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새벽녘 Ep.1 끝
* * *
새벽이 밝았다. 그 어느 때보다 길었지만, 동시에 가장 짧았던 밤이 끝났다. 저 멀리서 고위 성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추기경 님, 괜찮으십니까!?"
그렇겠지. 상처투성이로 너저분하게 쓰러져 있는 우리보다는 추기경이 더 우선이겠지.
"이게 마왕..."
"정말이지 끔찍하군."
몇몇은 크루거의 시체로 다가갔다. 늑대의 모습은 없지만, 한때 마왕 후보자로서의 험악한 모습은 남아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하다.
"한스? 걱정했었어!"
한스의 곁으로 사제 한 명이 다가왔다. 저 사람이 한스가 말했던 선배인가.
"그런데 후배 녀석은?"
"......"
한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곧 이단심문회에서 한스의 후배에 대한 행적을 놓고 갑론을박을 펼칠 것이다. 지금 자칫 잘못 말했다간, 한스는 물론이고 후배의 가족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다.
"죽었습니다. 더는... 말씀 못 드리곘네요."
"그런가... 미안하다, 마음 쓰게 했구나."
"아니요, 아니에요. 아, 또 엄청 골치 아파지겠네."
애써 웃어보이는 한스지만, 이번 일로 가장 곁에 있는 사람을 많이 잃은 것은 한스다. 그리고 크리스도.
"신이시여. 부디 죄 많은 영혼을 버리지 마시옵고..."
다른 성기사들과 같이 크루거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결국 우리만 뚝 떨어져 있네."
"어쩔 수 없죠, 에델. 이단심문관은 다른 네 세력 어디와도 친하지 않으니까요."
"뭘 자기는 아니라는 듯이 구는 거야?"
"어딜 붙잡는 겁니까? 저한테는 신시아가 있잖습니까."
어이없는 표정을 한 에델을 뒤로한 채, 신시아를 번쩍 들어 그늘진 곳으로 갔다.
"로렌스?"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소리. 오를란도 선생, 아니 추기경 님이시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훈계?"
"예끼,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스승으로서 제자의 잘한 점을 칭찬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글쎄요. 워낙 당한 게 많아서."
"신시아 건 때문에 아직도 화난 게냐?"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신시아를 성도에 가둬두겠다니, 그런 끔찍한 말을.
"그런데 이제 저도 더 말은 못 하겠네요."
"왜 그러느냐?"
"추기경 님도 보셨잖아요. 조금이지만, 신시아도 마왕의 힘을 각성했어요. 그 진언인가 뭔가 하는 것도 사용했고."
"하하, 고얀 놈. 성국 걱정보다 애인 걱정이 앞선다 이 말이지?"
혹여나 신시아에게 들릴 세라 두 귀를 막았다. 그러자 우으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손가락을 쪽쪽 빨기 시작한다.
"일어나면 밥부터 먹여야겠네요."
"로렌스."
선생님의 모습이 아니라 추기경의 모습으로. 추기경 님이 내게 차분히 말했다.
"신시아는 앞으로도 네가 맡아라."
"...네?"
기쁨, 당황스러움, 궁금증, 당혹감에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교황님께서는 너희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계셨다. 신시아는 마왕의 힘을 각성했지만 이성은 잃지 않았어. 너도 봤겠지?"
"당연하죠. 제 목숨을 걸고 보증합니다."
"마왕 추종자...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손이 조금이라도 더 필요해. '마왕 후보자'가 우리 측이 되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
"그 말씀은?"
"신시아가 폭주하지 않는 선에서, 그녀를 계속 생크 수도원에 두기로 했다. 조건은 이전과 같아."
"스승님...!"
두 눈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근 이틀간 계속 내 머리를 어지럽힌 고민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필요한 것이 있다."
"네?"
"교황께서는 우리 추기경들에게 결정을 맡기셨다. 세 명 중 두 명이 찬성을 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한 명은 부재중이군."
레오르 추기경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는 고위층 성직자들과 대화를 마치고, 내 동기들을 불러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보게, 레오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흥."
레오르 추기경이 동기들을 내 옆에 세워두고 말했다.
"성국의 추기경으로서 너희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이 영감. 또 시작이군.
"오늘 있었던 일은 기밀에 부쳐질 것이다. 성기사 크루거도 2년 전 사망한 것으로 처리될 거야."
에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스는 어이없어했고, 크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너희들이 한 일들을 알지 못해. 신도들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혼란은 믿음의 가장 큰 적이니."
그리고 성국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겠지.
"그렇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레오르 추기경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맙다. 성도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자네들의 덕택이야."
... 예상외의 대답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닙니다, 추기경 님. 성기사로서의 당연한 업을 했을 뿐입니다."
"추가 수당은 주시는 거죠?"
"한스! 조용히 하십시오!"
나는 조심스럽게 레오르 추기경에게 물었다.
"저, 추기경 님. 그럼 신시아의 건은..."
"마왕 후보자 말인가?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네. 그 아이는 앞으로도 자네의 곁에 두어 감시할 거야."
아아, 신들이시여, 감사드립니다.
"그래, 한 가지 조건을 덧붙여서 말이야."
추기경 님이 에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음흉한 얼굴로 말이다.
"저 사람, 왜 날 보는 거지...?"
"축하해요, 에델. 드디어 높으신 분의 눈에 들었군요."
힘이 실린 에델의 손바닥 자국을 등에 남긴 채, 기나긴 싸움이 막을 내렸다.
* * *
교황청과는 다른 곳에 있는 대성당. 이곳은 오직 성녀만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 화려한 스태인드 글래스가 넓은 방을 환하게 비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순백의 여성이 찻잔을 들고 콧노래를 불고 있다.
"어쩐 일이십니까, 성녀님.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것 같군요."
"성도가 구원받았는데, 기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차를 한 번 홀짝인 후, 성녀는 턱을 괴어 스태인드 글래스를 쳐다보았다.
이 대륙을 만들었다는 일곱 신. 엔릴, 엔키, 닌후르삭, 인안나, 우투, 난나, 에레쉬키갈. 그들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전시물이다.
"이번엔 엔키의 도움이 컸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말한 성녀는 다시 차를 홀짝였다.
오늘은 햇빛이 쨍쨍한 날이다. 또 외출을 나가볼까. 나의 사랑스러운 대지를 보살피러 가야겠다.
* * *
그 후로 나와 신시아는 일주일 정도 성도에 더 머물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많은 소식들이 들려왔다.
첫 번째 소식은 생크에서 온 것이었다. 베티 자매님이 보낸 것인데, 자기들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또, 이사도라가 침울해하니 빨리 돌아와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두 번째 소식은 크리스가 직접 전했다. 교황청에서 크루거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장례를 치러주겠다고 발표했다. 장례는 성국 전역을 순례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며, 자신도 여기에 참석하기에 미리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세 번째 소식. 이 소식은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뭐부터 들을래요, 신시아?"
"안 좋은 소식!"
마왕이 부활했다. 크루거처럼 어설픈 형태가 아닌, 진짜 마왕이.
'갈망의 바알'. 북왕국의 대(大)광장 하르타에서 그가 강림했다. 그는 과거에 봉인된 마왕인데, 반쯤 봉인이 풀려 부활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럼 좋은 소식은?"
'갈망의 바알'은 다시 봉인당했다. '용사'. 그가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게 용사만이 아니었다는 소문이다. 용사와 성녀 말고도, 암살자에게 납치되었다는 귀공녀, 제국의 학자와 그 호위를 맡은 여기사, 길거리 용병과 마법사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한 데 묶어 '용사 일행'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이 대목인데...'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마왕의 목을 친 건 용사가 아닌 흑색의 검사라고 한다. 일전에 교역 도시에 '마왕의 전조'가 출현했을 때도 분명...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도를 떠날 그 무렵.
"한스 사제님, 엄청 피곤한 얼굴이었지!"
"사건 조사 때문에 요 며칠간은 잠도 못 잤더라니까요. 맘 같아서는 사제를 때려치우고 신부나 하고 싶다는데, 말로만 그러는 것 같아요."
마차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신시아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당분간은 평화로워질 테니 안심이...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어?"
"...그런데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에델바이스 발랑틴. 이단심문관이자 나의 동기. 그녀도 마차에 함께 타 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잖아! 신시아의 힘이 점점 커지니까 역부족이라고, 나한테까지 경호 임무가 내려온 거."
"푸훗, 수녀복을 새로 맞춰야겠군요."
"너 정말!"
싫은 척 하지만 내심 좋아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단심문관의 일보다는 이쪽이 편하니 당연하겠지.
"뭐... 정말...?"
"응? 신시아는 몰랐나요?"
"그냥... 우리를 배웅해주는 줄 알고."
신시아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진다. 신시아?
"신시아? 그, 눈이 붉어졌는데요?"
"나의 신부님이, 신부님이랑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저 여자한테, 저 도둑 고양이한테... 싫어, 싫어, 그런 건 싫어...!"
"진정하세요, 신시아! 에델! 총은 집어 넣으세요!"
앞으로의 날이 어떻게 될 지, 이제는 예측조차 힘들다.
* * *
모두가 잠든 밤, 나는 서랍장을 열어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로제리오가 우리에게 보낸 편지.
'내 예상이 맞다면.'
편지를 촛불에 그을린다. 그러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던 뒷면에 글씨가 떠오른다. 로제리오와 나만이 공유한 비밀 편지 법이다.
"호오."
뒷면에는 비뚤비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 번째 성녀의 행방을 찾았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