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성녀였을 소녀, 마왕이었을 소녀(1)
* * *
"으응... 핫?"
"아, 깨어났나요, 신시아."
내 어깨에 기댄 채 졸고 있던 신시아. 그녀가 눈을 떴다.
"나 자버린 거야?"
"그럴 만도 하죠. 피로가 잔뜩 쌓였을 테니까요."
"침까지 흘리고... 부끄러워, 정말."
붉은 머리의 성녀, 아네모네.
순수한 힘의 크기로 압도하는 그녀를 제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왕의 힘을 각성하기 시작한 신시아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큰 희생을 각오해야 했겠지.
"수고 많았습니다, 신시아."
"헤헤, 별로 한 것도 없는걸."
폭주하지 않고 힘을 잘 통제한 신시아에겐, 무슨 포상이 좋을까...
"신시아."
"다음에 또 도움이 필요하면 말만 해. 난 언제든지... 신부님?"
내쪽을 바라보는 신시아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내 품 안에 들어온 신시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신시아의 얼굴은 히아신스보다도 화사하고, 에델바이스보다도 투명하며, 아네모네보다도 붉다.
"신...부님...? 빤히 바라보면, 부끄러워..."
"이건 칭찬입니다."
츗. 신시아의 이마를 걷어내고 그곳에 입을 맞춘다.
"시, 시, 시, 시, 신부님!?"
신시아의 얼굴에서 김이 나기 시작한다. 길을 잃은 시선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당황한 입은 어버버 소리를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이건, 제 애정이고요."
츗.
무방비한 신시아의 볼에 다시 입을 맞춘다.
"히끗."
"볼이 많이 부르텄네요. 잠자리가 맞지 않았나요?"
"시, 신부님, 가, 갑자기 이게 무슨...!"
마치 첫사랑도 알지 못하는 마을 처녀처럼, 신시아가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힌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그만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신시아는 싫었나요?"
"아니, 아니야! 좋아, 너무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아!. 하, 하지만 나도 마음의 준비란 게 필요하단 말야."
"미안해요. 최근에는 별로 해주지 않은 것 같아서."
"그거야 에델 언니나 다른 수녀님들이 있었으니까...!"
애써 변명을 하는 신시아의 모습이, 마치 칭찬받아 기쁜 마음을 숨기는 어린아이 같다.
"신시아도 많이 컸네요."
"응?"
"처음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난처한 상황을 참 많이 일으켰는데."
"그만 잊어 줘, 신부니임!"
신시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투덜거린다.
그래, 그야말로 평범한 그 나잇대의 소녀처럼 말이다.
감정 없는 인형이었던 그녀지만, 여러 일을 거치며 점점 인간의 마음을 찾아가고 있다. 마왕이 깨어날수록 인간에 가까워진다라... 아이러니하군.
"이제는 당분간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군요. 신시아도 참을성이 생긴 것 같으니."
뿌듯한 표정으로 신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아니야."
신시아가 나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렁그렁한 눈빛, 잔뜩 상기된 얼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내게 말한다.
"신부님 곁이 아니면 싫어. 신부님이, 로렌스 오빠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
마왕이나 또 다른 인격에 의존하지 않고, 한 명의 '소녀'로서.
신시아는 담담히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눈을 뜨면 로렌스 오빠가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고, 그 커다란 손으로 날 어루만져 줬으면 좋겠어."
"신시아, 신시아는 이제 어른이잖아요."
"어른이 뭐가 어때서! 오빠 곁을 떠나야 한다면, 난 영원히 어린 채로도 족해."
폭주의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놀랍도록 차분하다.
'마왕'이 아니게 된 신시아는 매일 이런 표정을 지어주겠지. 그날을 생각하면. 벌써 웃음기가 감돈다.
"후훗."
"왜, 왜 웃는 거야!"
"아니, 기뻐서요."
신시아를 껴안는다. 그녀의 성장은 내게 이토록 뿌듯함을 안겨준다.
'그곳'에서의 첫만남이 떠오른다. 죽음을 간절히 바랐던 소녀. 마음을 잃어버린 이단심문관.
하지만 지금은? 소녀는 행복한 삶을 그리고, 이단심문관은 그녀의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돌아가면 신시아에겐 상을 줘야겠네요. 이사도라 자매님께 부탁해서 같이 핫케이크라도 만들까요?"
"핫케이크?"
'핫케이크'라는 말을 들은 신시아의 눈이 반짝인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당분간 신시아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도 괜찮겠다. 가까운 언덕이라도 가서, 소풍 같은 걸 즐겨볼까.
"저기, 로렌스 오빠."
"네?"
"그, 상이란 거... 지금 받아도 돼?"
신시아답지 않게, 얼굴을 푹 숙이고 조심스레 나에게 묻는다.
얼핏 보이는 틈 사이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빨개진 얼굴이 보인다.
"지금... 말인가요?"
"나, 꾹 참았으니까. 오빠가 말한 대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꼭 참았으니까."
신시아가 고개를 든다.
영롱한 두 눈에는 내 모습이 비친다.
"오늘만큼은, 참을성 없는 아이여도 될까...?"
"......"
"역시 안 되려나. 히힛, 미안해, 신부님. 나 좀 더 참을..."
"신시아."
고요한 강당. 달만이 어두움을 밝히는 이곳.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떨리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뿐이다.
신시아. 나의 자매님.
그녀의 얼굴, 눈동자, 머릿결, 가슴, 목덜미, 그리고 입술.
"...응."
신시아의 눈이 감긴다.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민다.
나도 눈을 감는다. 고개를 살짝 꺾고, 조금씩 앞으로.
쪽.
신시아와 나의 입술이 겹친다.
이미 몇 번이고 해온 입맞춤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평소보다 더 특별하다.
"헤읏?"
신시아의 몸이 흠칫 떨린다. 아직 혀는 무리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신시아가 살짝 입술을 떼어 숨을 쉬었다.
"...오빠는 변태."
신시아가 내 볼을 부여잡고 다시금 입술을 부딪혀 왔다.
부드러운 혀가 입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을 맛보고, 굴리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다.
"푸하."
다시 입이 떨어지고.
"츄읍."
또 하나가 된다.
숨이 찰 때까지 서로의 숨결을 들이마시고, 밀착한 몸으로 체온을 나누며.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로렌스, 오빠."
"네, 신시아."
"헤헷, 사랑해. 정말로."
대답은... 시간 낭비다.
신시아의 입을 다시 탐한다. 떨림은 멎고, 심장의 두근거림만이 그 자리에 대신 머무를 뿐이다.
신들이시여. 부디 오늘만은 눈감아 주소서.
* * *
두 사람만의 소리가 가득한 강당. 그 문의 뒤편에 한 여인이 서 있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다.
"후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작은 한숨.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검은 머리의 이단심문관 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있었네, 에델바이스."
남자의 부름에, 여인은 태연히 표정을 바꾼다.
"알베르? 어쩐 일일까."
"보고만 있군. 저 둘을 말이야."
"...어떻게 본 거야?"
"말했잖아, 에델바이스."
알베르가 손을 펼친다. 그러자 그의 등 뒤편으로 초록색의 수많은 신성 문자들이 떠올랐다.
"이 도시에서 내 눈을 피할 자는 없어. 내가 보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이지, 기분 나쁜 성법이네."
에델이 알베르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후회하고 있지?"
"......"
말 없이 걸어가는 에델을 향해 알베르가 다시금 말했다.
"저 자리에 있는 게 마왕 꼬맹이가 아닌 나였다면, 하고." "너."
에델이 자리에 멈춰 선다. 그리고는 알베르를 향해 되걷기 시작했다.
"네가 왜 짜증 나는지, 넌 알지 못하지?" "넌 항상 그랬지. 정곡을 찔리면 독설을 내뱉고."
"조용히 해."
"로렌스에게 마음을 품었나 보네. 안타깝게도. 힘들어 보이지만."
철컥. 에델이 총을 껴내 알베르에게 겨눈다.
"그 입, 당장 다물어."
"에델바이스. 넌 지극한 현실주의자였지. 이미 너도 알고 있잖아?"
로렌스 프랑.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소녀.
자신은 그를 바꾸지 못했다. 자신은 그에게 미련을 갖게 하지 못했다.
에델은 신시아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아니, 아무 생각 없어. 로렌스와는 친구일 뿐이야."
"에델바이스. 그 녀석은 그만 포기해. 여기 너만을 생각하는 남자가 있잖아."
알베르가 손바닥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후훗, 웃기지도 않네. 잘 들어, 알베르. 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건네고 싶으면."
에델이 총을 내린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돌렸다.
"우선 자신한테 솔직해지는 게 좋을 거야."
혼자 남은 방. 알베르는 웃기 시작한다.
"크큭, 크하하하하하핫."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서, 알베르는 마음을 정했다.
"그래, 에델바이스. 넌 언제나 로렌스를 향해 떠날 거야."
손을 바라본다. 너무나도 더러운 손이다.
창밖에는 짖은 안개가 껴 있다.
"아름다운 새에는... 그에 걸맞은 새장이 필요한 법이지."
* * *
"드디어 깨어났군요."
"이게 무슨 짓이야, 신부 오빠?"
성수를 머금은 특수 재질의 밧줄. 양팔을 단단히 묶인 아네모네가 나를 노려다 보았다.
"어느 정도 당신의 인격으로 돌아온 것 같군요."
"이거 당장 풀어. 내가 안 가면 아이들이...!"
"아이들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에델이 가 있거든요."
아침에 본 에델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지만, 그녀의 성격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소녀, '성녀' 아네모네 뿐이다.
"저항하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조금 특별한 조치를 해놨거든요."
"대체 무슨 짓을..."
밧줄에 묶인 채 아네모네가 내게 손을 뻗는다.
허공을 휘저은 손은 이윽고 툭,하고 힘이 빠져 쓰러졌다.
"어, 어째서?"
당황한 눈치다. 원래는 최대한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정상이 아니다.
"성법이 나오지 않아...?"
"그래도 자신이 쓰는 것이 성법이라는 자각은 있었나 보군요."
그녀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에 크게 그려져 있는 녹색의 십자 문양.
"신시아, 그녀에게 알려주세요."
"응, 신부님."
신시아가 아네모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가슴팍이 보이도록 옷을 내린다.
그녀의 가슴에는, 내 손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십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야?"
"신성력, 그러니까 여러 종류의 마력을 봉인하는 특수한 술식입니다. 신시아의 로자리오와 같은 종류죠. 맘 같아선 로자리오를 하나 더 만들어드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흉부를 감싼 아네모네가 나를 노려보았다.
"신부 오빠는... 나를 어떻게 할 셈이야?"
"둘 중 하나죠. '신부'로서 교황청에 보고해 당신을 성녀로 공표하거나... 아니면 '이단심문관'으로서 목숨을 끊거나."
"죽...여...?"
죽음. 태어나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개념. 성녀의 눈에는 안식에 대한 기대와 미지에 대한 공포가 공존했다.
"푸훗,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습니다. 저는 '로렌스'로서, 친구의 부탁으로 당신을 찾아온 거니까요."
로제리오의 부탁. 그가 쫒고 있는 '성녀'의 진실.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어디로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잠시."
무엇보다도, '아네모네' 개인을 구하기 위해서.
"얘기 좀 할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