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48화 (48/109)

〈 48화 〉 흑색 마탑의 초대(1)

* * *

포탈을 지나자 도착한 곳은, 종이와 잡동사니가 널부러진 연구실이었다. 그래도 그 빌어먹을 회의실보다는 수천 배는 낫다.

"다들 무사하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기사단장 올리비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신시아, 귀공녀 아나스타샤와 그녀를 업고 있는 기사, 기사단장 본인과 그의 종자, 그리고 오웨인까지. 다행히 빠져나오지 못한 자는 없는 모양이다.

"아, 신부 오빠!"

"로렌스!"

소란스러움을 눈치챈 익숙한 얼굴의 두 사람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성녀 아네모네, 성기사 크리스. 오웨인이 미리 대피시켰다던 두 사람이 보이자 비로소 안심이 된다.

"아네모네, 크리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건 이쪽이 할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신시아의 상태는 또 왜 이렇고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크리스에게, 청색 마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마탑주 베론의 독단적인 행동, 신시아의 마왕 각성, 그리고 오웨인의 도움으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신시아 언니...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아네모네, 크리스. 다른 사람들을 챙겨주세요."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아나스타샤는 아직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제국의 마왕 후보자는...

"그르르르, 크아아아! 상처를 내서, 짓이겨서...!"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신시아만큼은 아니지만, 제국의 마왕 후보자 렉스도 베론의 환술에 당해 어느 정도 마왕의 힘이 깨어나버렸다.

"후우, 또 이러네, 이 자식."

"올리비에 경. 자주 있는 일입니까?"

"음, 자주는 아니고. 그냥 지나치게 흥분하면 이렇게 돼."

"치료 방법은..."

"있지. 아주 간단한 방법."

후, 후하고 주먹에 입김을 분 올리비에가, 그대로 자신의 종자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정신 차려­!"

자신에게 달려드는 종자를 향해 자비 없이 꽂히는 주먹. 그대로 바닥 방향을 향해 꽂히는 주먹에, 렉스의 몸도 함께 바닥에 내리 꽂혔다.

"크헉!"

"어때,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어윽, 쿨럭. 단장님...?"

"휴우, 매번 고생이나 시킨단 말이야, 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갈비뼈가 몇 개나 부러졌을 법한 충격이었으나, 렉스는 멋쩍게 웃으며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아직 정신 수양이 덜 된 모양이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번엔 상대가 상대였으니까 봐줄게."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저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공국의 후보자는 어떤 상태입니까? 아, 그러니까 이름이..."

"카일. 카일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래요, 카일. 당신의 아가씨는 어떤가요?"

"곤히 잠들어 계십니다. 환술은 진작 풀렸겠지만... 한 번 잠드시면, 다시 일어나실 때까지 시간이 걸리거든요."

이쪽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신시아도 체력만 회복되면 문제없을 테니, 당장의 급한 불은 껐다고 봐도 좋을 듯싶다.

"후우, 아슬아슬했네요."

"그러고 보니 인사도 못했군요. 고맙습니다, 오웨인."

"아니요, 별말씀을. 오히려 제가 좀 더 일찍 맞이하러 갔으면 얼굴 붉힐 일도 없어졌을 텐데 말이죠."

"그 성격은 여전하네요."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오웨인에게 도움을 받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신시아를 품에 안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지만...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나고 싶어 하는 분...?"

"청색 마탑에만 마탑주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오웨인이 지저분해진 코트를 벗어던지고, 흑색 마탑의 인장이 그려져 있는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마치 파티에 참석하는 귀족처럼 한껏 행동을 부풀리며, 오웨인이 말을 잇는다.

"자, 다들 자리를 옮기시죠. 저의 고용주, 흑색 마탑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오웨인이 우리를 마탑주의 방으로 안내했다. 마왕 후보자들은 안정이 필요하기에 아네모네와 함께 의무실로 보냈고, 자리에 참석한 건 나와 크리스, 올리비에, 그리고 카일이라는 이름의 공국 기사뿐이다.

"마탑주 님, 저입니다. 오웨인."

오웨인이 문을 두드리자, 조심스레 열린 문틈으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 오웨인 씨!"

"부마탑, 아니, 마리엣타 님이시군요. 마탑주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흐음, 이분들이 중요한 손님들... 자, 어서어서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작은 집무실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흑색 마탑주, 길버트. 약간 말랐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중년의 얼굴. 그가 잔을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들을 기다렸습니다."

우아한 공국의 인사법으로, 마탑주 길버트는 우리를 맞았다.

"환영합니다. 흑색 마탑에 오신 것을."

부마탑주 마리엣타와 흑마법사 오웨인이 그의 양 옆에 섰다. 비록 마탑의 규모는 작아도, 격식으로 보면 흑색 마탑이 청색 마탑을 압도하는군.

"다들... 표정이 그리 좋지는 못하시네요."

"댁과 같은 마탑주에게 된통 당하고 오는 길이거든."

올리비에의 눈치 보지 않는 발언에, 부마탑주 마리엣타가 입을 열었다.

"잠깐, 기사단장. 지금 마탑주님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아니, 괜찮다, 마리엣타. 충분히 그럴 만도 해. 마법사의 업은... 같은 마법사가 져야 하는 법이지."

오웨인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비교적 불편한 자리임에도, 마탑주 길버트는 아무런 표정의 내색도 없이 담담히 홍차를 따라 우리에게 내밀었다.

"마탑주 베론. 그 자가 여러분에게 독단적으로 압력을 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압력이 아니라, 저희를 죽이려고 했지만 말입니다."

"후우, 설마 베론, 그 자가 뒤를 생각하지 않는 행동을 하다니."

흑색 마탑주 길버트. 그는 같은 마탑주인 베론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마법사란 족속은 모두 베론처럼 어딘가 엇나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를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방금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적색 마탑주를 위시한 적마법사들, 그리고 용사 파티가 청색 마탑을 급습했다고요."

용사 파티... 레이크와 스피네가 말한 적이 있다. 자신들도 청색 마탑으로 갈 거라고, 그곳에 있는 마탑주 베론을 조심하라고 말이다. 그게 설마 이런 뜻이었나.

"베론은 어떻게 됐죠? 부마탑주는?"

"현장에 가보니 베론은 이미 종적을 감췄고, 확보한 건 쓰러져 있던 부마탑주 티니아뿐이라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청색 마탑은 비상이 걸렸죠. 하루아침에 마탑주가 사라진 꼴이니까요."

"흥, 청색 마탑은 전부 한 편 아니었나?"

올리비에의 비아냥거림에, 부마탑주 마리엣타가 대신 대답했다.

"아, 그건 아니에요. 마탑의 일원이라고 해서 모두 마탑주를 따라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마탑주는 단지 마탑을 대표해서 관리하는 대마법사일 뿐이죠. 물론 저희 마탑 같은 경우엔, 다들 마탑주님을 믿고 따르지만 말이에요."

"마리엣타, 지금 상황에서 할 얘기는 아니지 않나."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난 후, 마탑주 길버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베론의 소유로 추정되는 소환수가 대거 사라졌다는 사실. 베론의 측근에 해당하는 마법사들이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 그리고, 베론의 연구실에서 '마기'로 보이는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까지.

"또 마왕 추종자군요."

"또 마왕 추종자네."

"또 마왕 추종자인가."

나와 올리비에, 카일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록 국가는 달라도, 그 지긋지긋한 족속들에게 시달린 건 매한가지인 듯 싶다.

"지금 상황에서 하나 확실시할 수 있는 건, 베론이 마왕 추종자를 노린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공화국에 있는 한, 그자는 반드시 다시 모습을 드러낼 거고요."

마탑주 길버트의 말이 맞다. 베론은 분명 신시아를 '샘플'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마왕 후보자로 어떤 짓을 저지르려는 생각이 있다는 뜻일 테고.

"우리 흑색 마탑은 여러분의 신변을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청색 마탑이 베론의 영역이듯, 이 마탑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제 선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우린 됐어."

기사단장 올리비에.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를 도와준 건 고마운 일이야. 그 점은 반드시 보상하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엄연히 제국의 대표라 특정한 마탑에 깊게 관여해 버리면 곤란하거든.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야."

"그 말은... 떠나겠다는 뜻이군요."

"맞아. 렉스가 회복되는 대로, 우린 제도로 돌아갈 거야. 가서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지. 청색 마탑의 무례한 행동. 그리고 흑색 마탑의 작은 성의를."

올리비에의 확고한 대답에, 길버트는 대답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후그럼 공국과 성국 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국은 '기사단장'이라는 격을 초월한 우상이 함께 왔다. 그렇기에 베론의 감시망을 뚫을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지만 우리 쪽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

무엇보다 신시아의 상태. 강제로 마기를 이끌어낸 반동으로 신시아의 몸은 크게 약해져 있다. 그런 상태로 차원문을 이용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지.

"성국은 흑색 마탑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공국은... 예, 저희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인 공국도 같은 선택을 했다.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흑색 마탑의 보호를 받으며 힘을 회복하는 것이리라.

"훗,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오웨인. 귀빈들을 숙소로 안내해 주거라."

"분부대로."

* * *

오웨인을 따라 흑색 마탑의 손님용 방으로 향하는 길, 즐거운 표정으로 앞서는 그에게 질문했다.

"오웨인,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뭐든지요."

"흑색 마탑은, 그리고 당신은 무슨 목적입니까?"

"목적? 목적이라뇨?"

"솔직히 말해, 의심 갈 법한 행동 아닙니까. '청색 마탑주'라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저희를 도와주는 이유. 쉽사리 생각하기 어렵더군요."

우리는 제국만큼의 영향력이 없다. 공국은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난 적 없는 이름뿐인 귀공녀고, 성국은 성녀가 된지 얼마 안 된 소녀와 평범한 신부, 그리고 성기사 정도.

"푸흡, 로렌스 씨, 겨우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까?"

"아무래도 청색 마탑에서 그 꼴을 당했다 보니,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어서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오웨인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죠. 당신들이 맘에 들어서 그런 겁니다."

"맘에 들어서, 요?"

"네. 단순한 변덕이라고 생각하세요. 일단은 마왕 후보자들이시니 저를 비롯한 흑마법사들에겐 동경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또..."

오웨인이 눈을 가늘게 뜬다. 웃는 표정은 순식간에 음흉한 익살꾼의 표정으로 변한다.

"청색 마탑에게, 그리고 베론에게 커다란 엿을 먹인 것 아닙니까. 그 점만 해도 당신들을 도울 이유는 충분하죠."

"하, 하하."

음, 확실히. 베론을 면전에 둔 오웨인은 상당히 험악해 보였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조금... 오스스합니다."

크리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행히 지금은 갑옷을 입고 있어 움츠러 든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확실히 크리스의 말대로군.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서 보이는 흑색 마탑의 풍경은... 고요하면서도 쓸쓸하다. 어두운 색으로 통일된 장식물하며, 중간중간에 만나는 마법사들도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고.

"유령이 나오지는 않겠죠?"

"네? 푸흡, 무슨 말씀을."

크리스의 질문에 오웨인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오는 게 당연하잖아요."

"후, 역시 그렇죠? 그것 참 다행... 잠깐, 뭐라고요?"

"흑색 마탑의 특기 중 하나는 강령술이니까요. 유령은 안 나오지만, 혼의 에너지를 통해 형상화되는 스펙트럼은 나올 수 있죠."

"그게 유령이잖습니까!"

크리스가 반쯤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오웨인을 노려본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흑색 마탑 역시 엄연한 마법사들의 전당이다. 바깥의 상식으로는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힘들 것이다.

"자, 도착했습니다. 당분간 이쪽에 있는 방들을 쓰시면 돼요."

오웨인이 방문을 열었다. 전형적인... 유령이 나오는 저택의 방 모습이군.

"로, 로렌스. 전 역시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편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크리스. 성녀님을 지키는 것이 당신의 임무 아닙니까. 설마 아네모네를 길바닥에서 재울 셈이니까?"

"으으, 으으으으...!"

어깨가 축 쳐진 크리스를 방에 밀어 넣고, 나와 다른 사람들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혼자만 있게 되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러워.'

오랜만에 느끼는 두통. 일단은 침대에 편히 누워 휴식을­.

"아니, 아니지."

아직 신시아가 의무실에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나 혼자만 편히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끼이익. 방문을 열고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신시아의 의무실은... 몇 층이었더라.

"신부?"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당신은 분명... 카일, 맞나요?"

검은 머리를 한 공국의 기사, 카일이었다.

"보아하니, 당신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군요."

"...대충은."

서로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각자의 소중한 사람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올라가던 중, 카일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신부,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요? 갑자기 무슨..."

"아가씨에 대해. 그녀가 가진 마왕의 힘에 대해.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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