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잊혀진 도시, 레고르(1)
* * *
성도에서 돌아온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달의 기사 크루거. 마왕 추종자. 신시아의 각성...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또 출장이요?"
"죄송합니다, 이사도라 자매님."
갑작스러운 소식에 이사도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럴 만도 하지. 어떤 신부가 한 달에 한번 꼴로 성당을 비우겠는가.
"하아, 이번엔 또 무슨 일이신가요?"
"편지가 왔거든요."
"편지요?"
"네, 편지."
품에서 곱게 접은 편지 한 장을 꺼내 든다. 아무런 인장이나 문양도 없이, 커다란 글씨로 'R'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오랜 천구한테서 말이죠."
* * *
"신부님, 이거!"
"음? 뭔가요, 신시아?"
어제 저녁, 꽃밭에 물을 주고 온 신시아가 한 통의 편지를 가져왔다.
아니, 그걸 '편지'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수신인만 '생크 수도원'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고, 발신인도, 기관을 상징하는 문양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흠, 이상하네요. 배달부 청년이 뭐라고 하던가요?"
"아니, 오늘은 다른 분이 전달해주셨어."
"다른 분이요?"
배달부 청년. 생크 근처의 작은 집에서 사는 청년이다. 생크 자체가 작은 도시라, 성당 근처의 편지는 모두 그가 혼자 담당한다.
"뭐라고 써져 있어?"
"어디 볼까요."
편지를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누군가가 열어 본 흔적은 없다. 이중으로 싸인 봉투 안에는, 누런 종이 한 장만이 들어있다.
"이건..."
"어, 아무것도 안 쓰여 있는데?"
종이는 텅텅 비어 있었다. 장난 편지일까 싶어 앞뒤를 살펴봤지만,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편지 뒷면의 맨 아래, 'R'이라는 글씨를 빼면 말이다.
"후훗."
"누가 이런 장난을 친 거람."
"신시아."
"나, 난 아니야! 전 안 했어요..."
"어쩌면 흥미로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 * *
방으로 돌아온 난, 제일 먼저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자물쇠로 굳게 잠긴 특제 서랍장. 목에 건 십자 장식을 꺼내 든다. 자고로 열쇠를 보관하기 가장 좋은 장소는, 자신의 몸인 법이다.
철컥. 서랍장이 열린다. 잡다한 서류가 쌓여 있다. 신시아의 조사 보고서, '마왕'에 대한 증언 수집본, 이단심문회의 부패. 그리고 그 가장 아래, 낡은 편지 한 장이 보인다.
"드디어 찾으셨군요."
로제리오 알렉산드르. 나의 동기이자 수도사. 그가 추기경에게 보낸, 우리를 향한 편지이다. 그리고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세 번째 성녀의 행방을 찾았어.'
로제리오는 '성녀'에 대한 비밀을 찾고 다닌다고 우리에게 알렸다. 그리고 비밀 편지법을 통해, 나에게만 '세 번째 성녀'라는 구체적인 정보를 전해주었다.
첫 번째 성녀. 난 이미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
성도의 광장, 그곳에서 만난 순백의 여인. 본인 입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이 정체를 알렸다. '빛의 성녀'. 교황이 발표한, 이 시대의 유일한 성녀'였던' 자.
'그리고 용사와 함께 다니고 있는 성녀.'
두 번째 성녀. 그녀에 대한 사실은 잘 모른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크리스도, 에델도, 로제도, 사제인 한스조차 그녀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용사의 탄생 직전, 갑작스럽게 성녀로 인정받은 자라는 사실 밖에는.
'그리고 세 번째 성녀라.'
오늘 받은 편지를 꺼냈다. 'R'. 로제리오.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
편지를 촛불에 가까이 가져다 댄다. 저번과 같이, 아무것도 없던 편지에서 글씨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건..."
로제리오의 추적의 결과가 그 안에 나타났다.
'로렌스 프랑에게.
편지를 쓰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야.
원래는 더 일찍 소식을 전하고 싶었는데... 확신을 가지고 싶었거든.
네가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내가 너희들에게 보낸 편지의 비밀을 눈치챘다는 뜻이겠지.
본론부터 말할게. 세 번째 성녀의 행방, 그녀의 목적지. 그걸 알아냈어. 아마도 당분간 그녀는 그곳을 떠나지 않을 거야.
로렌스,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붉은 머리의 성녀. 그녀를 찾아줘.'
* * *
덜그럭거리는 마차의 바퀴 소리. 신시아도 익숙해졌는지, 창문 밖으로 소리를 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로제의 편지에는 더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에델이 생크 수녀원의 수녀가 되었다는 얘기 잘 들었다고, 혹시 그녀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줄 수 있느냐고 쓰여 있었죠."
"아, 정말!"
에델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탄했다.
"하아, 어쩌다 그런 동기를 둬 가지고!"
"그렇게 싫으시면, 지금이라도 마차를 돌릴까요?"
"어쩔 수 없잖아. 추기경 님의 명령인데!"
"개인행동은 엄금이니까요. 은사에게 미리 보고하는 건 당연하죠."
에델바이스. 나를 제외하고는 가장 우수하다 평가받는 이단심문관. 그녀가 함께 해준다면, 성녀의 탐색도 한 층 수월해질 것이다.
"나도 나지만, 선뜻 부탁을 들어주는 넌 뭔데?"
"당연하죠. 오랜 친구의 부탁이니까요. 당신도 똑같은 마음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변함없이 솔직하지 못하다.
"신부님, 신부님!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은 어디야?"
"너, 그것도 모르고 가겠다고 한 거야?"
경악하는 에델에, 신시아가 내 팔을 꼭 붙잡았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뿐이야. 신부님의 옆 자리."
"하, 그래, 그러시겠죠."
혀를 내미는 신시아의 모습에, 에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에델. 어차피 신시아의 곁을 지킬 사람은 필요하잖아요? 혼자보단 둘이 낫지 않겠어요?"
"뻥 치시네. 신시아가 안 간다고 했으면, 자기도 거절했을 거면서."
"이단심문관다운 통찰력이군요."
덜컹, 덜컹. 길이 점차 험해진다. 생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성국의 북서쪽, 공국과 서연방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최외곽.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다.
"신시아, 우리가 갈 곳은 성도처럼 아름다운 곳이 아니에요."
"괜찮아! 그럼 생크처럼 조용한 곳인가?"
"조용한 곳이라... 그렇죠. 아마 성도에서 가장 소리 없는 곳일 겁니다."
창 밖을 바라본다. 아직 정오지만, 짙어지는 안개에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인다.
"보이는군요."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언덕. 경사를 따라 크고 작은 집이 보인다. 높은 곳에는 벽돌집이, 낮은 곳에는 나무판자로 지어진 움막이 보인다. 그리고 언덕의 중앙에는 거대한 규모의 성당이 우뚝 서 있다.
"목적지가 저기만 아니었으면, 나도 좋아했을 텐데."
"어쩔 수 있나요. 로제리오의 말입니다. 한 번 믿어보죠."
잊혀진 도시, '레고르.' 성국의 어둠을 상징하는 도시, 그곳을 향해, 마차가 끝없는 산길을 달린다.
* * *
"신부님, 이곳은..."
"고요하죠?"
"그렇긴 하지만... 기분 좋은 조용함이 아니야."
스산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도시의 입구, 오고 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집이란 집은 모두 창문이 닫혀 있다. 문 틈 사이로 이방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눈빛도 보인다.
"경계받고 있네. 우리말이야."
"그럴 만하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곳에 오지 않을 테니까요."
레고르. 과거 있었던 어느 성자의 이름을 딴 도시. 거대한 성당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용을 과시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이점은, 이 도시를 천연의 요새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죠."
과거, 이 도시 전체에 역병이 휩쓴 적이 있었다. 피부가 썩어 문드러지고, 마침내는 온몸에 칠흑의 가시가 돋아올라 죽음에 이르는 공포의 병. 사람들은 그것을 '검은가시병'이라고 불렀다.
역병에 휩싸인 도시.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교황청이 내린 결정은 가장 이성적이었고, 동시에 끔찍했다.
"성국의 가장 끔찍한 역사지."
성국은 레고르를 버렸다. 썩어 문드러진 살을 베어내듯, 그렇게 성국의 지도에서 레고르의 존재를 지웠다. 그리고 발표했다. 이단의 침입으로 도시가 멸망했다고.
천연의 요새란 말은,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누구도 도시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그럼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은 뭐야?"
"역병은 모습을 감췄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남았죠. 이곳은 국경 지대. 여러 사정으로 자국에 있을 수 없게 된 이들이 빈 도시에 모여들었습니다."
에델이 총을 점검하며 말을 덧붙였다.
"성국은 레고르를 '없는 도시'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던,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완벽하잖아? 사연 있는 자들이 모여 살기에."
"그럼 여기 사는 사람들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지."
아무도 없는 길거리를 걷는다. 물건을 파는 상인도, 담소를 나누는 여인들도 없는 황량한 거리. 이곳을 과연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그래도 이곳은 사정이 나은 편이야. 높은 곳에는 그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자들이 살거든."
"여기보다 더 심한 곳이 있어?"
신시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생크는 비교적 평화로운 마을이다. 신시아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따뜻한 곳. 하지만 이 세상은 상냥한 곳이 아니다.
"신시아."
"응, 신부님."
"신시아에게 '세상'을 보여줄게요."
* * *
레고르의 하층부. 빈자와 망자들의 도시. 삶의 지푸라기를 잡는 곳이자,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다.
"여긴, 여기는 너무... 끔찍해."
신시아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나무판자가 대부분이고, 바닥에 쓰러진 채 숨만 쉬는 산송장들이 널려 있다. 그들 중 몇은 이미 시체가 되어 쥐들에게 파 먹히고 있다.
"귀인, 부디 이 불쌍한 거지에게 은혜를..."
"딸아이가 굶고 있습니다. 제발 먹을 걸!"
골목 사이사이에서 더러운 차림의 사람들이 기어 나왔다. 아마 우리의 말끔한 차림을 보고, 상층부에서 온 자들이라고 착각했겠지.
"신부님, 저 사람들 너무 불쌍해. 조금만 돈을..."
"가까이 다가가지 마십시오, 신시아."
"하지만 저 사람들!"
그 순간, 에델이 총을 들어 위협사격을 했다. 눈 앞에 떨어지는 탄환에 거지들이 놀라 도망쳤다.
"로렌스 말 대로 해.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간 된통 당할 거야. 범죄에는 도가 튼 녀석들이니까."
신시아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 데 없는 자비를 보였다간, 저들의 태도가 돌변할 것이다.
"방금 그 사람들은 거지가 아니었습니다. 부랑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손가락에는 기름기가 지워지지 않았더군요."
"응, 미안해, 신부님."
"아닙니다. 나쁜 건 신시아가 아니라."
고개를 든다.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연기와 뒤섞인 안개가 빛을 가린다.
"이 도시니까요."
* * *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셈이야?"
상층부와 하층부의 사이. 비교적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 곳. 그곳의 벤치에 앉아 쉬던 중 에델이 말했다.
"성녀 말입니까?"
"그래. 로제리오가 무슨 단서라도 안 남겼어?"
"단서요? 없습니다. 붉은 머리라는 것만 빼면 말이죠."
"뭐?"
에델이 경악한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로 맨바닥일 줄은, 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에델. '성녀'는 기적의 증명입니다. 이 고립된 도시에, 이상한 소문 한둘쯤은 퍼져 있겠죠. 우린 그걸 노릴 겁니다."
"역시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에델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에 절망한 모습이다.
그건 그렇고... 신시아의 상태가 이상하다. 아까부터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신시아?"
"히잇! 죄송, 죄송해요, 죄송..."
신시아가 손을 올리며 기겁했다. 마치 처음 만난 그날처럼 몸을 떤다.
"신시아, 떠올릴 필요 없어요. 당신을 다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신시아를 껴안는다.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둠이 있다. 한 번 베인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는다.
"...응, 신부님. 진정됐어."
"기특하네요. 그만 일어날까요?"
신시아가 내 손을 꽉 붙잡는다. 고개를 푹 숙이며,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길을 걸었다.
'역시 신시아를 데려오는 건 실수였어.'
"아얏!"
눈을 감은 순간,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다. 여자의 목소리. 신시아보다 한참 어린 소녀였다.
'...아이? 이런 곳에?'
"저기, 괜찮아?"
"응, 안 아파. 고마워, 언니."
신시아가 쓰러진 아이를 부축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모퉁이까지 친절히 배웅해 줬다.
"고마워, 착한 언니!"
"넘어지면 안 돼!"
신시아의 선행. 마왕 후보자인 그녀지만, 마음씨는 마왕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놀랐어. 나보다 어린 여자애가 있을 줄은."
"그러게요. 드문 일입니다. 평범한 가정을 꾸린 자는 없을 텐데."
이곳에서 '선행'은 죄의 표적이 된다. 그런데도 저런 평범한 아이가 살 줄이야. 잠깐, 선행?
"신시아, 너 머리핀이...!"
에델이 신시아의 머리를 가리켰다. 제비꽃 머리핀. 신시아의 머리에 꽂혀있던 머리핀이 사라져 있다.
"신부님, 신부님이 사준 머리핀이!"
신시아의 표정이 굳는다. 어쩔 줄 몰라하던 신시아가 눈을 감더니, 방금 소녀가 떠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핀!"
"신시아, 같이 가요!"
모퉁이를 지나고 쓰레기 더미를 건너, 신시아는 판자로 덮인 골목길에서 멈춰 섰다.
"신시아, 여긴 아무것도 없어요."
"아니, 느껴져. 이 아래, 여기야!"
신시아가 발을 강하게 굴렀다. 그러자 바닥이 무너지며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 통로?"
* * *
비밀 통로는 의외로 넓었다. 마치 누가 정기적으로 이곳에 출입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수도였던 흔적이 이곳저곳에 있다.
"찾았어."
그곳의 끝에는 문이 있었다. 명백히 사람이 사는 흔적.
신시아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당신들은."
구석에 뭉쳐 덜덜 떨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대체 누구죠?"
우리를 가로막으며 정체를 묻는, 옅은 금발의 소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