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잊혀진 도시, 레고르(2)
* * *
"당신들은 누구죠?"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지, 신시아도 주춤거렸다.
"어, 그게, 저기..."
"볼일이 없다면 나가주세요."
단호하다. 눈빛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 도시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모습이다.
"신시아, 저기."
어쩔 줄 몰라하던 신시아에게, 에델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 도둑!"
모퉁이에서 부딪힌 갈색 머리의 소녀. 어린아이들의 틈 사이에는 그녀도 있었다.
"도둑이요?"
가장 연상으로 보이는 금발의 소녀가 되물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이치곤 나이가 많은 거지, 몸은 신시아보다도 어렸다.
"리사, 너니?"
"히끅."
'리사'라고 불린 소녀가 앞으로 나왔다. 손을 앞으로 모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한다.
"리사, 대답해. 남의 물건에 손댄 거니?"
금발의 소녀가 리사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그치만." "그치만, 뭐?"
"아네모네 언니만, 훌쩍, 밖에 나가서, 훌쩍, 일하고."
리사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우리도, 훌쩍, 도움이 되고 싶어서... 흑, 흐흑."
"리사."
아네모네. 옅은 금발 소녀의 이름인 듯하다. 그녀가 리사를 꼭 껴안았다.
"너희는 신경 쓸 필요 없어. 너흰 아직 어리니까, 어른인 내가 더 힘낼 뿐이야."
"언니..."
"하지만 도둑질은 나쁜 거야. 자, 저분들에게 물건을 돌려드리렴."
"...응."
리사가 신시아에게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제비꽃 머리핀을 꺼내 건넨다.
"죄송해요, 마음씨 착한 언니."
"아, 아니, 돌려줘서 고마워."
"고맙다고 할 상황은 아니지만요."
아네모네. 이 아이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소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 리사 때문에 죄송했습니다. 드릴 건 없지만, 최소한 사과라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니, 괜찮습니다."
아네모네라는 소녀. 신시아보다 분명 어림에도 정신은 무척 성숙하다. 무엇보다도 저 표정.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 지닌 표정이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요?"
"네. 여러분이 어떻게 이곳을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부디 이 장소는 비밀로 해주세요."
다시 고개를 든 아네모네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이곳은, 이곳은 저희들의 마지막 보금자리예요. 이곳을 들키는 날에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순간에도 다른 아이들을 걱정하는 건가. 아네모네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장식을 꺼내든다.
"우린 칠교(七)의 사람들이니까요."
* * *
"여기, 차예요. 맛은 옅겠지만."
"감사합니다, 아네모네."
신부와 수녀 둘. 우리의 신분을 밝히고 나서, 아네모네의 태도가 명백히 달라졌다.
"실례 많았어요. 전 또 다른 구역의 사람들인 줄 알고."
"이 옷을 봐도 모르는 거야?"
신시아가 입고 있는 수녀복을 두드린다. 검은색의 한벌 옷, 목덜미에 덧댄 흰색 천. 거기에 검은색 양말. 칠교의 수녀의 전형적인 복장이다.
"여기 가터벨트도 입었는데."
"신시아. 그런 건 안 보여줘도 돼요. 그보다 왜 진짜로 입고 있는 겁니까?"
"신부님이 좋아할 거 같아서?"
"푸훗."
우리의 대화를 듣던 아네모네가 웃음을 흘렸다.
"하핫, 아, 죄송해요. 그냥 두 분, 너무 사이 좋아보여서."
"정말? 정말 그렇게 잘 어울려 보여?"
"네, 정말로."
아네모네는 차를 한잔 홀짝이더니,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냥... 모든 게 의심스러우니까요. 이 도시는 그런 곳이에요. 당장 오늘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속이고, 상처 입히고."
"하지만 저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 보이는 데요?"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에델의 모습을 본다.
꺄르륵거리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 머리카락을 붙잡고 당기거나 다리에 매달리는 등 짓궃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 안에 악의는 담겨 있지 않다.
"모두 착한 아이들이니까요."
"이 도시에 착한 사람이 있을 곳이 있나요?"
"아뇨. 없을 거예요. 적어도 지상에는."
그녀의 말대로다. 레고르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도시다. 이 도시로 흘러들어 온 사람 태반이 죄인이며, 그중 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어른은 없습니까?"
"여기 있잖아요."
아네모네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이제 겨우 사춘기가 끝날 무렵인 소녀인데도,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당차다.
"저 아이들을 보살피는 게 당신 뿐입니까?"
"보살핀다라... 그보단,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거죠."
아네모네가 컵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사람답게 있을 수 있게."
"저 아이들은 어디서 온 거죠?"
물론 대충은 알고 있다. 법이 없는 도시.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들. 이곳은 힘과 재물이 전부다. 그렇기에 매춘과 강간은 자연스레 생겨나기 마련이다. 저 아이들은 그 결과물, 버림받은 생명들이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달랐다.
"신께서 보내신 천사들이랍니다."
"하, 하하."
정말이지, 신시아가 이 소녀의 반만 닮았어도 좋을 텐데.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을 긍정할 수는 없다.
"당신은."
아네모네. 그녀는 너무나도 어리다. 아직 어른의 품에서 벗어날 나이가 되지 않았다.
"아직 어른이 아닙니다."
"아니, 전 맏언니예요. 어른이라고요!"
"당신이 모든 걸 책임질 이유는 없을 텐데."
"신부님, 갑자기 무슨 말씀을...!"
"왜 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거죠?"
아네모네의 표정이 굳는다. 마음속으로는 계속 피해 왔던 사실.
언젠가 이 불균형은 끝에 도달한다. 아네모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유지되는 공동체에서, 그녀가 사라진다면 저 아이들은 모두 죽을 뿐이다.
"당신도 정상은 아닐 텐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지금은 신부지만, 과거엔 이단심문관이었죠. 그 일을 하려면 눈썰미가 좋아야 합니다. 가령, 당신의 손목이라던가."
아네모네가 황급히 손목을 감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헌 붕대를 감은 팔목. 어떤 상처의 흔적이다.
"식량은 어떻게 구하는 겁니까?"
"아직 상층부에선 은화가 통용되고 있어요. 그곳에서..." "연약한 소녀가 8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먹여 살린다고요? 농담도."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한번 이곳을 봐버린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군요. 그렇죠?"
"당신은 대체 뭐야!"
아네모네가 소리를 질렀다. 놀고 있던 아이들이 그제야 그녀를 바라본다. 신시아는 매서운 얼굴로 자세를 취했다.
"아까부터 전부 아는 척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데!"
"다시 말하죠. 당신은 어른이 아니에요."
"그만, 그만해요."
"우린 지금부터 성당으로 갈 겁니다. 선택하세요. 저 아이들을 데리고 성당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한계를 맞이할지."
아네모네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아네모네 언니, 괜찮아?"
"울지 마. 울면 악마가 잡아간대."
아네모네는 아이들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당으로는 갈 수 없어요."
"어째서죠?"
"이 아이들, 그리고 전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에요."
축복도, 세례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아이들. 존재를 부정당한 도시. 이 대륙 어디에도 그녀와 아이들의 존재를 아는 자들은 없다.
그들 서로를 제외하고는.
"제가 힘써보죠. 당신과 아이들 정도라면 그쪽에서도..."
"무엇보다."
아네모네가 내 눈을 바라본다. 그 눈에 담긴 건 의심과 두려움.
"그 성당의 신부는 믿을 수 없어요."
그리고 증오였다.
* * *
대성당으로 가는 길. 곧 해가 저물기에 걸음을 재촉했다.
"신부님, 그 아이들 괜찮을까?"
"글쎄요. 하지만 금화를 몇 푼 쥐어줬으니 당장은 문제가 없을 겁니다."
길거리에는 여전히 아무 사람도 없다. 가난한 자들은 상층부에 오지 못하고, 부유한 자들은 자신의 재물을 지키기 급급하다.
"그런데 신부님, 우리가 가는 '대성당'이란 곳에도 신부가 있다고 했잖아."
"그렇죠. 누군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이곳은 버려진 도시잖아. 어째서 사람이 있는 거지?"
신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 파견된 신부는 없어요. '공식적'으로는 말이죠."
"응? 응? 무슨 뜻이야?"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신시아. 에델에 대신 답했다.
"이 도시는 위험 투성이야. 각지에서 흘러오는 위험인물들. 비록 그들을 전부 통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감시'는 필요하지."
"그렇기에 교황청에서는 비밀리에 신부를 파견합니다. 일종의 첩보원인 셈이죠."
지금 우리가 가는 '레고르 대성당'에도 신부가 있다. 수녀도, 신자도 없는 단 한 명의 성당. 편히 잠들 자리 하나 없는 이곳에서 우리가 묵을 수 있는 장소는 그곳뿐이다.
"후, 그래도 다행이야."
"뭐가 말입니까, 에델?"
"꼼짝없이 노숙이라도 해야할 줄 알았다구." "푸훕, 당신의 소중한 순결을 땅바닥에 버릴 생각이십니까?"
탕. 내 어깨너머로 총알이 지나갔다.
얼굴이 빨개진 에델이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 너, 나를 뭘로 보고!"
"뭡니까, 에델. 설마 이미...?"
"다, 당연하지! 남자 한 둘 쯤이야 내 마음대로..."
"실망이군요, 에델. 아무리 교리에서 허락했다 하더라도 몸을 함부로 하다니."
"아니, 그게, 사실은, 그."
에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스의 말대로다. 에델은 놀리는 맛이 있다, 자존심을 세우려고 해도, 저 반응이 에델의 신실함과 신앙심을 드러내 준다.
"가벼운 농담입니다. 순결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에요."
"맞아, 에델 언니. 남자는 한 명이면 충분하잖아?"
신시아가 내 팔짱을 껴안았다.
"그렇지, 신부님?"
"물론이죠. 신시아의 곁에는 분명 멋진 사람이 있어줄 거예요."
"응. 회색 머리에 호박색 눈동자. 이단심문관 출신의 신부님. 배려심 넘치고,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프랑'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좋겠어!"
에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신시아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자포자기한 모습이다.
"흠, 흠. 에델. 농담은 이쯤 해두죠."
"좋은 생각이야. 더 했으면 당장 마차 타고 돌아갔을 거야."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 '붉은 머리의 성녀.'
내일부터는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상한 일은 없는지 알아본다. 그리고 정보를 조합해 단서를 찾아간다... 그럴 작정이었으나.
"에델도 눈치챘죠?"
"당연하지.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역시. 나를 제외하고는 가장 우수한 이단심문관답다.
"응? 무슨 얘기야? 둘만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음, 아직 신시아는 마력을 정밀하게 다루지 못하니까요."
신성력은 마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힘이 시작하는 방향이 내부가 아니라 외부일 뿐. 결국 개인 각자의 힘이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 정도의 수준이면, 힘을 조절하지 않는 이상 주변에 신성력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죠. 그것도 아주 짙게."
"아네모네와 아이들이 살던 장소."
처음 들어갔을 때 바로 알아챘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강대한 신성력의 흔적.
"성녀는 분명 그 장소에 들른 적이 있어."
"그것도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말입니다. '아네모네'라는 소녀가 숨기는 사실에는 분명 '성녀'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신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그럼 아네모네가 혹시!"
"글쎄요. 가능성은 적을 겁니다. 머리색부터 달랐으니까요. 염색한 흔적도 없었고."
"로제리오는 신중한 성격이야. 성녀에 대한 유일한 묘사니까, 그것만큼은 틀리지 않을 거야."
내일은 다시 그 장소에 가 봐야겠다. 물어야 할 상대는 아네모네가 아니라, 아이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아이들.
"얘기는 이쯤 하자. 도착했어."
에델이 경사 위를 가리켰다. 한때 성국의 상징이자 요새였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신이 이곳을 버렸음을 상징하는 장소일 뿐인 곳.
"레고르 대성당이야."
* * *
"실례합니다..."
신시아가 조심스레 문을 열며 말했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
대강당은 텅 비어 있다. 의자에는 먼지가 쌓여 있고, 깨진 창문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도 없는 거 아냐?"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군요."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동상. 이 도시를 세운 '성자 레고르'의 동상. 그 뒤편에 무언가가 움직였다.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이 도시에..."
백발의 남성.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외형. 칠흑같이 검은 신부복을 입고, 십자 장식을 쩔렁거리며 걸어온다.
"신들의 뜻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이 올 줄이야."
익숙한 목소리. 설마 이 남자가 여기 있었을 줄이야.
"레고르 수도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유일한 신부."
성직자 학교 시절의 동기. 오를란도 추기경 밑에서 수행을 받을 때도 몇 번이나 부딪혔던 남자.
"알베르 프랑입니다."
* * *
해가 저물고 도시에는 어둠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 시간은 그 누구도 '죄'를 짓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래, 신들을 제외하면.
"아네모네 언니, 오늘도 가는 거야?"
"응. 리사, 소피아. 다른 아이들을 잘 부탁해. 내가 없으면 너희들이 가장 언니니까."
"응! 열심히 할게!"
아네모네. 옅은 금발의 소녀.
그녀가 어둠을 틈타 하수도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에는 부랑자들이 가득하다. 자칫 방심하면, 저들에게 덮쳐져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손목을 부여잡는다. 어제의 상처가 너무나도 쓰리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내가 그만두면, 다른 아이들은 전부 죽어버릴 테니까.
'조금만 참으면 돼.'
골목을 지나 모퉁이를 건너, 아네모네는 레고르의 상층부로 향했다.
'나만 조금 참으면...'
뚝. 눈물이 손등에 떨어진다.
오후에 온 그 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죠?'
맞다. 하지만 말할 순 없다. 나는 '죄'를 지었으니까. 그 죄를 고해할 자격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애써 눈물을 닦아낸다.
똑똑. 소녀가 어느 집 문을 두드린다.
"뭐야? 누가 시끄럽게..."
험악한 인상의 남성. 그가 아네모네를 내려다보았다. 생기 없는 눈. 하지만 아네모네의 시선은 굳건하다.
"흐음, 그래. 크큭, 무슨 뜻인지 잘 알지. 안으로 들어와라."
끼이익. 문이 닫힌다.
아네모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이시여. 부디 저의 '죄'를 사하소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