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언젠가 언니에게 말할 이야기
* * *
모네. 오늘은 새로운 노래를 가르쳐 줄게.
노래? 응! 좋아!
후훗, 그럼 알려줄게. 고요한 숲길에 작은 다람쥐
"...산딸기를 가득 담아 입에 넣고서."
"아네모네...언니..."
"괜찮아. 언니 곁에 있어."
대성당 지하의 서고. 그곳에는 아네모네와 아이들이 있었다.
간이 침대에는 리사가 누워있고, 다른 아이들은 모포를 덮은 채 새우잠을 자고 있다.
'바깥이 조용해졌어.'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리던 소음.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바깥은 괜찮은 걸까?'
알베르. 잊혀진 도시, 레고르의 대성당을 관리하던 신부.
허나 신에게 뜻을 바친 그 또한 마왕의 추종자였다.
급히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봉인을 친 것은 좋았지만, 물도, 식량도 없는 이곳에 언제까지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시아 언니... 신부 오빠...'
아네모네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자신은 성녀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하지만 자그마한 기적조차 일으키지 못한 자신이, 과연 '성녀'라고 칭해질 자격이 있는 걸까?
먼 옛날, 과거의 성녀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기적을 일으켰고, 사후에 성녀로 봉해진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자신에게... 목숨을 바칠 각오가 과연 있을까?
'내가 희생해서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아네트 언니는 기쁜 얼굴로 나를 맞이해줄까?'
아니, 아무리 해도 그런 장면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눈을 감는다. 그날, 달빛이 환하게 비치던 날, 신시아가 자신에게 해준 그 말만이 떠오른다.
네 언니도 하늘에서 얘기할 거야. 내 동생이 이렇게 착한 아이라고.
'응, 맞아.'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언니를 만나러 갈 게 아니라면, 일어서자. 당당히 맞서자.
언젠가 언니를 다시 보게 될 그 순간,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도록.
"소피아, 엘렌. 리사를 잘 부탁할게."
"으응... 응? 어디 가, 언니?"
아네모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성법진의 벽을 뚫고 들어가, 죄가 도사리는 지상을 향한다.
소중한 아이들. 그녀들을 뒤돌아 보며, 아네모네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도시를 구하러."
흩날리는 옅은 금색의 머리. 그 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알베르, 그거 알아?"
폐허가 된 대강당. 그곳에 있는 건 에델 자신과 알베르의 시체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거, 이번이 처음이야."
이미 말이 없는 옛 친구에게 말을 건다.
이 남자의 목숨을 빼앗은 건 자신이다. 그러니 그의 영혼이 올바른 곳으로 향하게 인도하는 것 또한 자신의 역할이리라.
"로렌스, 그 둔탱이 자식. 몇 번이나 신호를 보냈는데도, 눈치 못 채는 거 있지?"
로렌스는 이미 거인을 저지하기 위해 먼저 떠났다.
자신은 좀 더 몸을 추스르겠다고 말하고, 에델은 로렌스를 떠나보냈다.
"로렌스를 좋아하는데,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은데. 대답을 듣는 게 너무 무서워. 이미 알고 있는 말이라도, 직접 듣는다면 난 절망하고 말 거야."
자신과 로렌스는 동기. 한때 임무를 함께 했던 동료. 그것만으로도 에델은 충분히 만족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두근거리는 심장은 멈추지 않는 걸까.
로렌스가 자신을 구하러 와줬을 때, 에델의 심장은 미칠 듯이 뛰었다.
비록 신시아에게 부탁받은 사항이라고 들었어도, 그건 에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로렌스가 나에게 와줬어.'
에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 사실 하나뿐이었다.
"알베르, 아까 로렌스가 말했었지?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아직 감기지 않은 알베르의 눈을 닫아주며, 에델이 다짐했다.
'나도 앞으로 나아갈게."
품에서 꺼낸 단검 한 자루, 그것을 알베르의 심장에 꽃아 넣는다.
심장을 신께 바침으로써, 이 자의 죄가 조금은 덜어지기를.
"안녕, 알베르. 널 막지 못해서 미안했어."
이제 로렌스를 도와주러 가야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덜커덩, 끼이이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에, 에델 언니?"
무너진 잔해 틈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아네모네.
그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신과 알베르의 시체를 번갈아 보았다.
"그 나쁜 사람...?"
"죽었어. 내가 죽였어."
"하지만 아는 분이었다고..."
"아네모네."
이름만을 부르고 더 말을 잇지 않는 에델.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충분할 만큼 많은 대답을 해주었다.
"...같이 기도해요."
알베르의 시체에 다가간다.
인간의 힘으로 마기를 받아들이면, 얼마 가지 않아 몸 이곳저곳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알베르도 마찬가지였다. 손마디는 검게 변색되었고, 감긴 두 눈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너무나도 비참한 결말. 비록 그가 어째서 악에 물들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부디 이 자의 영혼이 깨끗해질 수 있기를..."
"......"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아네모네. 그녀를 본 에델도 옆에 앉아 무릎을 꿇었다.
그렣게 1분 남짓을 있다가,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별 인사는 이걸로 끝이야."
"에델 언니, 신부 오빠는..."
"떠났어.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러."
잊혀진 죄인, 레고르.
그 거인을 막기 위해서 로렌스와 신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더는 슬퍼할 시간이 없다. 설령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나아가야만 한다.
"아네모네, 넌 아이들이랑 숨어 있어."
"아뇨, 아니에요."
아네모네가 고개를 젓는다.
이미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성녀에게는, 성녀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으니까."
* * *
"크롸아아아아아아!"
끔찍한 몰골을 한 거인, 한때 성자였던 죄인 레고르.
그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도시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크흑, 커헉!"
달릴 때마다 입 안에서 알싸한 피 맛이 감돈다. 알베르와의 싸움에서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쓰러져 눕고 싶지만, 그렇게 된다면 저 거인을 막을 가능성이 사라진다.
"꺄앗!"
익숙한 목소리. 검은 날개를 펼친 신시아가 공중에서 거인을 가로막고 있었다.
"신시아!"
"후우, 후우. 앗, 신부님!"
신시아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녀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는다.
검은 깃털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인지, 날개는 앙상한 뼈를 드러내기 일보 직전이다. 얼굴의 반쪽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단심문회는 어떻게 되었지?'
도시의 아래를 둘러본다.
새벽이 밝았지만, 여전히 매캐한 연기 탓에 시야가 흐리다.
검은가시병에 걸린 역병의 시체, 그로부터 일어난 괴물을 상대하고 있는 이단심문관들. 어째선지 부국장이 보이지 않는다.
'부국장이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해볼 만 했을 텐데...'
"rhehr 카다쉬 rndnjs"
신시아가 다시금 진언을 사용한다.
거대한 그림자의 갈퀴가 거인의 목을 뜯어내 지나간다. 저게 보통의 괴물이면 견뎌낼 수 없었겠지만...
"그르르르..."
살이 뜯어진 상처에 검은 가시 덩굴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괴한 모양으로 꿈틀거리더니, 벌어진 부위를 깔끔하게 봉합해내었다.
"미안해, 신부님! 이 괴물, 아무리 해도 계속 살아나서..."
"아닙니다, 신시아. 이 괴물의 특성일 거예요."
대성당의 지하 기록실에서 본 연구의 내용. 성자 레고르는 불사에 매달렸다고 한다.
베어도 베어도 쓰러지지 않는 초재생 능력. 마왕 추종자의 손길이 닿은 망집은 저렇게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 것인가.
"크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앗!"
"신시아!"
신시아가 거인이 휘두른 팔을 피하지 못했다.
다행히 검은 날개로 공격을 가로막았지만, 날 힘이 떨어져 그대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천천히 떨어지는 신시아에게 달려가 내 품에 안았다.
"신시아, 괜찮나요?"
"응... 신부님, 미안해. 나, 노력헀는데..."
"아니, 잘했어요, 신시아. 열심히 잘 해주었습니다."
피가 묻은 입술을 그녀에게 겹쳤다.
신시아는 해맑은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지쳐 잠들어 버렸다.
'상황이 좋지 않아.'
신시아는 거인을 막느라 지쳐 잠들었다.
부국장 드레이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발이 묶여 있나?
에델은 곧 오겠지만... 우리 둘로 저 거인을 막으라고?
"크롸아아아아아아!"
거인이 울부짖는다. 도시를 감싼 성벽으로 다가가, 이 끔찍한 재앙을 다른 장소로 퍼뜨리려 하고 있다.
교황청은 분명 저 거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몇 개나 되는 도시, 몇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후일 테고.
방법이... 없는 건가?
"아니."
알베르와 약속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물러서지 않는다. 내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저 괴물을 막아낸다.
세바스를 손에 쥔다. 부국장과 알베르와의 연이은 전투로 바닥난 신성력. 세바스는 아주 미약한 빛만을 뿜어낸다.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건... 앞으로 한 번.'
목숨을 걸고 힘을 짜낸다면, 한 번쯤은 저 거인을 쓰러뜨려 눕힐 수 있을 것이다. 저 초재생 능력만 없다면 어떻게든...!
"로렌스!"
저 멀리, 먼 곳을 바라본다.
에델. 찢어진 제복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녀가 달려온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것은... 아네모네?
"에델! 성녀를 왜 데려온 겁니까!"
"제가 따라오겠다고 한 거예요, 신부 오빠!"
에델과 아네모네가 내 앞에 다가왔다.
거인은 여전히 성벽을 향해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신시아 언니는 괜찮아요?"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입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다."
아네모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기, 저 커다란 게 잊혀진 죄인..."
"아네모네, 안타깝지만 이 도시는 포기해야 합니다. 아이들과 신시아를 데리고 숨어 있으세요."
"아뇨. 그럴 순 없어요."
아네모네가 웃옷을 내려 가슴 위쪽을 드러내 보였다.
초록색의 십자 문양. 내가 그녀에게 건 일종의 억제 장치. 그 문양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주박을 풀어주세요."
"하지만 아네모네, 당신의 힘이 폭주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그런 건 각오했으니까.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네모네의 표정은 결연하다.
하수도의 은신처에서 처음 봤을 때의 가짜 얼굴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자의 표정이다.
그게 그녀의 뜻이라면.
"...알겠습니다."
장갑을 벗어 손등을 꺼내보였다. 아네모네의 십자 문양과 같은 문양. 주먹을 쥐어, 마력의 연결을 해제한다.
"아네모네."
"네, 신부 오빠."
"대답은 찾았습니까."
아네모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 며칠 간의 고뇌, 추억, 후회, 깨달음.
그리고 각성.
그녀 특유의 눈웃음을 하며, 아네모네는 싱그러운 미소를 보였다.
"네. 신시아 언니가, 그리고 당신이 알려주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손등에 칼을 긋는다. 반으로 갈라진 문양이 빛을 내며 사라진다.
아네모네의 가슴에 있던 주박도 함께 사그라들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고마워요, 신부 오빠!"
아네모네가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신성력이 그녀의 주위로 모이기 시작한다. 피어나는 것은 성스러운 불. 죄로 더럽힌 피를 정화할 이글거리는 불꽃.
'그렇군. 그때 아네모네가 썼던 성법...!'
리사의 몸이 검은 덩굴로 뒤덮였을 때, 아네모네는 권능을 발현해 역병을 태웠다.
성자 레고르의 실험의 결과물, 초재성 능력, 아네모네의 작은 기적. 모든 이야기가 '피'라는 매개를 통해 하나로 이어진다.
"아름다워..."
아네모네의 곁을 떠도는 빛 알갱이들. 찬란히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아네모네를 비춘다.
바람에 아네모네의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선명한 붉은색. 검붉은 피의 색이 아닌, 화사한 꽃 같은 붉은빛이 그녀의 머리색을 물들인다.
그 모습에, 에델은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도...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뗼 수 없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할 수 있어요. 이제야 깨달았어요. 내가 왜 이 도시로 흘러 들어왔는지. 어째서 아네트 언니가 나를 구해주었는지."
피의 성녀. 만들어진 실험체. 죄를 지은 어린양. 그 어떤 수식언도 지금의 아네모네를 표현할 수 없다. 지금의 그녀의 모습을 표현할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거예요."
'불꽃의 성녀'.
그것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르르르? 크롸아아아아아아!"
이변을 눈치챈 거인이 아네모네를 바라보았다.
기분 나쁜 울음 소리와 함께, 역병으로 뒤덮인 레고르의 하수인들도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신부 오빠, 에델 언니. 부탁드려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을 벌어주세요...!"
물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아네모네는 기적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자신을 가둔 껍질에서 벗어나, 두 날개로 날아오르기 위해.
그걸 방해하는 자는 누구라도 용서치 않는다.
"에델, 시작합시다!"
"알겠어!"
총을 든다. 검을 든다. 발걸음을 내딛고,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한다.
"로렌스, 아네모네를 부탁해!"
에델이 하수인들의 틈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우리가 맡아야 할 적은, 저런 잔챙이가 아닌 본체.
"크롸아아아아!"
거인의 거대한 팔이 성녀를 덮친다.
떨어지는 건물의 잔해, 그 위를 짓누르는 압도적인 질량.
"꺄읏!"
"수호성인."
거대한 빛의 벽을 펼친다. 그녀의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기도를 계속할 수 있게.
기도가 다시금 시작된다. 성녀의 힘. 여신의 권능. 이 도시의 잘못된 역사, 그 시발점. 저 거인은 죄로 이루어져 있다.
저것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한 명 뿐이다.
"아네모네, 준비는 되었습니까?"
* * *
언니, 사랑하는 나의 언니.
언니는 역시 틀리지 않았어.
언니가 말했잖아, 나는, 모네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언니의 손조차도 잡아주지 못한 못난 동생인데.
하지만... 조금만 더 힘내보기로 했어.
있잖아. 나, 언니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어.
정말로 상냥한 수녀 언니와, 눈이 조금 무섭지만 친절한 신부 오빠.
그 두 사람이 내게 알려줬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니, 난 조금만 더 살아보려 해.
좀 더 이 세상을 보고, 경험하고, 행복을 느끼고.
그러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언니를 만나면 언니한테 물어볼 거야.
'언니, 나 잘했지?'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언니. 부탁할게.
나를 지켜봐 줘.
.....
물론이지. 언제나 응원할게. 내 사랑하는 동생, 모네.
* * *
"...언니?"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어린 소녀의 귓가로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 꿈에 그리던 목소리. 혹시 착각은 아니었을까.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아네트 언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생각이 아네모네에게 닿았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전부, 전부 타버려!"
하늘에는 거대한 횃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로 떠오른 거대한 신성 문자. 여신 에레쉬키갈의 상징체.
피를 관장하는 그 권능이, 잊혀진 도시 전역을 감쌌다.
"불에 타기 시작했어...?"
이단심문관 에델바이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덩굴로 뒤덮인 하수인들. 생명의 순리를 거부한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불길에 휩싸여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원인 잊혀진 죄인, 레고르는.
"이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불에 고통스러워 하며 무너져 가는 거인의 육체.
그것을 본 신부, 로렌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인의 몸이 무너지며, 가슴 쪽에 무언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로렌스, 저거야! 성인의 유해!"
검은 덩굴에 둘러싸인 인골(人?). 저것이 이 비극의 시작이며, 동시에 모든 것을 지탱하는 핵심임이 분명했다.
마지막 순간, 모든 힘을 짜내 아네모네가 목놓아 외쳤다.
"지금이야! 신부 오빠!"
"세바스!"
검은 옷의 신부는 검을 들었다.
자신의 남은 힘을 다해, 거인의 심장을 향해 뛰어올랐다.
푸슉.
환하게 빛나는 검날이 성자의 유해를 꿰뚫어 부수었다.
그리고.
"그르르르르..."
한때 성자였던, 지금은 죄의 상징이 된 레고르.
그가 먼지가 되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성녀는, 아네모네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어린 소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비추는 도시. 모든 죄를 떠나보내듯, 도시의 모든 곳에서 황금색의 빛알갱이가 흩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언니, 나, 해낸 거지...?"
성녀는 눈물을 흘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 머리가,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