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후보자, 집결(1)
* * *
"아, 신부 오빠!"
포탈의 건너편, 청색 마탑의 중심에 있는 대회랑(回?).
돌로 만든 거대한 문, 그 앞에 선 아네모네와 크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네모네, 당신도 저들의 안내를 받았나요?"
"네, 맞아요! 크리스 언니랑 같이 도망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푸른색의 로브를 입은 청색 마탑의 마법사들을 가리킨다.
'소환'을 주특기로 하는 마탑인 만큼, 공간 마법에 한해서는 그들을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다.
"그것 참, 끝내주는 접객 태도네요." "부정.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저희의 태도는 매우 불손합니다."
허탈함을 담은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부마탑주 티니아가 따박따박 반박하기 시작했다.
"후우,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는 어디로 가면 되죠?"
"안내하겠습니다."
탁. 티니아의 지팡이가 다시금 바닥을 두드린다.
그와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한 발 밑. 거대한 진동과 함께, 굳건히 닫힌 돌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목적지 제시. 이 안쪽입니다. 복도의 끝, 다른 분들이 계신 회의실."
"비밀 회의에 어울리는 비밀의 방이라..."
문 안쪽으로 길게 이어진 어두운 통로. 안쪽을 흘깃 본 아네모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 어? 아까 슬쩍 열어봤을 땐, 아무것도 없는 빈 방이었는데...?"
"성녀님, 제가 열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히잇! 죄, 죄송해요..."
크리스의 야단에, 아네모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아직 마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아네모네라면 충분히 놀랄 법하다.
"공간 마법의 일종입니다. 문과 통로를 이어버린 거죠. 평범한 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정밀한 포탈을 타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으으, 어려워..." "신시아는 몰라도 돼요."
아네모네가 문 안쪽으로 들어서려는 그때, 티니아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경고. 이곳부터는, 마왕 후보자 본인을 포함한 두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우으..."
서운한 표정으로 부마탑주를 노려보지만, 기계 같은 그녀의 표정은 조금의 미동도 없다.
"어쩔 수 없습니다, 성녀님. 마탑에서는 마탑의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후우, 알겠어요."
이쪽을 노려보는 성녀의 부러운 눈길이 느껴진다.
"서로 좋아 죽는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도 없고... 여기선 성녀인 제가 양보해야죠." "그것 참 감사하네요." "으으, 놀리지 마세요!"
"아네모네. 크리스의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네모네와, 그녀를 부축하는 크리스를 뒤로 하고 나와 신시아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통로에 발을 내딛자, 벽면에서 푸른빛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벽의 램프에서 불길이 다시 타오른다. 그 빛에 의지하여 회의실을 향해 나아간다.
"아얏, 머리야..."
"아무래도 도착한 것 같군요."
길을 가로막는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힌 신시아. 통로의 끝은 막다른 길이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이것 또한 하나의 '문'이겠지.
티니아가 벽을 툭 두드리자, 벽돌이 사방으로 무너지며 그 안에 숨겨진 문이 나타났다.
"이 앞이 회의장..."
꽉 잡은 신시아의 손이 세차게 떨리기 시작한다. 손에 밴 땀 때문일까, 살짝 달라붙은 신시아의 손바닥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긴장하고 있나요, 신시아?"
"...응. 이 문 너머에, 나 말고 다른 마왕 후보자가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그들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신시아와 마찬가지로."
"역시 그렇지, 신부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신시아가 내 손을 다시금 꽉 부여잡는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난 절대로 손을 놓지 않을 텐데.
그녀의 마음에 보답하듯, 손가락을 살짝 들어 깍지를 낀다.
"준비는 됐나요?"
"응, 문제없어."
한 손으론 문고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로의 체온을 느낀 채.
그렇게 우린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밝은 빛이 우리를 비추고, 우리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 * *
마도 공화국의 수도. 그중에서도 가장 외진 어느 언덕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와, 외로이 드높게 서 있는 칠흑색의 탑을 제외한다면.
흑색 마탑.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배척받는 '사령술'과 '인형술'을 주특기로 하는 마탑. 비록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세력이 작은 마탑이었으나, '어떤 자'들과의 접촉으로 흑색 마탑은 세를 단숨에 불렸다.
그리고 그 '어떤 자'들 중 한 명인 남자가, 흑색 마탑의 한 연구실에서 자신만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마왕의 각성 조건... 마기의 폭주... 아직 완벽하지 않아."
흑색 마탑과 계약한 흑마법사, 오웨인. 성국에 다녀온 후, 그는 연구실에 틀어 박혀 그의 계획의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완전히 몰두한 그의 집중력을 깨뜨린 것은, 누군가의 노크 소리였다.
"...후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오웨인이 잠긴 문을 열어젖혔다.
"누구십니까?" "흐흐, 저예요."
오웨인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오웨인의 시간을 뺏을 가치가 있는 인물이기에.
"아, 부마탑주님."
"그냥 편하게 마리엣타로 부르세요!"
흑색 마탑의 부마탑주, 마리엣타.
6서클의 마법사인 동시에 공화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형사라 불리는 그녀는, 그동안 공석이었던 흑색 마탑의 부마탑주의 자리를 당당히 꿰찰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웨인 씨가 부탁했잖아요! 공화국에 어떤 손님이 오면 알려달라고."
흑마법사 오웨인의 관심사.
지금의 그에게, '용사 일행'은 이미 관심 밖이다. 자신이 그들의 행보에 영향을 주기 어려울 뿐더러, 어떤 상황이라도 그들은 마왕을 무찌르고 자신들만의 길을 나아갈 것이다.
오히려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가 성국에서 만난 약간의 인연.
마왕 후보자, 신시아. 그리고 그녀를 지키는 신부, 로렌스.
그 둘이라면, 자신의 작은 계획에 마침표를 찍어줄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때가 됐군요."
오웨인은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줄근한 셔츠를 벗고, 헝클어진 머리를 고치고, 흑색 마탑의 소속임을 상징하는 검은색 로브를 두르며.
"마왕님은, 그 두 사람은 지금 어디 있죠?"
"청색 마탑. 그곳의 부마탑주가 두 사람을 데려갔답니다."
"벌써요? 후, 이럴 때가 아니군요. 중요한 손님을 모시러 가는데, 이런 평범한 차림으로 갈 수는 없죠."
즐거운 모임에 참석하듯, 오웨인은 넥타이를 고치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 날이 왔군.'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러나 마왕을 추종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러나 딱히 금기를 탐하는데 관심을 두진 않는다.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러나 흑색 마탑에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다른 사람들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탑주 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네, 네~. 맡겨만 주세요."
오웨인의 주위에 검은 번개가 일더니,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오웨인의 실험실.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마리에타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짓을 하네, 안경잡이."
* * *
"아, 드디어 왔다!"
"세 번째 마왕 후보자네요."
"카일, 또 사람들이 왔어." "성국에서 온 자들일 겁니다."
환한 빛으로 가득한 하얀색의 방. 가운데에는 정삼각형 모양의 긴 탁자가 놓여 있고, 양 꼭짓점 끝에는 각각 두 사람 씩 자리를 잡고 있다.
"흐흥, 귀여운 여자애네."
"...설마 당신을 여기서 볼 줄이야." "응? 응? 날 아는 거야?"
테이블의 오른편에는 '제국'에서 온 자들이 서있었다.
남자 쪽은 몰라도, 기사 갑옷을 입은 적갈색 머리의 여자는 잘 알고 있다.
제국의 제3 기사단 단장, 올리비에. 창술의 달인이자, 제국의 우상인 '기사단장'중 한 명이다.
"설마 제국의 기사단장께서 친히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사단장.
황제를 따르는 무수히 많은 기사들. 그들을 통솔하는 제국 공인 최강의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다.
겉으로는 가벼워 보이는 여자처럼 보여도, 단신으로 도시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와야지. 이 회의에 참석하는 녀석이 내 종자라서 말이야!"
기사단장 올리비에가 옆에 서 있던 앳된 소년의 등을 힘차게 두드렸다.
"커흑, 갑자기 왜 그러세요, 단장님!"
제국 최강의 무력이 날린 손바닥은, 가벼운 장난 수준아 아닐 것이다.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은 무시하고, 올리비에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음, 음. 그럼 사람도 모였겠다, 형식적인 인사라도 해볼까? 먼저 우리부터! 내 이름은 올리비에, 다들 알다시피 제국의 기사단장이자... 오 꼬맹이의 보호자 역이지."
"제 이름은 '렉스'입니다. 제국의 마왕 후보자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경박한 모습으로 자기 소개를 하는 올리비에와 달리, 종자 쪽은 예의 바른 모습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마왕 후보자는... 표정이 여유로워 보인다.
7개국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 제국인 만큼, 마왕 후보자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겠지.
"자, 다음은 그쪽이야, 신부님."
올리비에가 손으로 이쪽을 가리켰다. 먼저 온 공국의 후보자가 아닌, 우리 쪽을 먼저 가리킨다는 건... 세 나라 사이의 국력 차이를 은연중에 내비치는 것이리라.
"성국 출신, 생크 마을의 신부를 맡고 있는 로렌스라고 합니다. 본래는 성녀님께서 친히 이 자리에 오셨어야 했으나, 여러 사정이 겹쳐 제가 대신 오게 되었죠."
"저, 저, 저는... 그게, 그러니까...!"
이런 공식적인 자리는 처음인지, 딱딱하게 얼어붙은 신시아가 입만 뻐끔거린다.
"신시아, 긴장하지 마세요."
"신부님, 나... 못하겠어...!"
울먹이는 표정으로 신시아가 내게 속삭인다. 억지로 시킨다고 해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고...
이럴 때 해야 할 일은, 작은 '동기'를 던져주는 것이다.ㄴ
"신시아. 만약 잘 해내 준다면, 오늘 밤은 이마가 아니라 입술에 해드리죠." "...해볼게!"
눈빛이 달라진 신시아. 그녀가 자신감 있게 일어나, 수녀복의 치마를 살짝 들고 숙녀다운 인사를 시작했다.
"제 이름은 신시아 생크 프랑. 성국의 마왕 후보자이자, 생크 수도원의 견습 수녀. 그리고 여기 계신 로렌스 신부님의 후견인이자..."
흘금흘금. 신시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신시아, 설마...'
"...로렌스 신부님의 약혼녀입니다."
푸흡, 소리와 함께 기사단장 올리비에가 마시던 물을 뿜었다.
종자 렉스는 입으로 '오'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공국 쪽 사람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별 반응은 없다.
"후우, 신시아. 쓸 데 없는 얘기는 왜 덧붙이는 겁니까."
"신부님이 시키는 대로 했어! 잘했지?"
"...오늘 밤은 신시아 혼자 자도록 하세요."
"어, 어째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중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너졌다.
엄연히 한 나라의 대표로 참석한 회의에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신시아에겐 나중에 따로 벌을 줘야겠군.
"크흠, 자, 다음은 그쪽 차례입니다."
마지막 순서는 공국의 후보자. 병약해 보이는 분홍 머리의 소녀와, 그 곁을 지키는 갈색 머리의 기사의 조합이다.
반쯤 눈을 감은 소녀를 대신하여,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먼저 입을 떼었다.
"아가씨의 성함은 아나스타샤 폰 다노아. 공국의 마왕 후보자이자, '귀공녀'이십니다."
"다노아? 아가씨, 7대 귀족의 영애였어?"
소녀의 성이 드러나자, 올리비에는 놀라움음 금치 못하고 입을 열었다.
"......"
"그리고 저는 아가씨를 따르는 기사, 단지 그뿐입니다."
'아나스타샤'라고 소개받은 분홍 머리의 소녀는, 무릎에 얼굴을 푹 묻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설마 공국의 '귀공녀'가 마왕 후보자일 줄은...
"신부님, 신부님. 기사단장은 알겠는데, '귀공녀'는 무슨 뜻이야?"
"음, 확실히 조금 모호한 개념이겠네요. 신시아, '우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죠?"
"응! 아네모네 같은 성녀님이나, 저 아주머니 같은 기사단장처럼 강한 사람."
신시아의 말을 얼핏 들은 올리비에가 '아주머니?'라고 되묻는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맞아요. '귀공녀', 혹은 '귀공자'는 공국의 우상이죠. 공국을 다스리는 게 누군지는 배웠죠?"
"그게, 귀족들이 으쌰으쌰하는... 거였나?"
"맞아요. 귀족들의 연합체. 특이하게도 공국은 능력이 아닌, '혈통'으로 우상을 뽑죠. 어차피 귀족들의 자녀가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게 그거지만."
"응? 어째서 그런 거야?"
"그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죠."
공국은 내부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나라다.
어째서 각 가문의 당주가 아닌 자녀들이 우상인가, 어째서 그들은 다른 자들과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니고 있는가.
그에 대해 설명하려면, 날을 잡고 강의를 해야 할 지경이니.
"자... 이걸로 인사는 대충 끝났나?"
"부정. 아직 한 분이 더 오셔야 합니다."
기지개를 쭉 켜는 올리비에의 말을, 부마탑주 티니아가 가로막았다.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이 맞다. 아직 이 자리에는, 회의를 주최한 '그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읏, 신부님, 머리가...!"
"고밀도의 마력이라... 드디어 오는군요."
신시아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마력의 이변을 눈치챘다.
청색 마탑의 주특기는 '소환'. 다시 말하자면, '공간'을 다루는데 특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마탑의 꼭대기에 있는 대마법사라면, 당연히 이 정도의 퍼포먼스는 보여줄 수 있어야지.
"다들 모였군."
테이블 한가운데에사 폭발한 마력.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푸른 로브를 걸친 주름진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티니아가 그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일반인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대한 마력. 연륜이 느껴지는 정순한 마나의 운용. 그리고,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저 눈동자.
"제국의 기사단장, 올리비에가 청색 마탑주를 맞이한다."
"공국의... 귀공녀, 아나스타샤가... 청색 마탑주님을... 맞이합니다."
마도 공화국의 우상, '현자'에 가장 가까운 자.
유서 높은 청색 마탑의 지배자.
"성국의 신부, 로렌스가 청색 마탑주님을 뵙습니다."
청색 마탑주, '부르는 자, 베론'.
그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