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정화의 날(1)
* * *
"이 도시는 어떻게 되는 거야, 신부님?"
버려진 도시, 레고르를 떠나기 하루 전인 오늘, 거리를 걷던 신시아가 나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 도시는 여전히 죄에 물들어 있을 것이고, 구원의 빛은 희미할 것이며, 대륙 각지에서 사정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죽이고. 그렇게 똑같은 매일이 반복되겠지.
"성녀를 구했다는 점에서 만족하도록 하죠."
"응! 그리고 아이들도."
성녀와 함께 있던 아이들. 리사나 소피아를 비롯한 여덟 명의 아이들은 근처의 수도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레고르의 대성당이 가장 가깝기는 하지만, 알베르의 성격도 좋지 않을뿐더러 제대로 된 보호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아네모네, 괜찮을까."
"이제는 본인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다행인 점은, 자신의 마음에 조금 더 솔직해졌다는 거죠."
"히힛, 누구 덕분일까~?"
"네, 네. 잘했어요, 신시아."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치는 신시아
그런 그녀가 앙증맞아,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히, 힌후임! 아흐아!"
"방정맞은 이 입은 누구에게 달려 있는 걸까요."
방정맞은 입. 그 말을 들은 신시아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여어기!"
"신시아, 설마..."
신시아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삐죽 내민다.
"내 입, 조용히 시켜 줘, 신부님."
"신시아, 여기서는..."
"얼른!"
후우. 너무 요구를 받아주기만 했나. 자고로 성직자란 참을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이번엔 단호히.
"......"
이번만, 딱 이번만 해줄까.
신시아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그리고.
[로렌스.]
"으앗!" "꺄앗!"
근처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알베르?
"아, 알베르? 어디 있는 거죠?"
[오른쪽 벽면. 천으로 가려진 신성 문자.]
알베르가 말한 곳을 살펴보니, 그의 말마따나 초록색 신성 문자가 새겨져 있다. 아마 이것 역시 알베르의 '성법' 중 일부일 것이다.
[쿠쿡, 수녀와 신부가 길 한복판에서 음란한 짓을 하면 쓰나.]
"흠흠, 별일이군요, 알베르. 설마 당신이 먼저 연락을 할 줄이야."
그래도 내심 알베르의 상태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죽일 듯한 표정으로 노려 보았건만, 지금은 제법 누그러진 듯하다.
[안타깝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야.]
"... 간략하게 부탁드리죠."
[눈으로 확인하는 게 빠를 거야. 내가 말하는 장소로 가봐.]
* * *
"이건..."
"시, 신부님?"
알베르가 말한 곳. 도시의 하층부 중심에 있는 작은 빈민가. 그리고 그곳에서 보게 된 것은.
"커흑, 너, 너무 괴로워..."
"하하핫! 이거 봐. 내 몸이... 변하고 있어."
"이건 저주야! 신이 우릴 벌하는 거라고!"
골목 사이사이에 누워있는 환자.
그리고, 그들의 몸에 돋아난 검은 가시였다.
"검은가시병?"
"검은가... 시? 어디서 들어봤는데..."
"신시아. 뒤로 물러나세요. 가능하다면 성수를 온몸에 뿌리고요."
신시아가 허리춤에서 성수를 꺼내 머리에서부터 들이부었다.
'검은가시병'은 세균이 성법에 변질되어 생기는 역병이니, 성수를 사용한다면 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다.
"신시아, 제가 한 말 기억하나요? 이 도시, 레고르의 기원."
"응, 성자 레고르가 대성당을 짓고 이 도시를 만들었다고 했어."
"맞아요. 하지만 이 도시는 어떠한 이유에서 존재를 통째로 말소당하게 되었죠. 그게 바로 최악의 역병, '검은가시'예요."
발현자의 몸에 검은 가시넝쿨이 돋아나고, 극심한 격통과 함께 목숨을 잃은 끔찍한 역병.
성국의 요새였던 레고르가 어이없이 몰락한 이유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뭐가 말이야?"
"'검은가시병'은 오래된 역사책이나 고서에나 나오는 사라진 질병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이 시기에, 그것도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발병한 걸까요?"
그래, 마치 누군가가 악의를 갖고 일을 벌인 것처럼.
이건... 사건의 냄새가 난다.
"신시아, 우선 대성당으로 돌아가죠."
"응!"
* * *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에, 에델?"
황급히 대성당으로 돌아왔을 때, 에델이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저길 봐."
구체적인 대답 대신, 에델은 손가락을 뻗어 대성당 안을 가리켰다.
성당에 구비된 침실. 그중 한 곳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사!"
"아네모네, 언니..."
모여있는 하수도의 아이들. 침대에 누운 누군가의 손을 꽉 잡고 몸을 떠는 아네모네. 누워있는 사람은 리사였다.
"아네모네? 이게 어떻게..."
"신부님? 리사가, 리사의 몸에서 갑자기 이런 게..."
아네모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준다.
말라 비틀어진 가시 덩굴로 보이는 무언가. 빈민가에서 보았던 환자들의 몸에서 나온 그것과 같은 부산물이었다.
"검은가시병..."
"검은가시병? 그게 대체 뭔데?"
"몸에서 검은색의 가시가 돋아나며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는 질병입니다."
"뭐, 뭐?"
아네모네의 동공이 커졌다. 죽음에 이르는 병. 또 누군가가 그녀의 곁을 떠나버릴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지, 그녀의 눈빛이 다시 죽어가기 시작했다.
"아네모네!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어, 어! 응, 알겠어."
검은가시병. 워낙 오랜 옛날에 있었던 병이라 자세한 치료법은 나와있지 않다. 다만 특정한 병균이 성법에 의해 변질되어 생긴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먼저 성수를 리사의 몸에 뿌리세요.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어쩌면 당신도 이 역병에 영향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아네모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부 오빠는 괜찮은 거야?"
"전 괜찮습니다."
나와 에델은 괜찮다. 특수한 성법으로 전신에 시술을 한 '특수 세례'의 대상자.
"전 이단심문관 출신이니까요."
* * *
"후우."
어느 정도 리사의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 잠시 숨을 돌릴 겸 대강당으로 빠져나왔다.
"꼴이 말이 아니군 그래."
"아, 알베르. 당신인가요."
그 자리에는 알베르도 있었다.
그의 등 뒤를 수놓은 수많은 양의 초록색 신성 문자. 이 도시를 관리하는 데에 있어 가장 유용한 능력임은 틀림없다.
"바깥 상황은 어떤가요?"
"좋지 않아. 무엇보다도 속도가 너무 빨라. 서로 간에 접촉도 없었을 텐데, 마치 공기를 타고 퍼지는 것처럼 번지고 있어."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머리가 아파 온다. 아직 성녀의 일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만약 아네모네가 보살피던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야말로 성녀는 폭주하고 말 것이다.
"완전히 발이 묶였군. 우스운 일이야."
알베르의 말대로다. 나와 신시아, 그리고 에델은 도시에서 빠져나간다 한들 성국에서 제지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알베르, 성국에 보고는?"
"이미 올렸지. 원격 소통이 가능한 성법은 기본 소양이거든."
하지만 성녀는... 떠날 수 없다.
역병은 긴급 사태에 해당된다. 이미 성국의 고위층은 알베르의 보고를 통해 레고르의 봉쇄를 준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성녀 혼자라면 모르겠으나, 아이들은 데리고 갈 수 없다.
아네모네는 아이들을 두고 떠나지 않을 테니까.
"뭘 그리 걱정하는 거야, 로렌스. 너다운 방법이 있잖아?"
알베르가 손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탕, 하고. 아이들을 전부 죽여. 그럼 성녀도 포기하겠지."
"...여전히 나를 비꼬는 거냐, 알베르."
내 감도 많이 죽었군. 이 녀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양친의 망령에 둘러싸여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도발은 그만해라. 신경을 쓰고 싶은 건 하나면 족해."
"분부대로 합죠, 위대한 이단심문관 님."
알베르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강당은... 너무나 고요하다.
* * *
역병 사태가 일어난 지 3일이 지났다.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 났는가.
"로렌스."
"아, 에델."
수녀복 대신 이단심문관의 제복을 갖춰 입은 에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 상황은..."
에델은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다.
"하층부는 절반이 당했어. 그나마 집다운 공간이 있는 상층부는 상황이 낫지만."
3일. 겨우 그 시간 동안 하층부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고통에 저는 신음소리, 시체를 태우는 불꽃의 연기가 끊이지 않는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어. 도시 하층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것 같긴 한데... 발병 시기에 규칙성이 보이지 않아."
연기로 자욱한 하늘은 멸망 직전의 도시처럼 보인다.
레고르 최후의 날, 마치 그날을 겪는 것 같은 느낌이다.
"로렌스, 성녀는 어떻게 됐어? 아이들은?"
"다행히 다른 아이들은 아직 무사하지만... 리사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에델과의 대화 도중, 마치 우리의 말을 잇는 것처럼 알베르가 걸어 들어와 말했다.
"잠시 오는 게 좋을 것 같군."
"알베르? 무슨 일이 있나요?"
알베르의 표정이 미묘하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사람의 얼굴이다.
"헤매는 어린양이, 곧 주님의 곁으로 갈 것 같다."
* * *
"리사 언니!"
"리사!"
아이들과 신시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병실에는 누워있는 건, 이미 하반신이 검은 덩굴에 침식된 리사.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활기차게 뛰어다니던 꼬마는,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신부님. 성수, 잔뜩 사용했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어."
"이미 너무 많이 진행된 겁니다. 애초에 성수로 막을 수 있는 병이었다면, 레고르도 한번 멸망하지는 않았겠죠."
24시간. 성수는 그 시간 안에 찾아올 죽음을 늦출 뿐, 근본적인 해결법은 되지 못한다.
"아네모네..."
신시아가 성녀의 이름을 부른다.
리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아네모네.
분명 좀 더 격절적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이다.
"리사."
"아네모네... 언니..."
"괜찮아."
ㅇ아네모네가 눈을 감는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처음 그녀를 만난 그 순간처럼 말이다.
"다, 괜찮을 거야."
아네모네가 손목에 감아놓은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칼에 난자당한 듯 수 없이 새겨진 자상.
아네모네가 손을 들어 리사의 몸에 가까이 댄다. 그러자 아직 굳지 않은 성녀의 손목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뚝, 뚝. 핏방울이 리사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리고.
"하아, 언니..."
"응, 난 여기 있어, 리사. 어디로도 가지 않아."
기적이 일어났다.
"신부님, 리사의 몸이...!"
"보입니다, 신시아. 아마도 이것이."
'피의 성녀'. 그녀가 일으킨 작은 기적.
리사의 하반신을 덮고 있던 가시 덩굴이 핏빛으로 변해 녹아 사라졌다.
"더러운 '피'는 정화한다. 그것이 당신의 능력입니까, 아네모네."
"난 그런 복잡한 거 잘 몰라. 하지만."
아네모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내미는 게 '성녀'잖아?"
* * *
"대성당의 지하고?"
"그렇습니다, 에델. 아무래도 이번 사태를 해결하려면, 과거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런 말은 알베르한테 하지. 왜 나를?"
"알잖습니까. 제가 말하면 일만 커질 거."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에델이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자, 여기."
낡은 열쇠 하나를 내게 내민다.
"하."
"또 뭐야?"
"아니, 아닙니다. 에델과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헀어요."
* * *
대성당에 다시 어둠이 드리운다.
모두가 잠자고 있는 고요한 시간. 알베르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이겠지.
'찾았다.'
성자 레고르의 동상. 그 밑에, 에델이 알려준 지하고의 입구가 있었다.
열쇠를 넣고 돌리자, 동상이 회전하며 비밀 계단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먼지가 적군. 알베르인가?'
누군가가 자주 드나든 흔적. 하기사, 이곳을 관리하는 것이 알베르의 직무이니 그럴 법도 하다.
뚜벅, 뚜벅.
돌계단을 한참 내려간 끝에, 지하에 있는 방 몇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저 끝의 제일 큰 방이 안치실일 거고.'
성자 레고르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는 큰 방.
성인들의 유해는 성유물로 취급되어 철저한 결계 속에 보관된다.
'하지만 저건, 봉인 성법이 너무 헐겁군.'
알베르에게 저런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관심있어 하는 곳은.
'기록실이지. 이 죄 깊은 도시의 모든 역사가 기록된.'
낡은 문을 연다. 방을 가득 채운 낡은 서고와 책장들이 보인다.
* * *
밤이 너무나도 깊어졌다.
역시 하루 만에 단서를 찾는 건 무리인가.
'오늘은... 포기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기록실을 나가려는 그때.
툭.
서고의 천장에서 책 한 권이 떨어졌다. 마치 누군가가 다시 읽기 위해 살짝 빼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건..."
책을 열고 내용을 본다. 그러다 문득, 소제목 한 줄이 눈에 띄었다.
성자 레고르. 검은가시병. 그 둘의 상관관계.
[성인들은 일반인의 몇 배에 달하는 수명을 지니고 있다. 그 예로 이 도시를 세운 성자, 레고르를 들 수 있다.]
이건, 그토록 찾던 단서다.
[...레고르의 연구는 불사에 관한 것이었다. 남들보다 긴 수명을 지녔음에도 어째서 성인은 불사를 추구하는가. 의문이다.]
[...XXX년 X월 X일. 레고르에 역병이 발생. 우리는 이에 대해 성자 레고르와 상의하여...]
[무언가 이상하다. 아무리 감염자를 처단하고 정화해도 역병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자 레고르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출입을 끊어...]
[...나도 곧 죽을 것이다. 이 역병은 재앙이다. 신이 내린 재앙. 아니, 어쩌면 신이 내린 것이 아닐 수도.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의심가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성자 레고르. 그의 연구에서 분명 비슷한 현상이...]
[레고르가 실종되었다. 빌어먹을 새끼.]
[이걸 기 록으 로 남 ㄱ]
......
내용은 여기서 끊겨 있었다.
머릿속으로 하나의 가정이 떠오른다.
불사를 바란 성자의 연구. 그 후에 발생한 역병. 사라진 성자.
그럼 저 안치실은?
"로렌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르. 이 대성당의 총책임자.
아마도 성자의 유해에 대한 행방을 잘 알고 있을 유일한 인물.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군."
"알베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알베르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대체 무슨 꿍꿍이냐.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알베르의 다음 말이 모든 것을 가로막았다.
"진실을 알기 전에, 알아둬야 할 사항이 있어."
"사항...?"
"이단심문회가 왔어."
툭. 손이 떨어진다.
이단심문회. 아마도 성국 내에서 가장 냉정하고, 가장 광신적일 집단.
그들이 이 도시에 찾아온다는 건.
"곧 '대정화'가 시작될 거야."
모든 것의, '말살'을 뜻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