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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38화 (38/109)

〈 38화 〉 외전 2. 용사, 디바인

* * *

바위로 가득한 대협곡. 북왕국과 마도 공화국의 국경에 위치한 이곳은, 마수의 출현이 잦은 위험지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무척이나 조용해질 것이다. 협곡의 주변을 가득 메운 마수의 시체.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남자가 서 있다.

순금보다도 찬란한 금발의 머리. 하늘을 담은 푸른 눈동자. 망토를 흩날리며 숨을 내쉬는 그의 손에는, 거대한 검 한 자루가 쥐여 있다.

성검, 스펜타.

천 년 전, 최초의 용사가 휘둘렀다는 위대한 성검.

"디바인!"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 그 부름에 금발의 남자, 디바인이 뒤를 돌아본다.

"무리는 하면 안 돼요."

"미안하다, 일렌. 걱정을 시켜버렸군."

디바인을 부른 여인은, 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고 있다. 손에, 허벅지에, 발목에, 팔에, 목에, 오른쪽 눈에, 그리고 가슴에.

흐릿한 회백색의 머리에, 순백색의 성녀복을 입은 여인.

그녀의 이름은 '일렌'. 현 시대의 두 번째 성녀이자, 용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붕대를 감은 성녀'의 정체다.

"왜 자꾸 먼저 뛰어나가는 건가요! 지금은 저랑 당신뿐만 아니라, 레이크랑 스피네도 같이 있는데 말이에요!"

"내가 먼저 길을 뚫으면, 너희들이 편해지지 않나."

"그러니까 당신은 그런 태도가...!"

"일렌."

검을 든 팔은 놓을 수 없다. 그러니 디바인은 반대쪽 팔로 일렌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미안하다. 하지만 난 너를 믿기 때문에 그런 거야."

"...전, 당신이 크게 다쳐도 안 울 거예요.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고 하면서 비웃어 줄 거라고요."

"저번에는 울었잖나.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펑펑 흘려대며."

"그, 그때는...!"

대륙에 나타난 첫 번째 마왕, '갈망의 바알'.

그와의 전투는 치열했다. 자신과 디바인, 레이크와 스피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첫 번째 재앙을 봉인시킬 수 있었다.

가장 앞에 서서 싸웠던 디바인은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갔다. 그때를 생각하면, 일렌은 지금도 잠을 자다가 깰 정도다.

"후우, 이번엔 또 어디를 다치신 건가요."

"별로 다치지 않았다. 그냥 어깨를 조금 스친 정도야."

"...이리 줘보세요."

일렌이 왼손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그러자 '여신 닌후르삭'을 상징하는 문양이 드러나 빛나기 시작한다.

성녀는 각 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일렌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일곱 신의 권능을 조금씩,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의 구현. 그것이 '일렌'이라는 성녀의 자질이다.

"닌후르삭의 손길."

눈을 감고, 용사의 어깨에 난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댄다. 자연의 색을 담은 심록의 빛. 성녀의 손길이 닿자, 자잘한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되기 시작한다.

"항상 고맙군."

"이러려고 따라온 거니까요."

"레이크와 스피네는?" "뒤를 정리하고 따라 온댔어요. 아, 마침 저기 오네요."

디바인이 뒤를 바라본다. 저 멀리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검은 머리의 건장한 남자. 짙은 보라색 머리의 씩씩한 여자.

광전사 레이크와 마녀 스피네. 현재 용사와 함께 행동하고 있는 두 사람이다.

"가서 두 사람한테 사과하세요."

"사과까지 필요한 일인가?"

"디바인 씨가 혼자서 뛰쳐나갔다는 건,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예요. 자, 어서."

용사 디바인의 모습을 발견한 두 사람이 급하게 뛰어왔다. 레이크 쪽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고, 스피네 쪽은 일렌처럼 심통이 나 있다.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간 디바인은 다짜고짜 고개부터 숙였다.

"미안하다." "흥, 뭐가 미안한지는 알고?"

팔짱을 낀 마녀, 스피네가 디바인을 노려보았다. 광전사 레이크는 옆에서 이마를 감싸고 한숨을 쉬고 있다.

"너희들의 속도를 맞춰주지 못했어. 좀 더 배려를 했어야 했는데."

"디, 디바인 씨!"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일렌이 급하게 스피네를 돌아보았다.

이미 한 손에는 화염창을, 다른 한 손에는 얼음창을 구현해 디바인에게 던지려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멈추세요, 스피네 씨!"

"이거 놔! 이 빡대가리 용사는 한 번쯤 죽어봐야 정신을 차릴 테니까!"

영문 모르는 표정을 짓는 디바인과, 그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스피네. 일렌은 애써 스피네의 팔을 막고 있고, 레이크는 그 모든 모습을 보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즐길 만큼 즐긴 레이크가 스피네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거기까지 하자고, 스피네. 디바인은... 원래 이런 녀석이다." "...이 손 놓아줄래?"

레이크의 손길이 닿자 스피네의 반응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당찬 성격에 저돌적인 면모까지 있는 스피네지만, 어째선지 레이크만 있으면 그 기세가 줄어든다.

"우리야 좋지 않나. 디바인은 우리를 생각해 준 거겠지. 최근 일주일 간 잠도 편히 자지 못했잖아."

"그건... 맞지만..."

이때다 싶어, 일렌이 레이크의 말을 거들었다.

"레이크 씨의 말이 맞아요! 자자, 디바인 씨도 이제 그만 일어나고요."

"다음에는 속도를 좀 더 줄여보지."

"디바인 씨!"

후, 정말. 처음 만났을 때는 좀 더 멋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일렌이 한숨을 쉬며 생각한다. 용사와 처음 만난 그 순간. 자신의 굴레를 벗겨 준 그 사람의 표정은... 절대로 지금의 얼빠진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면에 반한 거니까.'

손에 다시 붕대를 감으며, 일렌은 자신의 마음을 삼켰다.

자신은 용사와 이어질 수 없다. 이어지면 안 된다. 분명 언젠가, 그에게 어울리는 멋진 여성이 나타날 것이다.

가령, 같은 파티에 있는 스피네라던가...

"뭘 그렇게 헤실거리는 거야!"

"아니, 미안하다. 디바인한테 화를 내는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서."

...저쪽은 걱정 없나.

레이크와 스피네는 북왕국에서 처음 만났다. 마치 운명처럼 길에서 만나, 운명처럼 함께 싸우고. 이윽고는 '갈망의 바알'을 봉인하는데 그들과 힘을 합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최후의, 그리고 첫 번째 싸움이 끝나고 나서, 쓰러져 있는 디바인을 향해 레이크가 말을 걸었다.

­디바인. 너를 따라가도 되겠나?

­레, 레이크? 너 지금 무슨 말이야!

­진정해라, 스피네. 애초에 우린 그럴 '운명'이니까.

스피네는 그렇다 쳐도, 레이크에게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앞으로의 흐름을 읽고 있다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은 스피네의 스승님을 치료할 약의 정보를 얻기 위해 모험 길에 올랐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서 일렌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챘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보는 제가 다 부러울 정도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정작 마왕을 상대할 때는 누구보다 서로를 챙겼다. 일렌 자신도 디바인과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디바인은 용사다. 일렌은 성녀다. 두 사람은 서로보다, 힘없는 다른 자들을 더 우선시해야만 한다.

그건 알고 있지만, 디바인을 볼 때마다 너무나 가슴이 쓰려서­.

"괜찮나, 일렌?"

"히잇!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면 어떡해요!"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업고 갈 테니."

스르릉. 성검을 허리춤에 집어넣은 디바인이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 그 말은, 제 몸을 느끼고 싶다는 뜻이라던가..."

"몸을? 일렌, 너를 말인가?"

"...아니, 역시 아니에요."

일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실험'의 영향일까. 키는 그럭저럭이지만, 가슴은 전혀 자라지 못했다. 스피네도 큰 편은 아니지만, 자신은 납작 그 자체이다.

'차라리 몸으로 유혹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일렌은 깨달았다. 용사는 바보다. 그것도 순수 덩어리인 바보.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는 둔감탱이에, 반반한 얼굴로 여자를 홀리는 천연 난봉꾼.

자신이 밤마다 용사의 침소에 들르는 것도, 치료의 일환인 줄 안다.

"디바인 씨는 바보예요."

"왜 그렇게 말하는지 잘 모르겠군."

고개를 살짝 내리고, 얼굴을 붉힌 채 디바인을 노려 보는 일렌. 그녀가 어째서 화를 내는지 알 길이 없는 디바인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느긋한 대화가 계속 이어질 무렵.

"...오는군."

땅 밑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 말을 뚝 그친 레이크가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챘다.

"어떻게 할 거지?"

"도망이라도 칠까?"

레이크와 스피네가 용사의 얼굴을 바라본다.

땅의 떨림은 거대한 지진으로 바뀌고, 거대한 무언가의 출현을 경고하며 그 기세를 늘려간다.

그리고 용사의 대답은­.

"아니."

우우웅.

성검 스펜타. 신이 내린 기적의 증명. 오직 용사만이 뽑을 수 있는 검이, 다시금 빛을 발한다.

"이번엔 미리 말하지."

거대한 굉음과 함께, 집채 만한 몸집의 마수가 땅 속에서 튀어나왔다.

바위 괴수, 타라스크. 광장 하나를 가득 메울 정도의 크기. 몸을 뒤덮은 바위 껍데기는 평범한 장병기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할 강도를 자랑한다.

만약 마을 근처에서 이것이 출몰했다면 피난령이 내려졌을 정도의 고위험 마수. 그것을 앞에 두고, 용사는 담담히 말을 계속했다.

"나에게 맡겨도 괜찮나?"

순은의 검날. 황금의 콧잔등. 쪽빛의 손잡이.

검이라는 형태로 빚어진 기적의 산물이, 눈 앞의 적을 베어낼 준비를 마쳤다.

"후우, 알겠어."

"부탁한다."

스피네는 한숨을 내쉬었고, 레이크는 엄지를 들어 올렸다.

디바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일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의 색이 담긴 눈빛. 저 눈빛을 바라볼 때마다, 일렌은 항상 깨닫는다. 자신은 용사를 말릴 수 없다고.

"어쩔 수 없네요. 부탁드릴게요, 디바인 씨."

"크롸아아아아아­!"

거대한 울음소리에 일렌의 말 끝이 흐려졌다. 바위 괴수 타라스크가 거대한 앞발로 용사 일행을 덮쳐온다.

"고맙군, 다들."

디바인의 대답. 그리고 그와 동시에.

"크르르­­­­­­­."

허공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타라스크의 몸이 사선으로 나뉘었다. 타라스크의 괴성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무심한듯 일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검을 휘두른 디바인. 그러나 그의 참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검의 궤적을 따라, 공간 그 자체가 베어진다.

성검만의 힘도, 용사 디바인만의 힘도 아니다. 올바른 용사가 그에 걸맞은 검을 쥐었을 때, 상식을 뛰어넘는 힘이 현실로 드러난다.

"언제 봐도... 어마무시하네요."

쿠구궁. 괴수였던 것의 잔해가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스피네가 마력 방벽으로 자신과 레이크를 감쌌다.

"이 정도는 해내야 해. 그래야 '용사'니까."

일렌이 다치지 않도록, 그녀의 머리를 감싸 자신의 품에 넣는 디바인. 왼손으로는 일렌을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성검을 높이 들어 떨어지는 잔해를 흘려보낸다.

"디, 디바인 씨! 저도 제 몸 하나 정도는..."

"가만히 있어라. 너무 힘을 자주 쓰지는 마."

귀에 밀착한 디바인의 가슴에, 그의 심장 고동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디바인의 체취, 디바인의 감촉, 디바인의 마음. 이 자세로는, 어느 것 하나 느끼지 않을 수 없어서.

'심장이, 주체가 안 돼...'

일렌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개진다. 이렇게 된 거,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더욱 디바인의 품을 파고든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분명 걱정할 거니까.

자욱한 먼지가 잦아들고, 용사 일행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협곡 너머로 보이는 공중을 떠다니는 마력석들.

마도 공화국의 특산물인 부유석. 그들이 북왕국의 국경을 넘어 마도 공화국에 도착했다는 증거다.

"저곳이 마도 공화국..."

"스피네, 너에겐 특히 의미가 깊은 장소겠군."

"내가 마녀이기도 하고, 스승님도 마도 공화국 출신이니까."

용사 일행이 마도 공화국으로 향하게 된 목적은 여러 가지다.

가장 큰 이유는 외교적으로 협력 체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크고 작은 분쟁을 지속하던 일곱 나라는, '마왕'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 하나로 단결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교두보가 바로 '용사'다.

"레이크, 정보는 확실한 것일 테지?"

"당연하지. 적어도 앞으로 있을 정보에 관한 거라면, 날 믿도록 해."

두 번째 이유는 어떤 사건의 조사를 위해서다.

크고 작은 마탑이 분포하는 마도 공화국. 그중 청색 마탑의 마탑주인 '베론'의 연구가 마왕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파헤치는 것이 용사 일행의 목적이다.

"아, 그리고 마침, 마도 공화국에서 중요한 행사를 연다고 하네요."

"어떤 행사지, 일렌?"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마도 공화국에서 열릴 어떤 '행사'를 감시하기 위해서.

"마왕 후보자들의 집결. 성국과 제국, 그리고 공국의 마왕 후보자가 마도 공화국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해요."

마왕 후보자. 일전에 쓰러뜨린 '갈망의 바알'처럼, 마왕으로 변모할지도 모르는 대륙 최대의 위험 요소.

그들의 처우와 향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마도 공화국의 '대현자'가 그들을 불러 모았다.

"흐흥, 대충 알겠네. 쓸 만하면 우리 편으로 삼고, 아니다 싶으면 배제하겠다는 뜻이잖아?"

스피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마왕 후보자의 집결에는 명백한 의도가 엿보인다.

"음, 직감이 왔다. 분명 일이 벌어질 거야. 아주 큰 뭔가가."

"또 그놈의 직감. 뭐, 틀린 적 없으니까 믿어는 보겠지만."

레이크의 말을 스피네가 받아쳤다.

이미 용사 일행 네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마도 공화국에서, 틀림없이 어떤 사태가 벌어지리라는 것을.

마왕이 부활할지도 모른다. 대재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아간다. '용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상, 디바인은 멈춰 설 생각이 없다.

"계속 출발하지. 해가 지기 전까진... 민가를 찾고 싶군."

"노숙은 이제 질렸어."

"스피네, 너는 잘만 자던데."

"좋아, 지금 말 다했지?"

용사 디바인, 마녀 스피네, 광전사 레이크.

그들을 본 일렌이 미소 짓는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런 인연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자, 출발하지. 일렌, 걸을 수 있겠나?"

디바인이 손을 내민다. 일렌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이끌어 준다면, 나는 어디든 따라갈 수 있노라고.

"네! 가죠, 디바인 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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