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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25화 (25/109)

〈 25화 〉 붉은 머리의 성녀(2)

* * *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그곳에서 '나'는 태어났어.

벽을 타고 피가 흐르고,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에는 내 모습만이 비췄어.

발을 딛고 일어나, 돌길을 따라 밖으로 나갔지.

회색 옷을 입은 신자들. 그들이 환호성을 질렀어. 누군가는 기도를 올리고, 누군가는 성가를 불렀지.

'성녀'.

그들이 바랐던 기적. 반복된 '제조' 끝에 태어난 최초의 결과물.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성녀였던 거야.

그들의 뜻에 따라 옥좌에 앉고.

그들의 기도에 따라 '피의 기적'을 내리고.

그들의 판단에 따라 누군가의 목숨을 끊고.

그들의 바람에 따라, 거짓된 신앙을 심어주었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원에 들이닥쳤어.

총과 검, 말뚝으로 무장한 그들은 이렇게 외쳤지.

"이교도들을 모두 처단하라."

사원은 피로 물들었어. 그래, 그들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피' 말이야.

나도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연극을 끝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성녀님을 지켜!"

"목숨을 바쳐 막아라!"

"성녀님, 부디 당신만은...!"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절벽의 끝. 신도들은 성녀의 '기적'을 믿고 나를 벼랑 밑으로 밀었어.

하지만 내 몸뚱이는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았고.

콰직.

내 몸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어.

......

"어째서."

눈을 떴을 땐 어느 강변이었어. 상처 하나 없는 채로 말이야. 내가 떠내려왔던 강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어째서 죽지 않은 거야?"

나는 절규했어.

신은 나에게 목숨을 내린 적이 없어. 사는 걸 허락한 적도 없어.

있는 거라곤 신의 권능을 모방한 거짓된 기적. '죄'를 범한 자들의 소망에 의해 태어난 의미 없는 존재.

몇 번이고 죽으려고 했어.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나뭇가지로 몸을 찌르고, 굶주린 늑대 무리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하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지. 피로 물든 주변, 멀쩡히 서 있는 성녀.

마음이 부서진 채, 정처 없는 여정을 계속했어.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지.

이건 '순례'야.

원죄를 품고 태어난 나의 속죄의 길. 존재해서는 안 되었던 한 소녀의 끝없는 지옥. 이 길의 끝에서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워도 지워도 피 냄새는 사그라들지 않아.

* * *

"너, 길을 잃은 거니...?"

"...,,,어?"

죄지은 자들이 모이는 마지막 장소, 레고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있던 나에게, 그녀가 말을 걸었지.

아네트.

나의 친애하는 언니.

"데려올 사람은?"

"......"

"여기 사는 거야?"

"......"

"배가 고프지는 않아?"

꼬르르륵. 대답 대신 울린 건 공복의 신호였어. 그러자 아네트 언니가 내 손을 붙잡고 어딘가로 데려갔어.

"아네트 언니다! 어? 그 언니는 누구야?"

"후훗, 손님이야."

수많은 아이들에 둘러싸인 아네트는 웃음을 지었어.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복한 미소. 그게 너무나도 따뜻해서­.

......

"도망을 왔다구?"

"응."

"어디에서?"

"아주, 먼 곳."

행적불명에, 수상한 점 투성이인 소녀. 이 도시에서 '상냥함'은 '도태'를 뜻해. 설사 그녀라도 나를 의심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었어.

하지만 언니의 입 밖에서 나온 대답은 뜻 밖이었지.

"그럼, 언니라고 부를래?"

"...응?"

"같이 살자. 여기서, 아이들이랑 같이. 후후, 마침 나도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을 찾고 있었거든."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어른이 없는 보금자리. 입에 풀칠을 하기도 간당간당한 식량.

하지만 나도 참 이기적이야. 그 행복의 틈에 끼어들고 싶어서.

"...응. 고마워, 언니."

그만 고개를 끄덕거렸어.

"응,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러니까, 이름이..."

이름? 내 이름은.

"'nemo'. "

"방금 뭐라고 말한 거야?"

"네모. 네모야."

그들의 언어로 '아무것도 아닌' 이라는 뜻.

그것만큼 나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테니까.

"네모? 음... 안 어울려."

"무슨 말이야."

"이렇게 귀여운 아인데! 네모란 이름은 조금 이상하달까, 전혀 귀여운 이름이 아닌걸."

"그럼 언니가 지어 줘."

아네트 언니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들며 말했어.

"모네! 모네는 어때?"

"뭐야 그게. 순서를 바꿨을 뿐이잖아."

"그래도 훨씬 귀엽잖아? 그렇지?"

언니가 손을 뻗었어. 나는 웃으면서 그 손을 잡았지.

그 뒤론, 매 순간이 즐거움의 연속이었어. 내 인생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지.

언니가 밖에 나가 있는 동안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언니가 돌아오면 손에 뜬 빵과 수프로 맛있는 식사를 하는 거야.

가끔은 숲을 보러 가기도 하고, 별하늘을 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어째서? 왜 따라가면 안 되는 거야?"

"말했잖아. 밖은 위험해. 식량을 얻어오는 건 나 혼자만으로 족해."

"하지만, 어떤 일이든 둘이라면 분명...!"

"모네."

아네트 언니는 처음 본 표정을 지었어. 무서운 얼굴로 손가락에 입을 갖다 대며 쉿­. 하고는.

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니까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어.

"모네, 나는 네가 잘 해내 줄 거라 믿어."

* * *

그날 밤. 나는 밖으로 나가는 아네트 언니의 뒤를 몰래 쫓았어. 언니도 참, 나도 어른이야. 나도 심부름 쯤은...

...언니?

언니가 어떤 집 문을 두드렸어. 이윽고 험상궂은 남자가 나오더니, 언니를 거칠게 끌고 들어가 버렸지.

조심스레 다가가 열린 창틈으로 몰래 봤지. 그리고 그 광경은.

­또 왔군, 그 년.

­좋지 않아? 빵 한 조각이면 이 끝내주는 몸을 즐길 수 있다니.

­그건 맞지, 길거리의 창년보다는 훨씬 나아.

­휴, 어때, 너도 할래?

­나는 됐어. 마른 몸은 취향이 아니야.

삐걱거리는 소음. 눈을 감은 언니. 어째서, 어째서 그런 짓을.

"언니!"

나는 창문을 두드렸어. 그러자 남자가 나를 끌고 들어갔지.

"뭐야, 이 년은."

"모네...? 어째서 여기에? 오지, 오지 말랬잖아!"

"오, 드디어 입을 열었네."

절망에 빠진 표정. 원망이 담긴 눈빛. 보지 마, 인니.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모네는 놔줘!"

"아니, 오히려 잘 됐어. 동생인가 보지? 어디 언니가 보는 앞에서 실컷 헐떡여 보라고."

소리를 지르는 언니를 뒤로 하고, 남자가 손을 뻗었어.

나도 저린 짓을 당하는 거야? 언니, 아파 보였어. 슬퍼 보였어. 하지만 언니를 위해서라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잊고 있던 피 냄새가, 다시금 피어올랐어.

콰직­. 으스러졌네. 이쁘다.

"뭐, 뭐야!? 넌 대체... 오, 오지 마! 다가오면 이년의 목숨은..."

콰지직.

"...모네?"

"돌아가자, 언니."

이게 내 최초의 '죄'야.

* * *

얼마 가지 않아 언니는 앓아누웠어.

가뜩이나 쇠약해진 몸에, '그런 짓' 때문에 걸려버린 역병 탓이었지.

나는 눈물을 흘렸어.

"언니, 언니! 제발 일어나 봐!"

"모네...? 너니?"

"언니, 미안해. 나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언니는 내 뺨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지.

"아니, 아니야. 너는 너무 많은 걸 해줬는걸?"

"언니...?"

가늘어지는 숨소리. 언니는 힘을 쥐어 짜내 말했어.

"모네, 부탁이 있어."

"언니가 나으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내 영혼은 곧 여길 떠날 거야. 무섭지는 않아. 굉장히 포근한 느낌이야."

언니의 눈에서 생기가 사리지기 시작했어.

"하지만, 나는 아직 미련이 있어. 아이들, 저 아이들. 리사, 소피아, 엘렌... 내가 죽으면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되지?"

"괜찮아, 나도 어른이란 말야...!"

"저 아이들이 길을 잃는 것, 나는 그게 두려워. 차라리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죽음에 슬퍼할 이유도 없을 텐데."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언니의 마지막 손길. 내 눈물을 닦는 그 손길.

"모네, 저 아이들을, 포기하지 말아 줘."

"언니!!"

"천국이 보여. 너무나도 밝아."

미안해, 모네.

그 말을 끝으로 언니의 힘없는 손이 툭 떨어지네.

"언니? 언니!"

"으응... 무슨 일이야, 모네 언니?"

잠에서 깬 아이들이 목격한 언니의 죽음.

울부짖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어.

그리고 나는­.

"알겠어, 언니."

난 어른이니까. 언니처럼 대단한 어른이니까.

"포기하지 않을게. 슬퍼하게 두지 않을게."

언니의 마지막 부탁은, 동생이 들어줘야지.

"그러니까­."

'성녀'의 힘. 신성한 빛이 아이들을 감싸고.

"얘들아, 잘 시간이야."

"응? 나 왜 깨어 있지... 미안해, 모네 언니!"

"아니, 아니야. 소피아, 언니 이름은 정확히 불러야지."

"히히, 죄송해요. 나 머리가 나빠서..."

"괜찮아. 자, 다시 불러보자. 내 이름은­."

아네모네.

그렇게 내가 태어났어.

* * *

"오빠도, 신부 오빠도 언니를 괴롭히러 온 거구나?"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네요."

피로 만든 검을 둥둥 띄우며 다가오는 성녀.

나는 성직자다. 성직자는 아무리 강하다 한들 '성녀'를 이길 순 없다.

우리의 힘의 원천은 신성력. 그리고 성녀는 신성력의 중심.

이건 상성의 문제다. 이대로 힘을 겨룬다면, 나는 분명 패배하겠지.

"언니를 괴롭히지 마!"

나를 향해 쏘아진 피의 칼날. 그리고.

"너야말로."

내 앞을 검은 날개가 가로막는다.

마왕. 신성력과 대치되는 부의 에너지의 총체.

"신부님을 건드리지 마."

신시아. 그녀가 성녀의 앞에 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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