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성녀였을 소녀, 마왕이었을 소녀(2)
* * *
"나는 할 얘기 없어."
"그러지 말고요. 아네모네, 당신도 알고 싶잖아요? 당신은 어떻게 태어난 건지, 왜 제가 당신을 '성녀'라고 부르는지."
성녀. 그 단어에 아네모네가 반응했다. 의심과 의구심이 한 데 뒤섞인 시선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당신은 알고 있는 거야? 나를 만든 자들이 누군지?"
"아뇨.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로제리오. 성녀의 행방을 쫓고 있는 그 녀석이라면 이미 대부분의 정보를 입수했으리라. 그중에는 아네모네, 즉 '피의 성녀'를 만든 자들에 대한 정보도 함께 있을 거고.
'그리고 에델이 건네준 문서.'
피의 성녀가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곳은 공국과의 국경 지대다.
이단심문관들의 독립 기관, '이단심문회'의 기록을 열람하던 중, 특이한 문서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다고 에델이 말해주었다.
기밀 수준은 '최중요 기밀'. 허나 내용은 지극히 단순했다.
'공국의 [기록 말소] 근교에서 [기록 말소]를 연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원 형태의 건물을 발견. 이단심문회에서는 이를 신의 교리를 해치는 이단으로 판정. [기록 말소]명의 이단심문관을 파견하여 이단자들을 모두 말살했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물로 보이는 [기록 말소]는 발견하지 못하여...'
즉, 이단심문회는 이미 아네모네라는 인물이 존재할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허나 거기까지일 뿐, 이미 이단심문관의 자격을 버린 나로서는 더 깊은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단심문관인 에델이 승진하기를 빌거나, 수도사인 로제리오가 그들의 비밀을 파헤쳐주기를 바랄 수밖에.
"하지만 '성녀'에 관한 정보라면 드릴 수 있죠."
"성녀, 성녀, 그놈의 성녀! 난 성녀도 뭣도 아니야!"
아네모네가 악을 쓴다. 아마도 그녀를 광신적으로 숭배한 이단자들, 그리고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이능에 염증이 일었기 때문이겠지.
"맞아요. 당신은 성녀가 아닙니다. 아직은 말이죠."
"언젠가는 될 거라는 소리야?"
"그건 당신 하기에 따라 다르죠. 당신은 '성녀'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아네모네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않은, 이단자들에 의해 주입된 지식만을 알고 있는 그녀가 성녀를 알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신시아, 신시아가 대답해 볼까요?"
"어...음... 신의 선택을 받은 여자?"
"음, 그래요. 그 정도만 알아두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성녀.
신의 기적을 그 몸에 담은 축복. 신의 존재 증명.
그러나 성녀는 마도 공화국의 현자나 제국의 기사단장과는 다르게, '개인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직 신의 선택에 의해 탄생하는 특수 직책. 성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지만, 그 수는 결코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한 시대에 성녀가 셋이나 있는 게 신기한 거죠."
성도의 광장에서 본 '빛의 성녀'.
용사와 동행하고 있는 '붕대를 감은 성녀'.
그리고 내 앞에 있는 '피의 성녀'.
아니, 로제리오의 말 대로라면 어쩌면 성녀가 더 존재할지도 모른다.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신의 마지막 자비인가.
"엄연히 따지자면 당신은 성녀가 아니지만... 교황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말했잖아! 성녀 같은 거, 난 안 해."
"성녀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아네모네, 혹시 성녀의 조건에 대해 알고 있나요?"
"성녀의... 조건?"
우리 칠교(七)가 따르는 일곱 신.
바람과 공간의 신, 엔렐.
물과 시간의 신, 엔키.
대지와 생명의 여신, 닌후르삭.
강철과 수호의 여신, 인인나.
태양과 전쟁의 신, 우투.
달과 마법의 여신, 난나.
그리고 그림자와 유희의 여신, 에레쉬키갈.
성녀의 첫째 조건은 이 일곱 신 중 하나의 권능을 몸에 지니는 것이다.
'빛의 성녀'는 여신 닌후르삭의 권능 중 '풍요'를 지니고 있다. 죽어가는 대지도 그녀가 기도하면 다시 찬란한 생명을 품은 땅이 된다.
'붕대를 감은 성녀'는... 불명이다. 로제리오의 조사에 따르면 복합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 아네모네."
아네모네가 사용하는 '피'의 권능. 그 권능의 주인은 그림자와 유희의 여신, 에레쉬키갈.
"에레쉬키갈은 모든 종류의 유희를 사랑합니다. 술로 인한 몽환경, 몸을 섞는 것에서 얻는 쾌락, 도박과 승리의 달콤함, 그리고 피의 향락까지도."
칠교 중 가장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신이 바로 에레쉬키갈이다. 역대 성녀 중 에레쉬키갈의 권능을 받든 성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첫째, 신의 권능을 품을 것. 이건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군요."
나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 접어 보였다.
"그리고 두 번째,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여인일 것."
성녀는 그 몸을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강했다. 물론 그 역시 과거의 이야기지만, 적어도 성녀로 선포되는 여인은 모두 나이가 어렸다.
"신들도 참 이상하죠. 그들의 기적을 오직 특정 나잇대의 젊은 여성에게만 나누어 준다니. 뭐, 그렇다고 해서 성국의 남자들이 그걸 억울해하지는 않습니다만, 조금 의문이 들죠."
아네모네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본다.
아직 다 여물지 않은 피부, 가는 곡선의 얼굴은 보호 욕구마저 불러일으킨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런 발상에 도달하게 되죠. 혹시 성녀의 육체에는 특정 조건이 있는 게 아닐까. 신의 권능이라는 술을 아무 그릇에나 담아낼 수는 없으니까요."
로제리오가 쫒는 성녀 후보들도 모두 아네모네와 비슷한 나이일 것이다. 다른 어딘가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온다.
"이유야 어찌됐든, 두 번째 조건도 달성했네요. 그럼 이제 남은 건 세 번째인데,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죠."
성녀가 성녀로 불리는 이유.
그녀들이 성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국의 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기적을 일으킬 것. 모두가 인정할 만한 기적을."
'빛의 성녀'는 마기로 황폐화한 땅을 풍요로운 녹색의 대지로 바꾸었다.
'붕대를 감은 성녀'는 들은 바가 없으나, 현 용사가 그녀의 기적을 증언했다.
"당신의 힘이라면, 기적 한둘 쯤은 쉽게 일으키겠죠."
"하, 하하하하하!"
초점을 잃은 동공. '기적'. 그 단어를 들은 아네모네의 표정이 굳더니,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짓기 시작한다.
"푸훗, 크흐흐흐흣, 기적? 기적이라고?"
아네모네가 손을 뻗는다.
나의 손바닥에,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있는 초록 십자가 반응한다.
피의 성법, 그것을 사용하려 한 흔적이다.
"이런 건, 내가 가진 힘은...!"
십자 문양이 요동친다. 내 손바닥의 십자 문양에... 흠집이 일어났다고?
시선을 올려 아네모네의 손 끝을 바라본다. 그녀가 금제(??)를 풀고 아주 미약한 성법을 발현한다.
손끝에 모이는 피. 작은 물방울을 만들더니, 이윽고 폭발하여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절대로 기적 같은 게 아니야!"
아네모네가 무릎을 꿇는다. 자신의 힘, 그것이 지닌 가능성에 절망하고, 원망하면서.
"아네모네..."
신시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네모네를 바라본다. 그녀를 동정하며 살짝 손을 뻗으려 하다, 이내 그만둔다.
"아네모네. 당신의 힘은 분명 파괴지향적이지만... '기적'이란 자기 해석에 가깝습니다."
바닥에 고인 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뭉근한 피의 감촉, 이를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피가 흐르지 않는 인간 또한 없을 것이다.
"가령 당신이 힘의 조절을 배워서 사람을 살린다거나, 아니면 마왕 추종자들을 단죄한다던지 말이죠. 아,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네요."
"시, 신부님?"
신시아가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본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흠흠,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아네트'의 뜻을 따르고 싶다면, 기적을 일으키십시오."
"기적을... 일으켜..."
"네, 기적. 그럼 교황님께서는 친히 당신을 성녀로 공표하시겠죠. 마왕의 위기에서 대륙을 구할 세 번째 성녀."
로제리오는 편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성녀는 슬픈 운명을 지닌 존재라고, 그녀들을 반드시 구해달라고.
'슬픈 운명이라는 말이 긴가민가했는데... 로제리오답군.'
'신부'나 '이단심문관'이 아닌, '로렌스'로서 그녀를 구해주고 싶다.
신시아와 만났던 그날처럼, 피로 물든 이 손으로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을 연옥에서 건져내고 싶다.
"아네모네, 성녀가 될 마음은 드셨나요?"
아네모네에게 손을 뻗는다. 고개를 푹 숙인 아네모네. 그녀가 내 손을 바라본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가 내 손을...
"싫어."
"......"
"역시 싫어. 성녀란 거,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아."
"어째서죠? 당신은 자격이 있습니다. 힘이 있고, 가능성이 있죠. 성녀가 되면 당신이 구할 수 있는 아이들은 더 많아질 겁니다. 리사, 소피아..."
이해할 수 없다. 고통뿐이었던 그녀의 삶이었기에, 아네모네는 행복을 추구할 자격이 있다. 성녀가 되면 성국의 지지를 받는다. 그녀의 '죄'를 속죄할 기회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후, 후후, 후히이잇."
"아네모네, 지금...?"
"우는, 거야?"
신시아가 대신 말을 받았다. 아네모네의 뺨을 타고 구슬만 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난, 하핫, 성녀가 될 수 없어."
대체 무엇 때문에? 아네모네의 몸은 더럽혀지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죄인의 흔적은 피와 내장 뿐이었으니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단순하잖아, 그런 거."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는다. 아네모네가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이 있는 장소.
"죽어가는 가족 하나 살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녀가 될 수 있겠어?"
"아네모네..."
아네트의 죽음 자신의 무력감.
아무리 거대한 힘을 지닌 자라고 하더라도, '치유'에 관한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병든 사람조차 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만물은 사라지기는 쉽지만, 재생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분명 아네트 언니도 바라지 않을 거야. 이런 내가 '성녀'따위로 도망치는 것도."
"그렇지 않아."
신시아가 아네모네에게 외쳤다.
"그래, 차라리 언니를 만나서 용서를 구하면 어떨까?"
"아네모네. 멈춰."
"신시아 언니? 힛, 히힛, 언니는 알고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 그 사람을 직접 땅에 묻는 감각."
아네모네가 손끝을 바라본다. 하얀 살결에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이 묻어버렸다.
"흙을 파내고 언니를 조심스레 들어서, 그대로 내려놨어. 언니는 마치 잠에 빠진 것 같아서. 그런데, 그런데...!"
"아네모네!"
"언니를 차가운 땅속에 내버려 두고, 나만 의미 없는 호흡을 이어 가.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나 따위가 아니라 아네트 언니일 텐데. 난, 난 언니에 대한 기억마저 빼앗고...!"
아네모네가 두 팔로 자신을 부둥켜 안는다. 몸을 떨며 계속해서 눈물을 흘린다.
"미안해, 미안해 언니... 내가 좀 더 힘낼게, 내가 좀 더 노력해서, 언니가 사라지지 않도록...!"
짝.
신시아의 손바닥이 아네모네의 뺨을 강하게 후렸다. 검은 날개까지 꺼내가면서. 상황을 깨닫지 못한 아네모네가 당황한 표정으로 신시아를 바라본다. 뺨에는 붉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다.
"넌 바보야."
"이게 무슨 짓...!"
"누가 어른이라는 거야! 이렇게 바보 같은 말이나 하면서!"
신시아의 얼굴이 붉다. 신시아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넌 너야. 아네트도, 성녀도 아닌 아네모네란 말야!"
신시아가 아네모네의 옷깃을 부여잡는다.
"아무리 언니의 성격을 흉내 내도, 언니의 옷을 입어도! 넌 그 사람이 될 수 없어. 죽은 사람이 될 순 없단 말야!"
"아냐! 난 '없는 존재'니까, 내가 아네트 언니가 되면..."
"그렇지 않아."
신시아가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이 세상에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없는 존재'도 뭣도 아니야. 너를 알아본 사람, 여기 있잖아?"
신시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나를 가리킨다.
"벌써 둘이야. 아네트가 아니라 아네모네를 알게 된 사람들."
"하지만, 그러면 아네트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두 소녀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각자의 눈동자에는 서로의 얼굴이 비쳐 보인다.
"언니는, 모두에게서 잊혀져 버리고 마는 거야?"
"네가 있잖아."
신시아가 아네모네의 뺨을 꾹 눌렀다.
"이 세상에 '아네트'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기특하게도 그녀의 뜻을 이으려 애쓰고 있고. 음, 비록 방법은 잘못됐지만."
"신시아 언니, 제발 그만해."
"그만 못해! 난 너랑 같았어. 운명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내가 지금 죽어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았어. 하지만."
신시아가 눈물이 섞인 미소를 나에게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달이 환히 뜬 그날 밤을 연상시키는 것 같아서...
"신부님을 만났어. 비록 신부님은 내 곁에 있고, 네 언니는 이 세상에 없지만..."
신시아가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결연히 말한다.
"만약 신부님이 죽어버린다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하지만 신부님이 나한테 '살라'고 말한다면, 나는 매일 눈물을 흘리며 살아갈 거야. 나조차 죽어버리면 신부님의 모습을 기억할 사람이 없어지니까."
"언니는, 신시아 언니는, 아네트 언니는...!"
"대답해 봐, 아네모네. 네 언니는 너한테 뭐라고 말했어?"
아네모네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말한다. 울먹이는 목청이 소리를 삼킨다.
"부탁...한다고. 넌...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 말대로야."
신시아가 아네모네를 껴안았다. 눈을 감고, 마치 맏언니라도 된 듯 아네모네의 머리를 감싸고 쓰다듬는다.
신시아에게 안긴 아네모네는... 여전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후련해 보인다. 자신의 감정을 밑바닥까지 긁어내면서.
"이제 괜찮아."
"흑, 흐윽, 흐흑."
"네 언니도 하늘에서 얘기할 거야. 내 동생, 아네모네가 이토록 착한 아이라고."
"흐윽,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울어. 실컷 울어. 피곤하면 어깨에 기대 눈을 감아. 정말, 이렇게 눈물이 많으면서."
아네모네의 우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신시아, 성장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젠 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군. 뭔가 시원섭섭하다. 딸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인가.
성녀였을 소녀. 마왕이었을 소녀.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을 나누는 평범한 두 소녀일 뿐.
아네모네는 신시아의 품에 안겨 울고, 울부짖고, 부둥켜안고,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잠에 들었다.
* * *
아네모네가 신시아의 무릎을 베개 삼아 새근거리며 자고 있다.
그리고 신시아는 아네모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포근한 미소를 짓는다.
"헤헷, 왠지 언니가 된 느낌이야."
"이미 훌륭한 언니예요, 신시아."
"정말?"
"정말입니다. 신시아를 데려오길 잘했군요."
"고마워, 신부님. 하지만 방금 한 얘기들은 모두 진심이야!"
대답 대신, 신시아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춰 주었다.
어느덧 새벽이 끝나간다. 별하늘의 은은한 빛이 신시아와 아네모네를 비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매인 줄 알 정도로 둘은 잘 어울린다.
'이사도라에게 편지를 써야겠군.'
생각보다 일찍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 * *
모두가 숨을 죽인 거리. 어느 폐가의 옥상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죄의 도시, 레고르. 그 전경을 바라보며, 그림자는 침을 뱉었다.
"정말이지 더러워. 역겨워서 토가 올라올 정도야."
그리고 그 뒤편, 안경을 낀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야 그럴 만도 하죠. 인간의 추악함을 바닥까지 보여버린 자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레서. 마왕 추종자.
그가 버려진 도시에 발을 들였다.
"크큭, 그렇지? 역시 그렇지?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없애버려도 상관없는 거지?"
그림자가 후드를 벗었다. 푸른색의 머리에, 푸석푸석한 장발을 한 여성. 달빛에 비친 붉은 눈과 덧니가 그녀의 광기를 보여준다.
"그만두세요, 로리안. 일일이 처리하기에는 쓰레기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으니까요."
"그래~? 그럼 불이라도 질러 볼까. 아니야, 그것보단 독안개를..."
찡그린 이마를 꾹 누른 채, 레서가 로리안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이번엔 나설 필요가 없단 뜻입니다. 무엇보다 이 도시에는 '마왕 후보자' 일행이 머물고 있어요. 꼬리를 밟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뭐야, 설마 무서운 거야?"
무서움. 그 말에 레서의 팔뚝에 힘줄이 올라왔다.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하는 개새끼에게는 교육이 필요한 법이죠."
"아하하하하! 드디어 놀아주는 거야?"
로리안이 단검을 빼든다. 레서는 한숨을 푹 쉬고는 등을 돌렸다.
"여기까지만 하죠. 쓸 데 없는 시간낭비는 사절입니다."
"칫, 재미없어. 그래서? 네가 말한 '재미있는 청소'가 뭐야?"
"곧 알게 될 겁니다."
어둠 속에 레서의 미소만이 번진다. 그의 손에 들린 시약병.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무언가의 피부 조각.
"성자 레고르와 검은가시병... 이 도시에는, 꽤나 재미있는 역사가 있더군요."
새벽이 끝나간다. 그러나 밝은 아침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마왕 추종자. 그들의 어둠이 다시금 역사를 되풀이하려 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