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최초의 기억(1)
* * *
"신부님! 베티 수녀님이랑 꽃집에 다녀올게!"
"비가 오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신시아."
한 손에는 바구니를,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즐겁게 나가는 신시아. 그런 그녀를 보니, 나도 미소를 감출 수 없다.
"흠, 확실히 처음 봤을 때보다는 많이 얌전해졌네."
내 옆에 앉아 이죽거리는 검은 머리의 수녀. 그녀의 이름은 에델바이스 발랑틴. 나의 동기이자 이단심문관이다.
"성도로 가게 된 건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흥. 덕분에 나도 변두리로 오게 되었고 말이야."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세요. 수녀복,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뭐, 뭐?"
"아예 수녀로 전향할 생각은 없습니까? 그 성격을 고칠 좋은 기회가 될 텐데요."
"야!!"
얼굴이 붉어진 에델이 또 총을 꺼내 든다.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녀도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 그래도..."
에델이 턱을 괴고 내 얼굴을 쳐다본다. 평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하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어쩐 일입니까? 인정을 다 하고."
"너를 보니까 하는 소리야."
에델이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변했거든, 로렌스 너."
"후후, 사람은 언제나 변하는 법입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탁자에 놓인 체리를 입술로 똑, 따먹으며 에델이 말을 이었다.
"신시아라는 아이, 너한테는 정말 소중한가 보네."
"...당연한 말씀을."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기억 나? 네가 이단심문관을 그만둔 날."
"그걸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래,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다. 들리는 거라곤 빗방울이 땅바닥을 치는 소리. 차가운 공기가 온 도시를 가득 덮은 날.
그리고 그날은 나와 신시아가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하다.
* * *
"로렌스, 이번 임무는 그만둬."
성당의 회복실. 검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여인이 침대에 누워있다. 새 붕대로 자신의 다리를 감으며,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에델바이스?"
"말 그대로야. 너도 쉴 때가 되었다는 뜻."
나는 점검 중이던 총을 탁자에 내려놓고 되받아쳤다.
"이번 건은 내 단독 임무다. 네가 신경쓸 내용이 아니야."
"하아아."
에델바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 임무로 다리를 다친 주제에 남에게 오지랖까지 떠는 것인가?
"로렌스. 요즘 거울 본 적 있어?"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쓸 틈은 없어."
"그럼 지금이라도 봐."
에델바이스는 근처에 있던 손거울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무슨 문제 있나?"
"당연히 있지. 초췌해진 얼굴이나 빛바랜 입술은 그렇다 쳐. 네 눈. 그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라고 생각해?"
눈? 나의 눈이 어때서 그런가. 호박색 눈이 거울에 비친다. 내 눈에 담겨있는 것은 하나다. 성국의 적을 처단하기 위한 감시자의 눈. 어떤 상황에서도 이 눈은 빛을 잃지...
"색을 잃었어."
"뭐라고?"
"초점도 흐리고, 생기는 찾아볼 수도 없지. 마음 없는 살인귀도 그런 눈은 하지 않을 거야."
다시 거울을 본다. 내 눈이 그렇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저기를 봐, 거울 속에 있는 나는 그 누구보다 투철한 성직자...
남자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로렌스, 성직자 중 가장 사람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누군지 알아?"
"그야 물러 터진 신부나 수녀겠지."
"우리 이단심문관이야."
"하."
"심판의 권리를 대가로 손에 피를 묻히는 우리야말로 가장 사람다워야 해. 그렇지 못하면 우리도 괴물이 될 뿐이야."
"슬슬 가봐야겠군."
"너도 살인 기계가 되고 싶은 건 아니잖아? 내 말, 기억하도록 해."
병실의 문을 닫았다. 내게 망설임은 허락되지 않는다. 좀 더,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단을 심판한다면, 분명 나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이다.
* * *
"저 왔습니다, 선생님."
"왔군, 로렌스."
"곧 있으면 추기경 님으로 불러야겠군요."
"무엇이든 상관 없네. 그리고 로렌스."
오를란도 선생님이 품에서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임무의 난이도는 상급, 기밀은 최고 단계를 뜻하는 인장이 찍혀 있다.
"이게 그 임무 하달서다."
"분부대로."
"...혹시나 싶으니 다시 말하겠네. 이번 임무는 잠시 미뤄도 좋아. 정 안 되겠으면 다른 이단심문관에게 이관할 수도 있어."
"아시잖습니까, 선생님."
선생님의 손에서 양피지를 빼앗듯 건네받았다.
"저는 누구보다도 우수한 이단심문관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우리는 성직자이기 이전에 인간일세."
"선생님도 에델바이스와 똑같은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로렌스, 혼란은 믿음의 적이야."
선생님은 창문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분별없는 믿음은, 혼란으로부터 우리 눈을 가리지."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길을 잃은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일세."
"더 하실 말씀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후우, 알겠네."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밖으로 나왔다. 방 안에서는 선생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 형동이 올바르다는 사실은, 성과로 입증하면 되는 것이다.
* * *
양피지에 적힌 장소에 다다르자, 비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성도 근처, 작은 마을의 야산. 몇 겹의 위장 봉인을 뚫고 나서야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군."
다시금 양피지를 꺼내 내용을 읽어본다.
'목적지는 첨부한 약도에 따를 것.
목표 시설은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를 제조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음.
목표 대상의 수는 약 스무 명. 복장은 하얀색의 코트.
연구 내용은 불확실. 다만, 내부에서 합성수(?成?), 혹은 마물로 추정되는 것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보고가 있음.
목표 대상을 모두 섬멸할 것.
시설은 폭파시킬 것.
그 외, 임무 수행 도중 만나는 모든 '실험체'를 사살할 것. 이상.'
다시금 내용을 찬찬히 살핀다. 간단한 임무다. 모조리 죽인다. 신경 써야 할 인질이 없는 편한 임무. 손가락에 신성력을 집중한다. 그러자 양피지는 흔적도 없이 불타 없어졌다
'현재 시각은 약 9시.'
어둠이 가장 짙어질 때, 자정을 틈 타 놈들에게 쳐들어 간다.
* * *
소녀가 눈을 뜬다. 여전히 똑같은 풍경이다. 빛과 철창으로 둘러싸인 벽. 그 건너편으로 보이는 흰색의 악마. 그것이 그녀가 보아온 세상의 전부다.
눈을 감는다. 창문 밖으로 빗소리가 들려온다. 간간히 들리는 천둥 소리는 소녀를 움츠리게 만든다.
밤이 무섭다. 잠이 오는 것이 무섭다. 오늘도 악몽을 꿀 것이다. 악몽이 끝나면, 다시 고통이 시작될 것이다.
아픔을 느끼는 것조차 지친 소녀는 마음을 닫았다.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가만히 앉아 간절히 바랐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끝내주기를.
* * *
"당신, 도대체 누구..."
탕. 한 발의 탄알로 흰 옷을 입은 자의 목숨을 거두었다. 안타깝지만 지원은 오지 않을 것이다. 사방에 깔아 둔 성법진. 모든 소리를 차단하는 '침묵의 시간'이라는 성법이다.
"이곳은 정말이지."
철창으로 빽빽이 둘러싸인 건물. 마법이 부여된 높은 담벼락은 다른 사람의 시야를 조작하여 본래 모습을 숨긴다. 일종의 현혹 마법. 그렇기에 저항력이 높은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끔찍하군."
지나온 길을 본다. 건물 뒤편에 산처럼 쌓인 시체. 차라리 사람의 시체였다면 익숙하기라도 했을 텐데, 무언가가 '되다 만' 것들이 쌓인 시체의 산은 나에게도 메스꺼움을 선사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수록, 양피지에 나온 울음소리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어느 하나 들어본 적 없는 소리다. 오히려 그것은 '비명'에 가까웠다.
"...를 더 투여해서..."
모퉁이 너머, 또 다른 표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척을 숨기고 상황을 살핀다. 그리고 그곳에는.
"마정석의 농도를 더 올려야 할까요?"
"아니, 그대로 둬. 차라리 근육 성장제를 더 도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백의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그들이 보고 있던 '괴물'이 있었다.
'사이클롭스'. 이따금 씩 지맥의 마력이 폭주하면 나타나는 희귀 마물이다. 설화에서 묘사하는 모습대로, 근육질의 거구에 커다란 눈 한 짝을 달고 있는 괴물.
"좋아, 실험을 시작하자고. 2113번 실험체를 투입하도록."
"네."
하지만 저것은 내가 본 괴물과는 달랐다. 이미 멀어버린 눈. 그 대가로 두 배 가까이 커진 몸집.
그것의 우리에 또 다른 괴물이 풀려났다. 촉수가 달린 실험체는 비슷한 생물조차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사이클롭스 변형체는 순식간에 새로운 실험체를 아작 냈다. 그리고 그 잔해를 입에 가져가 먹어치웠다.
"이번에도 실패인가. 다음에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아니, 다음은 없을 거다."
높은 직책으로 보이는 여성 목표가 옆을 쳐다보았다. 바닥에는 조수의 머리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히, 히이이이익!"
"재미있는 짓을 꾸미고 있더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표에게 다가간다.
"사, 살려줘! 나에게는 위대한 사명이...!"
"이 성국에서 말이야."
푸욱. 말뚝으로 여인의 목을 꿰뚫어 바닥에 꽂아 넣는다. 공기가 새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번 꿈틀거리고 나서 목표는 목숨을 잃었다.
"둘은 처리됐고."
"그르르."
이변을 눈치챈 사이클롭스가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거슬린다.
"임무의 내용에는... 실험체의 사살도 있었지."
등에 손을 가져다 댄다. 붕대로 감싼 검. '엑시큐서너 소드'. 모든 것에 안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성유물. 나는 세바스(안식일)를 꺼내 들었다.
연구원으로 보이는 자의 품에서 열쇠를 꺼내 철창 문을 연다. 사이클롭스는 새로 들어온 먹잇감에게 달려들었다.
"헤매는 어린 양에게."
세바스가 공명한다. 성유물은 '주인'이라 인식한 자와 공명하여 그 진정한 힘을 이끌어낸다. 그 결과는, 일반적인 성법이나 검기로는 흉내낼 수 없는 기술.
"안식이 있기를."
부우우웅. 초록색의 검날이 벽에 거대한 흉터를 그었다. 그리고 그 경로에 있던 사이클롭스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
'단죄'. 세바스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다. 압도적인 정밀성과 파괴력, 그리고 효율성. 단점이 있다면, '목'이라고 인식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점 정도다.
연구원의 열쇠로 나는 더 깊은 통로를 향해 나아갔다. 과정은 똑같았다. 목표 대상을 죽이고, 시설을 망가뜨리고, 실험체를 사살하고...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실험체들의 모습이 점점 '인간'을 닮아간다는 것 정도이다.
"사혀...주세오..."
그 중에는 말을 하는 실험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단'의 상징이다. 죄를 품은 몸뚱이로는 천국으로 가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자비는.
"불 타라."
"아아아아아아아아!"
성화로 그들을 이끄는 것뿐이다.
* * *
"후우, 후우."
예상보다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아직 우두머리로 보이는 목표는 찾지 못했다. 건물의 가장 안 쪽. 아마 그곳에 있겠지.
정신이 흐릿해진다. 환각이 보인다. 누군가가 불에 타는 모습이다. 시체는 전부 처리했을 텐데? 그런데, 복도 구석구석마다 시체가 즐비했다.
...목표물이 아니다.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죄를 지은 사람들. 기억에 나는 얼굴들이 꽤 보인다.
"못 볼 걸 보는군."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내가 처단해 온 자들이다. 누군가의 꾐에 빠져 목숨을 잃은 가장, 그릇된 판단으로 억울하게 죽은 여인, 무의미하게 학살당한 죄인의 가족...
"저 문인가."
복도의 끝. 하얀색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도 이 곳이 건물의 심층부. 아마도 여기 안에는 가장 완성에 가까운 '실험체'도 있을 것이다.
문을 연다. 사람은 없다. 아마도 상황을 눈치채고 도주 중이겠지. 서둘러 쫓지 않으면 놓칠 거야. 아니, 그전에 먼저...
"......"
철창 안에 있던 것은, 의외로 평범해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된다. 저것이야말로 '마왕'에 근접한 존재이리라.
"......"
소녀는 말없이 내쪽을 바라본다. 이미 마음이 부서진 건가. 그렇다면, 최소한의 자비를.
"......"
총을 장전한다. 철창을 부수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총을 겨누었다. 소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눈치다.
방아쇠를 당긴다. 소녀는 머리가 뚫린 채 목숨을...
목숨을?
'또 죽이려는 거야?'
'우리 딸만은 살려줘!'
'사제 오빠, 나, 죽기 싫어요...'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질 거다! 너희 전부!'
머리가 어지럽다.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저 소녀도, 그래, '너'도, 나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을 거냐?
"...오빠는."
망설이던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오빠는 누구?"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애달파서.
"오빠도."
툭, 하고. 바닥에 총이 떨어졌다.
"슬퍼 보이는 얼굴이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