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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24화 (24/109)

〈 24화 〉 붉은 머리의 성녀(1)

* * *

대륙에는 일곱 국가가 있다. 성국을 중심으로, 제국, 북왕국, 남왕국, 서연방국, 공국, 그리고 마도 공화국이 균형을 이루는 시대.

각 나라에는 자신의 국가를 상징하는 '우상'이 있다. 실질적인 통치자와는 구분되는, 그 나라의 정체성.

제국은 넓은 영토를 지키는 수많은 기사들로 대표된다. 황제와 나라를 위해 검과 방패를 드는 기사들. 제국의 우상은 '기사단장'이다.

마도 공화국은 마법의, 마법을 위한, 마법에 의한 국가다. 마법사들의 조직, 마탑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식의 근원이 된다. 마도 공화국의 우상은 '대마법사', 그들 중에서도 '현자'라 불리는 자들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자유와 경제의 북왕국은 '길드 마스터'가, 사막과 전사의 서연방국은 '대전사장'이, 그림자와 동화의 나라 남왕국은 '대도(大?)'가, 귀족과 기술의 나라인 공국은 '귀공자'들이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성국은?

성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성녀.

신이 내린 기적의 상징.

아직 신들이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

"그런데 이건..."

피로 뒤덮인 집 안. 터져버린 시체. 막대한 신성력의 잔재.

이 상황을 두고 '기적'을 떠올리는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차라리 마왕이 더 어울리겠네."

"난 이런 짓 안 해!"

"진짜 마왕을 얘기한 거야."

에델의 말에 신시아가 화를 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에델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끔찍하다.

"일단은 대성당으로 돌아가죠. 여기 있어 봤자 의심만 살 뿐입니다."

현장에서 떠나려는 그때, 주위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여기 계속 있어도 괜찮은 거야? 떠나는 게 좋지 않겠어?"

"떠나다니, 밖으로 나가면 우린 평생 감옥 신세라고!"

방금의 대화, 단서가 섞여 있다.

"잠깐."

"뭐, 뭐야, 당신! 신부복? 대성당의 사람인가?"

"아닌 것 같은데? 3년 전에 온 신부는 백발이야. 그 전 신부는 자살했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들. 하지만 이들 모두 '죄인'의 가면을 쓰고 있다. 불쾌함을 억누르고 말을 묻는다.

"방금 한 말, 다시 들려주시겠습니까?"

"밖으로 나가면 감옥 신세라고 말했어."

"아니, 그 전."

"또 이런 일이 일어난 거 말이야?"

'또'. 말인즉슨,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처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까?"

"요 근래 1달 간 계속. 다들 미치광이 살인마가 돌아다닌다고 무서워하지. 흔적도 안 보이고."

"1달이라..."

로제리오가 말한 '성녀의 행방이 끊긴 기간'. 이곳에 이변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 두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잊혀진 도시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죽음. 그 모든 것을 기록해 둘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알베르의 도움이 필요하겠군요."

* * *

"최근 일어난 의문사가 일어난 곳의 지도?"

"맞아. 이왕이면 도시 전체의 지도랑 함께."

에델의 부탁에, 알베르는 흔쾌히 지도를 가져왔다. 어제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나를 보는 눈빛은 싸늘하다.

"착각하지 마, 로렌스. 에델바이스가 아니었다면..."

"알고 있습니다. 그쯤 해둬요."

알베르의 장단에 어울릴 여유는 없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때, 성녀의 단서를 조금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

"이게 레고르의 지도다."

"신시아,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장소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주세요."

"응!"

사거리의 동쪽, 광장 근처, 옛 병원. 지도 위에 순차적으로 표시가 새겨진다. 1달 내에 일어난 사건의 수는 모두 17건. 표시된 장소의 가장 바깥쪽에서 순차적으로 원을 그려 넣으면.

"대충 드러났네."

"일이 잘 풀리는군요. 이곳에는,"

상층부와 하층부의 증간 지점. 이미 우리가 가본 적 있는 그곳엔.

"이미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 * *

"말꼬리 언니다!"

"말꼬리 언니?"

하수도의 비밀 거처. 그곳의 문을 열자, 숨어있던 아이들이 달려 나와 반겨준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역시 에델이다.

"무슨 일이야, 신부님?"

"물어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아네모네는 없나요?"

"아네모네 언니? 언니는 이 시간에는 항상 밖에 있어!"

"이렇게 이른 시간에 말입니까?"

아네모네는 현명한 아이다. 이 도시의 위험성을 잘 아는 만큼,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그런데도 매일마다 밖으로 나간다라...'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언니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맞아."

그래, 아네모네.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저도 수준에 맞게 응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시아, '그걸' 꺼내세요."

"알겠어, 신부님."

신시아가 배낭을 가져온다.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달달한 향기. 어느 정도 머리가 큰 아이들은 이미 눈치챘다.

"여기, 맛있는 쿠키가 있군요."

* * *

"이런 곳이 있었군요."

잊혀진 도시, 레고르의 가장 아래쪽.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시체가 모이는 곳. 그 한구석에 마련된 다양한 크기의 흙무덤.

이곳은 이름 없는 자들이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셈이다.

"마음이 아파와."

"이 또한 현실입니다, 신시아. 아네모네는... 저기에 있군요."

나무로 가려진 그늘. 옅은 금발의 소녀가 꽃을 들고 서 있었다.

"아네모네?"

"흐앗! 누, 누구... 신부님?"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한다. 지쳐 보이는 얼굴, 흐릿한 눈동자. 어제의 모습보다 더 상태가 나빠 보인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곤란해요."

아네모네는 들고 있는 꽃을 나무 밑동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으며,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누구의 무덤이죠?"

"......"

아네모네는 말이 없다. 그녀의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기다리는 수밖에.

"신시아. 저기 피어 있는 꽃 좀 꺾어와 주시겠습니까?"

"분홍색 꽃? 아니면, 푸른색 꽃?"

"푸른색. 그게 좋겠네요."

신시아에게 건네받은 꽃. 무덤가에 피는 이 꽃은, '재회의 소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눈을 감고 있는 아네모네의 곁으로 다가간다. 누군가의 영원한 요람. 그 위에 작은 성의를 바친다.

"부디 안식이 있기를."

지긋이, 아네모네가 나를 바라본다.

"따라오세요."

* * *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뭐죠?"

"최근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문사들. 들어본 적 있습니까?"

"의문사라... 매일 여러 이유로 목숨을 잃는 곳이잖아요? 의문스러운 건 당연한 거겠죠."

아네모네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자연스러운 몸짓, 평온한 얼굴. 하지만.

'눈동자가 흔들렸어.'

왼쪽 아래로 움직인 시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거짓',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과거의 기억'.

"그럼 다른 걸 물어볼까요?"

"곧 점심 때라서요. 아이들에게 가지 않으면..."

"에델, 제 동료가 돌보고 있을 겁니다."

그녀에게 반드시 물어봐야 할 사항. 성녀도, 살인 사건과도 관련 없는 순수한 호기심이 나를 움직인다.

"저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네모네는 명백히 이상한 소녀다.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른스럽고, 슬픔이 담긴 눈동자는 너무나도 결연하다.

"... 꼭 말해야 될까요."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전 궁금증을 못 참는 성격이라, 계속 당신을 귀찮게 할 수도 있겠죠."

"정말이지 곤란한 신부님이시네요."

약간의 침묵. 아네모네의 입술이 떨어졌다.

"제 친구예요. 이름은 아네트. 저랑 같이 아이들을 보살피던 소녀였죠."

"어쩌다 목숨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답했다.

"전염병이었어요. 아주 사소한."

"그녀는 대체 언제..."

"그만."

아네모네의 말과 함께, 대성당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뎅, 뎅, 데엥. 12번의 종소리 끝에 다시 본 그녀의 표정은.

"그만, 해요."

마치 울 것만 같아서.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겠어요. 어서 가요."

그녀가 먼저 자리를 일어난다.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보금자리로 향한다.

"아네모네, 슬퍼 보였어."

"차라리 울기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그녀를 동정한다. 그녀의 운명을 슬퍼한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끝이 다가오는군요."

누군가는 그녀를 막아야 한다.

가령,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이방인이라던가.

* * *

모두가 잠든 한밤중. 한 소녀가 방문을 두드린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누, 누구, 누구지...?"

"땅에 떨이진 백합 한 송이."

옅은 금발의 소녀. 그녀가 다짜고짜 말했다.

"사가시지 않을래요?"

노골적인 표현. 남자가 침을 닦으며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낸다.

끼이익, 쿵.

남자의 방 안. 어질러진 술병과 마약이 보인다.

버려진 도시에서, 이 같은 물건은 곧 부의 상징이다.

"흐, 흐흐. 안 그래도 잘됐어. 저, 저번에 쓰던, 장난감은, 콜록, 금방 망가졌는데."

소녀는 방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여성복의 흔적. 미처 닦지 못한 끈적한 액체. 모든 것이 역겹다.

'참을 수 있어.'

스르륵. 아네모네의 옷이 내려간다. 등불에 비친 그녀의 살결은 뽀얗고 화사하다.

'아네트는 더 고통스러웠을 거야.'

교리에 위반하는 '죄'를 짓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소녀의 가슴은 미어터질 것만 같다.

하지만 견뎌내야 한다. 모든 건 그 아이들을 위해서.

'신이시여, 부디 제 죄를.'

풀썩. 아네모네가 침대에 누웠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에게, 남자가 침을 삼키며 천천히 다가간다.

'사하여 주시옵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럽고 커다란 남자의 손이 다가온다.

'더럽혀질 제 몸을.'

거친 손가락이 소녀의 어깨를 건든 그 순간.

'정화하여 주옵소서.'

­퍼억.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남자의 몸이 풍선처럼 터졌다.

촤륵. 엄청난 양의 피가 소녀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소녀는.

"아, 아아, 아하하하하하하하­."

광소. 떨리는 어깨를 양 손으로 부여잡으며 소녀는 웃었다.

"또, 또 죽여버렸어."

얼굴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핥는다. 쓰린 피의 맛. '죄'의 물결. 생명이 끊어진 흔적.

"에헤, 에헤헤헤. 봐봐요, 언니. 이렇게 먹을 게 잔뜩 있어."

풀려버린 동공. 흐트러진 머리카락. 흘러내린 옷가지.

창문 밖으로 달이 비친다. 달빛을 받은 소녀의 머리카락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피의 색보다 진한 붉은색으로­.

"헤헤, 언니 나 잘했지? 이걸로 소피아랑, 리사랑, 엘렌이랑. 다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

오늘도 '죄'를 저질렀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원죄'. 비록 그들이 악인이라 할지라도.

"언니? 어디 가는 거야? 칭찬, 칭찬해 줘! 나 잘했지? 그렇지?"

하지만 괜찮다. 자신을 보고 있는 건 오직 신들 뿐일 테니까.

"아니."

활짝 열린 창문.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네모네에게 드리운다.

"당신은 망가져 있습니다."

회색의 머리카락. 검게 칠한 신부복.

그리고 저 눈빛.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

"꿈에서 깰 시간입니다. '성녀' 아네모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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