름달.
폭발하는 힘과, 쓰러진 언니, 오빠들.
방패는 부서졌어. 총알은 바닥났어. 성법진은 망가졌어.
져버린 거야...?
"마왕은 몰라도... 후보자는 달만 하네요."
"아직 서 있는 건가..."
"저까지 쓰러지면 모양 빠지잖아요."
괴물이 신부님에게 달려들었어. 신부님은 피해보려 했지만 정통으로.
"크흑!"
신부님이 무릎을 꿇었어. 그리고 괴물이 다가와. 손날을 들면서.
이대로는 신부님이.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
아직도 두려운 거야?
그래, 두려워.
뭐가 말이야?
신부님이 죽는 게. 신부님을 잃는 게. 신부님을 다시는 못 보는 게.
그러면 말이야.
솔직해지자.
* * *
크루거가 내게 다가왔을 때, 마음 한구석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신시아는 무사할까. 나를 원망할까. 폭주하지는 않을까.
그녀의 안녕을 위해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신부님."
그리고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신부님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
저 멀리 날아간 크루거의 형체와.
"나도 힘낼 테니까."
달빛을 받으며 내 앞에 서 있는 신시아가 있었다.
한 쪽의 검은 날개가 나를 감싸 안았다. 신시아의 눈. 왼쪽 눈은 루비보다도 붉었지만, 오른쪽 눈은 평범한 신시아의 눈 그대로다.
신시아가 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갖다대었다.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신부님."
신시아.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녀올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