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후보자, 집결(2)
* * *
"공화국의 대마법사, 그리고 청색 마탑의 주인 되는 자로서 자네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이네."
저 남자가 청색 마탑주, 베론... 괴팍한 노인네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어 보여 조금 놀랐다.
"설마 내 마탑에 다른 나라의 우상이 셋이나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제국의 기사단장하고 성국의 성녀, 그리고 또..."
"공국의 귀공녀이십니다."
"그래, 마왕 후보자 말이지."
마탑주 베론은 의도적으로 공국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법하다. 전통적인 마법을 중시하는 마도 공화국은, 기술을 중시하는 공국과 사이가 안 좋으니까.
생각해보면, 공국이 공화국에 마왕 후보자를 보낸 것도 기적일 정도다.
"그래, 자네들이... 마왕의 가능성을 품은 자들이로군."
베론이 마왕 후보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제국의 종자, 렉스. 공국의 귀공녀, 아나스타샤. 그리고 성국의 수녀, 신시아까지.
대략적으로 모습을 살핀 베론은, 헛기침을 크게 한 번 했다.
"자네들, 마법사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뭔지 아나?"
"......"
"바로 '마기'일세. 자연의 구성 물질인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에게 있어,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물질인 마기는 독과도 다름없지."
베론이 얼굴을 찡그린다. 물론 그만이 지금의 긴장 상태를 불쾌해하는 것은 아니다.
기사단장 올리비에와 공국의 기사는 이미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마왕 후보자인 렉스와 아나스타샤의 표정 또한 매섭다.
그리고 나도. 저 늙은이가 조금이라도 신시아를 모욕한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나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자네들이 모일 장소로 청색 마탑을 내어준 이유는."
베론이 손가락을 뻗었다. 테이블의 위로, 대륙의 지도와 몇 장의 사진이 공중에 떠올랐다.
"이 대륙을 위해서라네. '마왕'이라는 전대미문의 위협 앞에서, 용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손을 놓을 순 없는 일이지."
대륙의 지도에는 조그만 빨간 원이 여러 개 그려져 있다.
그중에는 익숙한 장소도 보인다. 성국의 성도, 닌우르타. 그리고 잊혀진 도시, 레고르.
저 빨간 원들은 마왕의 전조가 나타났거나, 혹은 마왕 추종자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자네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어. 모두 '마왕 추종자'라고 불리는 자들과 만난 적이 있지."
성도에서는 마왕 추종자 레서를 만났다. 그는 달의 기사 크루거의 구속을 풀어, 성도를 전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레고르에서는... 알베르가 그들과 접촉했었다. 만약 마왕 추종자가 없었다면, 알베르는 살 수 있었을까. 부국장 드레이크에게 듣기론, 마왕 추종자로 보이는 자에게 발이 묶여 있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신부님, 손이 떨리고 있어..."
"아뇨,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시아."
앞으로 나아갈게.
알베르와 했던 그날의 약속이 떠오른다.
그래, 멈춰 있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군."
베론의 말에 다른 자들을 바라보니, 다들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를 잃는 고통을 겪은 건... 마냥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각자에게는 각자만의 이야기가 있는 법이기에.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앞서 말했다시피, 대륙은 마왕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베론이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러자 허공에 일곱 개의 구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일곱 색의 구체들. 베론이 손가락을 튕기자, 일곱 구체가 한 데 모여 조화로운 하나의 커다란 구체가 되었다.
"할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지. 협력. 국가라는 개념을 뛰어넘어, 서로 힘을 합쳐야 할 때다."
"그것 참 대단한 말씀이군요, 청색 마탑주."
베론의 말을 끊은 건, 제국의 기사단장 올리비에였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말솜씨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겨우 그런 낯간지러운 말이나 들으라고 황제 폐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낸 줄 아나?"
"무례한 태도로군, 올리비에."
"아니, 무례한 건 그쪽이죠.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공화국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우리를 감시하는 수많은 사역마들. 그리고 감시 마법들..."
올리비에가 검을 뽑아 들었다. 순은의 검날. 보석이 박힌 검집에는, 제곡 국기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폐하의 명만 아니었다면, 청색 마탑은 피로 물들었을 거야."
"그전에 자네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고."
치열한 신경전이다. 두 사람의 개인적인 싸움이 아닌, 제국과 공화국이라는 두 나라의 다툼이니 이해는 간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올리비에."
"솔직하게 가자고. 당신이 우리를 마탑에 초대한 이유, 그리고 다른 국가의 마왕 후보자들이 형식뿐인 회의에 참석한 이유."
물론 그 이유는 알고 있다. 각 국가의 최대 위험이자, 동시에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는 '마왕 후보자'라는 패를 공개한 이유. 그것은.
"서로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그걸 캐내기 위해서잖아?"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나?"
"미안하게 됐네요. 일은 빠르고 확실하게. 우리 제국민의 성격이라서 말이야."
손에 쥔 패는 숨기고, 상대의 패는 엿본다.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교황님이나 성녀님을 위해서, 라는 이유로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얻어가고자 하는 정보는 오직 하나.
"신부님?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신시아. 그녀에게 심어져 있는 마왕의 씨앗을 뿌리 뽑는 것. 단지 그것 뿐이다.
"아뇨. 신시아의 얼굴을 보는 게 즐거워서요."
"시, 신부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이 다 보는 데서 키, 키스는 곤란해..."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회의장은 여전히 어수선하다.
청색 마탑주 베론과 기사단장 올리비에는 여전히 신경전 중이고, 공국의 사람들은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 흐름을 바꾸려면... 내가 나설 수밖에.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희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뚝. 모든 잡음이 사라지고, 다른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마왕 후보자란 무엇인지, 어떤 이유에서 다들 '마왕 후보자'라는 자격을 갖게 되었는지."
모두의 주목 아래, 조금 긴 옛날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시아와 처음 만난 연구 시설에 관한 일.
지난 1년 간, 신시아가 어떤 상황에서 마왕의 힘을 썼는지에 대한 설명.
성도에서 신시아가 처음으로 진언(?)을 사용한 일.
레고르에서 신시아가 마안을 개방해 성녀를 제압한 일까지.
"성국은 꽤나 욕심이 없네. 좀 더 꽁꽁 숨길 줄 알았는데."
"숨겨봤자 의미가 없으니까요. 전 성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시아를 위해 이 자리에 서게 된 거라서요."
"푸핫, 대단한 신앙심이네."
호탕한 웃음을 지은 올리비에가, 자신의 종자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럼 우리도 얘기해야지. 렉스, 그러니까 내 종자랑은 말이지, 제국 변두리의 황야에서 처음 만났어."
"잠, 단장님, 그 얘기는...!"
"괜찮아, 렉스. 이 정도는."
종자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장 올리비에는 담담히 할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녀석이 어디 출신인지 몰라. 국경선 근처에서 만났으니 성국 출신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남왕국 출신일 수도 있지. 확실한 건...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는 상태는 아니었지."
"단장, 저한테는 잊어버렸다고 했잖아요!"
"쿡쿡쿡, 그걸 어떻게 잊겠니?"
종자 렉스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올리비에에게 역효과로 작용했다. 저 표정은... 난처한 얼굴의 신시아를 바라보는 아네모네의 표정과 똑 닮았다.
"글쎄, 거적때기 하나만 있고 그르렁거리는 남자애가 한 명 있는 거야. 처음에는 마수라도 나타났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렉스였지."
"단장! 거기까지만 하세요!" "갑자기 나한테 달려들어선, 발정 난 개마냥 옷을 물어뜯는 거야. 하지만 그때의 난, 지금보단 못해도 제법 강했거든. 그대로 이 녀석을 제압하고, 제도(??)로 끌고 갔지. 마왕 후보자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내가 맡게 됐네!"
올리비에가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마쳤다.
제국의 마왕 후보자는 연구 시설이 아닌, 사람이 살지 않는 황야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신시아와의 연관성은... 없어 보이는군.
"다음은... 내가 말할게."
올리비에 다음으로 입을 뗀 것은, 놀랍게도 공국 쪽이었다.
마왕 후보자이자 귀공녀인 아나스타샤, 여태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 줄이야.
"아가씨,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괜찮아. 숨길 만한 일도... 아니고."
여전히 눈은 반쯤 감겨 있지만, 그 시선이 누구를 향하는지는 또렷이 보인다.
신시아. 아마도 또래이자 같은 마왕 후보자 처지인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리라
"나는, 다노아 당주님의 딸이야. 내게 '이런 힘'이 깃들게 된 건... 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제가 아가씨를 모시게 된 그 순간부터, 아가씨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난 처음부터 마왕 후보자였어. 그 단어를 알게 된 건, 몇 년 전이지만."
이제야 그녀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
충분한 햇빛을 쐬지 못해 창백해진 피부. 옆에 있는 기사를 제외하곤,, 다른 주변 사람에게는 적개심을 갖는 모습.
처음부터 마왕 추종자에 해당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친구를 사귀기는 커녕 다른 7가문과의 교류에도 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마왕 후보자를 탄생시킨 것만으로 다노아 가의 영향력은 크게 커졌을 테니, 그녀를 함부로 사교계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 얘기는 여기까지. 아쉽게도 나는... 마왕의 모습으로 변하거나 하진, 못하지만..."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제법 괜찮은 느낌으로 바뀐 이야기의 흐름을 끊은 것은, 가만히 앉아 얘기를 듣고 있던 마탑주, 베론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시켜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네."
"흥, 마음대로 생각하던가. 이래서 마법사들은..."
"그래, 올리비에. 자네의 말이 맞아. 마법사들은 모두 의심암귀지. 마법의 기원은, 자연현상을 의심하면서 시작되었으니까."
푸른빛의 마력이 회의실을 가득 메운다. 하얀 벽 뿐이었던 방이 일그러지고, 형형색색의 풍경이 혼탁한 물에서 빚어지기 시작한다.
"시, 신부님...!"
"베론!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나의 외침에, 베론이 고개를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간단한 사실 확인이지. 성국의 신시아, 제국의 렉스, 그리고 공국의 아나스타샤... 지금 그 모습으론 '마왕 후보자'라고 하기엔 안 어울리지 않나?"
"이봐, 청색 마탑주. 이 일이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거야?"
"황제 폐하라... 이보게나, 올리비에. 설마 내가 아무런 얘기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하나?"
"당신, 지금 무슨 말을...!"
"잘나신 황제 폐하. 성국의 교황. 공국의 대공(大?). 그들 모두가 허락한 일일세."
교황님까지? 경악과 배신감, 불안감이 뒤섞인다.
대체 그들은 마왕 후보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신부님, 나,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제 손 꽉 잡으세요, 신시아!"
발이 바닥에서 떨어진다. 마력의 폭풍과 함께, 우리가 밟고 있는 바닥마저 다른 공간으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신시아는, 신시아의 상태는? 신시아의 손을 놓쳐선 안 된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어느덧 뿌옇게 변한 시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마탑주 베론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에 울렸다.
[지금부터 자네들에게, 약간의 결례를 범하려고 하네. 부디 이해해주게나.]
"신시아!"
* * *
"신부님..."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신시아가 눈을 떴다.
주위의 풍경은... 방금 전까지 있던 회의실은 아니다.
빛으로 이루어진 얇은 기둥. 아니, '철창'.
하얀 복장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 아니, '악마'들.
"...아니야."
신시아가, 아니 이름 없는 소녀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옷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천으로 이루어진 한 장의 실험복.
소녀는 깨닫는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아니야, 아니야...!"
자신이 태어난 곳. 최초의 기억이 시작되는 장소.
"아니야아아!!!"
그리고, '로렌스'가 없는 장소.
소녀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시설. 그 끔찍한 곳에 갇혀, 소녀는 울부짖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