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붉은 머리의 성녀(3)
* * *
마왕으로 태어났으나 빛이 되기를 희망하는 소녀.
그리고, 성녀로 태어났으나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소녀.
"언니는, 하, 하하하핫!"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걸까."
동전의 양면, 물과 기름.
비슷하지만 정반대를 향하는 두 소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리라.
"그래, 그런 거였어. 신시아 언니는 마왕이었구나?"
"너는 성녀... 아니, 그렇게 보이지는 않네."
서로 너무 많이 닮아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인생. 범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소유자. 통제하기 어려운 본성.
그렇기에.
"처음 봤을 때부터, 언니는 뭔가 꺼려졌어."
"후훗, 우연이네. 나도 마찬가지야."
이 세상에서 둘 만큼은 서로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기에. 그 끔찍한 과거를 되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에 말이다.
"신시아, 조심하세요. 단순한 힘으로 따지면 달의 기사 크루거보다 위입니다."
"괜찮아, 신부님. 신부님은 신부님의 일을 해 줘."
신시아에게 뒤를 맡기고 물러난다. 그녀가 성녀를 맡아줄 동안, 나와 에델은 '그걸' 준비해야 한다.
"아네모네. 널 보면 옛날 생각이 나."
"보지 마.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모든 게 무섭고 두려웠던 시간.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 시절."
신시아의 눈이 차분히 감긴다. 사색에 잠긴 표정이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눈을 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야?" "신부님을 만났으니까. 회색뿐이었던 내 세계가 다채롭게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언니도 신에게 허락받지 않은 목숨인데, 어째서...!"
아네모네의 표정에 분노와 슬픔이 깃든다. 주위의 피 웅덩이에서 검의 형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시아는 꿋꿋이 할 말을 다한다.
"그런 건 상관없어."
"...?"
이윽고 성녀의 표정은 의아함으로 변해 간다.
"신이 어쨌다거나 그런 건 상관없어. 비록 나도 축복받지 못하고 태어났지만..."
그날. 그 철창 안에서 시작된 삶.
그게 나의 자매님, '신시아 생크 프랑'이니까.
"신부님이, 으응, 로렌스 오빠가 삶의 의미를 줬어."
"아니야!"
"행복에는 필요한 자격 따윈 없으니까. 그렇게 로렌스 오빠가 알려줬으니까."
"그럼,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위해서라도, 신부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네트 언니는 죽어야 했던 거야...?"
두 소녀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러니까, 너도 구해줄게. 아네모네."
"...뭐?"
신시아의 좌반신을 감싼 검은 날개가 전방을 향한다.
성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비치는 왼쪽 눈동자. 그것 또한 물들어 간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위선 떨지 마."
아네모네도 전투 준비에 들어간다.
발 밑에 있는 피 웅덩이가 떨린다. 피로 이루어진 검. 다섯 자루의 혈검(血?)이 성녀의 주위를 맴돈다.
"이미 늦었어. 아네트 언니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
"그러니까 도와주려는 거잖아?"
"헤헤, 괜찮아, 아네트 언니. 난 지지 않아."
이변을 눈치챈 신시아가 검은 날개로 방패를 만든다.
"그러니까, 죽일게."
"신시아! 옵니다!"
혈검이 사출된다. 그림자의 여신, 에레쉬키갈의 권능(??)의 일부.
로제리오가 보낸 또 한 장의 편지. 그곳에는 세 번째 성녀의 능력이 적혀 있었다. 능력은 간단했다. '피'에 관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작. 남왕국의 혈법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
"꺄앗!"
검은 날개가 혈검을 막았지만, 물리력으로 다가오는 충격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신시아!"
"괜찮아, 신부님. 그냥 조금 방심했을 뿐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이다. 단순히 피를 폭발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정밀한 조작을 한다고?
"돕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에델 언니도 밖에서 고생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포기할 수는 없어."
"... 알겠습니다. 준비를 이어서 하죠."
나는 신시아를 믿는다. 마음을 다 잡고 준비를 시작한다.
점차 벽면을 채워가는 신성 문자. 이성을 잃은 성녀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아네모네. 난 너보다 언니니까, 따끔하게 혼내 줄게."
신시아가 먼지를 털고 일어난다. 어느새 성녀의 주위에는 또 다른 혈검이 맴돌기 시작했다.
최근 1달간 계속해서 성녀의 힘을 사용한 것이 원인인가.
"귀찮은 힘이네. 나랑 똑같아."
하지만, 1달 동안 변한 것이 성녀뿐만은 아니다.
"하나, 둘!"
투웅. 공기를 터뜨리며 신시아가 앞으로 날아갔다.
마력을 품은 손길. 언제라도 칼날로 변할 수 있는 손톱을 혈검에 향한다.
"오지 마!"
아네모네의 외침에 혈검이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신시아가 납작 엎드려 폭발을 흘려낸다.
"조금 아플 거야."
검은 깃털이 성녀의 주변에 흩날린다.
"펑하고 터져."
신시아의 신호. 마력을 머금은 깃털이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킨다.
"꺄아아아앗!"
"아직이야!"
신시아의 붉은 왼쪽 눈. 최근에야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했다.
"마안(??)."
마안.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시각'의 형태로 발현하는 변질된 힘.
마왕 후보자인 신시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미안, 하지만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어."
"커헉...?"
아네모네가 자신의 목을 틀어잡았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소리. 빠져나가는 힘.
각 마안에는 특징이 있다. 상대의 움직임을 봉하거나 불을 일으키는 등 말이다.
신시아의 마안은 '질식'. 이름 그대로 대상의 호흡을 '지워버리는' 능력이다. 간단하지만, 그 위력은...
"큭, 커헉, 허, 헌니..."
"부탁이니까 가만히 있어 줘...!"
신시아가 표정을 찡그린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네모네의 모습을 보기 힘든 것이다.
명백히 끔찍한 능력. 그렇기에 나도 사용을 자제하라 했지만, 어떤 상처도 재생해내는 성녀에게는 마안이 가장 도움이 된다.
"신시아, 거의 다 되었습니다!"
"신부님, 계속하긴 힘들 것 같아..."
마안의 단점은, 한 번 눈을 감으면 잠시 능력이 해제된다는 것이다.
마안을 위주로 활동하는 전사나 마법사는 별 문제없지만,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않은 신시아에게 마안의 유지는 버거운 것이다.
"으읏, 미안해, 신부님."
붉은 눈이 잠시 빛을 잃는다. 아주 작은 틈. 아네모네는 피 웅덩이를 향해 크게 발을 굴렸다.
성녀의 몸을 감싸는 피보라. 머리카락은 붉은색을 넘어 이글거리는 불꽃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이 도시 사람들의 피를 모두 바치면..."
성녀의 눈에 남은 감정은, 이제 '광기' 뿐이다.
힘의 폭주, 기적의 구현. 마왕의 힘을 어느 정도 다루기 시작한 신시아라도 그녀를 막기는 버거울 것이다.
"로렌스! 이쪽은 준비 끝났어!"
물론 그녀 혼자라면 말이다.
지붕 위에서 에델이 손을 흔들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에델."
로제리오의 편지. 그 안에는 어떤 술식의 초안이 그려져 있었다.
사제와 성기사, 이단심문관의 성법을 봉인하는 일은 수도사의 주특기다.
"만약 안 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술식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위해 고안된 성법.
"로제리오가 만든 성법이니까요."
우우우웅.
이미 반쯤 폐허가 된 가택을 청록색의 빛이 둘러싼다.
아네모네를 중심으로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인 신성 문자.
"아네모네, 우리는 당신을 탓할 수 없습니다."
이변을 눈치챈 성녀가 몸을 빼려 해 보지만, 오히려 빛의 사슬이 그녀의 팔을 사로잡았다.
"이 세상에 원한을 품은 것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성녀가 울분을 토한다. 무력감, 그렇게 바라 왔던 무력감. 하지만 지금만은 원하지 않았을 테지.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성법, '붉은 장미의 정원'.
로제리오, 그 녀석답게 괴상한 네이밍 센스다.
"당신이 더 이상 죄를 짓도록 두지 않겠습니다."
온몸을 속박당한 아네모네에게 다가간다.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성력이 눈에 띄게 줄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안녕히 주무시길."
아네모네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져다 댄다.
스르르, 하고 그녀의 눈이 감긴다.
"언...니..."
절망감을 입으로 뱉어 내면서.
그렇게, 오늘의 '죄'는 끝을 맺었다.
* * *
"그래, 이 꼬맹이가 성녀라고?"
"엄밀히 말하면 성녀 후보입니다."
돌아온 대성당. 강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알베르가 물었다.
"혹시 못 믿으시는 겁니까?"
"흥, 무슨. 전부 지켜봤어. 내 성법은 감시에 용이하거든."
알베르의 대표 성법은, 지정한 장소의 광범위한 투시. 알베르가 레고르에 배정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 이걸로 임무는 일단락된 건가?"
"아니, 아직이야. 이 도시에 남은 성녀의 잔재, 그걸 모두 지우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
"에델바이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베르가 웃으며 말한다.
"대성당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
"네, 네. 그럼 조금만 더 신세를 지도록 할게."
붉은 머리의 성녀, 아네모네.
그녀의 얼굴을 본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찡그린 얼굴로 잠자고 있다.
붉어진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옅은 금발로 돌아왔으나, 몇 가닥은 여전히 피의 색을 품고 있다.
'그녀에게 할 말이... 너무나 많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