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마왕의 전조(2)
* * *
천 년 전의 대륙. 아직 일곱 나라라는 개념조차 생기지 않았던 태고의 시대.
인간과 마수의 경계가 무너져,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웃었던 동료조차 괴물로 변해버리는 잿빛의 시대에.
최초의 마왕이, 탄생했다.
마왕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이유로 인간을 학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시대의 학자들이 알아낸 사실은 단 하나.
'마왕의 기원은 인간이다.'
그 사실을 입증하려는 듯, 대륙 각지에서 새로운 마왕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그들 중에는 모두의 선망을 받던 영웅도 있었고, 상처 입은 사람을 보살피던 여인도 있었으며, 이름 없이 죽어가는 빈민가의 거지도 있었다.
그리고 마왕이 나타나기 전에는 항상, 어떤 종류의 마수가 나타나 공포를 퍼뜨렸다고 한다.
그 이름은.
* * *
"무쉬후쉬. 날개 없는 사룡(死?).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마수의 형태로 변할 수 있는 최흉(??)의 마수."
"잘 알고 계시네요."
마왕의 전조가 나타난 것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다.
북왕국의 교역 도시에서 벌어진 참사.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참사가 일어날 '뻔' 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 그의 검에 마왕의 전조는 형태를 잃고 스러졌다.
"그야 알 수밖에 없죠. 용사 일행이 성국을 떠나 처음으로 향한 곳이, 마왕의 전조가 나타난 북왕국이었으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왕국에서 마왕의 깨어났다.
'갈망의 바알'. 과거에 봉인되었던 마왕이, 북왕국의 대광장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 일로 전 대륙의 학자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왕이 새로 태어나든, 혹은 봉인되었던 마왕이 부활하든 '저것'은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그 말을 뒤집으면, '마왕의 전조'가 나타난 이상 마왕이 나타나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오웨인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선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가정을.
"마왕 후보자가 셋이나 모여 있는 상황에서 마왕의 전조라니... 이것 참, 머리가 아파오네요."
"오웨인!"
"진정하십시오, 로렌스 씨. 신시아 씨가 마왕으로 변할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할 건 다른 게 아닙니다. '어떻게 저 괴물을 막아내느냐'. 단지 그뿐이죠."
말을 마친 오웨인이 양손에 번개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선 그의 말이 맞다. 마왕 후보자가 반드시 마왕이 되리라는 법은 없다. 내가 할 일은... 검을 쥐는 것뿐.
"세바스."
우우웅. 초록색의 검날을 가진 참수도가 내 앞으로 날아와 꽂혔다.
이 검을 뽑아야 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런데 오웨인."
"네."
검을 뽑아 어깨에 걸치던 도중, 당연한 의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마왕의 전조가 이 시간에 나타날 거라고, 대체 어떻게 확신한 겁니까."
"이유가 있죠. 전 흑마법사니까요. 마왕의 전조는 강대한 '마기'를 품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기를 다루니, 저것이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는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다. 나 같은 성직자들도 다른 사람에 비해 신성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그래서, 저걸 막을 사람은 우리뿐입니까?"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 뒤를 따라온 사람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오웨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와 있었군."
등 뒤로 열린 검은색의 차원문. 그 너머에서 발을 디딘 자는... 익히 보아 알고 있던 자다.
흑색 마탑주 길버트. 그리고 그를 위시한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
"오셨습니까, 마탑주님."
"섭섭하구나, 오웨인. 너한테는 귀빈 대접이 더 중요했나 보군."
"마탑주님이라면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니까요. 그런데... 부마탑주 마리엣타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녀에게는 마탑의 호위를 맡겼다. 이 틈을 타 베론이 흑색 마탑을 노릴 수도 있으니 말이야."
비록 수는 적지만, 흑색 마탑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다.
"마탑주님. 다른 마탑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도에 있는 다섯 마탑 중 백색과 금색 마탑주는 부재중이다. 변경의 일을 해결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더군."
"그리고 청색 마탑주는... 말할 가치도 없겠네요."
"이 자리에 온 건 흑색 마탑주인 나. 그리고."
마탑주 길버트가 정면을 바라봤다. 저 멀리,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공화국의 수도에 거점을 둔 다섯 마탑.
청색, 흑색, 금색, 백색,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색.
"적색 마탑주. 용사 일행을 안내하고 있는 그녀 밖에는 없지."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오웨인이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흉악한 독기를 뿜으며 이를 드러내는 마수를 앞에 두고,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표정에 자신감이 드러나는 이유.
마탑주가 둘이나 왔기 때문에? 아니다.
금색 마탑의 마도 기사들이 왔기 때문에? 아니다.
그들이, 그리고 나 또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레이크의 말대로군."
광장의 한가운데. 그 자체만으로 빛을 뿜어내는 성검을 손에 들며, 천천히 마수로 다가가는 금발의 남성.
"전조를 감지한 건... 우리만이 아니었어."
그가 나지막이 말한다.
"하지만 저들이 나설 일은 없게 할 것이다."
순은의 검에 빛 알갱이가 모여 거대한 검신(??)을 이룬다.
마수가 남자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남자는.
"내가 이곳에 왔으니까."
그저 크게 한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그 단순한 궤적이, 마왕의 전조라 불리는 끔찍한 마수를 반으로 가른다.
저 자를 부르는 명칭은 많으나, 대륙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름은 단 하나.
'용사.'
* * *
대륙을 피로 물들인 마왕의 손아귀 아래에, 힘없는 자들은 그저 웅크려 떨기만을 반복했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들이, 마지막 힘을 짜내 시도한 것은 '기도'였다.
신에 대한 기도. 운명에 대한 기도.
부디 이 끔찍한 상황을 바꿔줄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기도.
그렇게 일곱 번의 해가 지고 뜬 끝에, 지금의 성국이 자리 잡은 땅의 한가운데에 한 줄기의 빛이 내려왔고.
사람들은 그것을 '성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검을 뽑으려 하지 않았다.
공포에 사로잡혔기에. 거대한 운명에 짓눌렸기에.
저 검을 뽑은 자가 어떤 길을 걸어 나가야 할지, 그들 모두가 은연중에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간절히 영웅을 바랐지만, 그 누구도 영웅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하겠어."
성검을 둘러싼 무리들 중 한 소년이 앞으로 나와, 검에 손을 대었다.
이윽고 거대한 빛줄기에서 성검이 뽑혀 나왔고, 소년은 자신의 사명을 직감했다.
훗날, 그 소년은 이렇게 불리게 된다.
마왕을 물리친 초대 용사.
어느 이름 없는 소년은 성검을 든 용사가 되었다.
용사를 만든 건 혈통도, 기도도, 운명도 아닌, 어떤 소년의 용기였다.
모든 마왕이 소멸, 혹은 봉인된 후, 용사는 성검을 원래 있던 자리에 반납했다.
용사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북쪽으로 돌아가 '북왕국'을 세웠다.
용사를 따랐던 일행들도, 각자의 장소로 돌아가 사람들을 모으고, 깃발을 세워 국가를 건국했다.
그것이 일곱 나라. 북왕국, 남왕국, 성국, 공화국, 연방국, 공국, 그리고 제국.
그렇게 지금의 대륙이 만들어졌다.
* * *
용사. '마왕'이라는 존재와 저울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의 존재 자체가 희망이고, 빛이며, 앞을 밝히는 횃불이다.
"용사...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막상 눈앞에 두니..."
"오묘한 느낌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로렌스 씨."
용사, 디바인. 어디에나 있을 법한 금발의 청년.
하지만 그를 처음 본 순간, 알 수 없는 느낌이 가슴에서 솟구쳤다.
내가 전투광이었다면 그에게 싸움을 걸었을 것이다.
마법사였다면 그를 탐구했을 것이고, 마왕 추종자였다면 위압감에 눌려 고개를 떨구었겠지.
하지만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경외심, 아니, 질투야.'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재능이 있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강자와 약자 중에서는 강자에 속하고, 지켜지기보다는 언제나 다른 자를 지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저 용사는... 격이 다르다.
자신의 강함에 자신이 있는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기분이 나쁘기는 커녕, 오히려 경쟁심이 생길 정도다.
"손 쓸 틈도 없이 끝나버린 건가."
"아니, 아직입니다."
흑색 마탑주의 바람과는 다르게, 마왕의 전조는 반으로 갈라진 그의 몸을 순식간에 수복했다.
"크르라아아아!"
망조의 짐승이 내뱉은 울음소리가 광장을 뒤덮는다.
이윽고 마수의 뒤편에서 거대한 차원문이 열리더니, 같은 모습을 한 마수들이 무리를 이루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문헌에 나온 대로네요. 마왕의 전조는, 다시 나타날 때마다 그 수가 늘어난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모인 거 아닙니까."
흑색 마탑주. 적색 마탑주. 그들 휘하의 마법사들과... '용사 일행'.
밀리지 않는다. 아니, 전혀 질 것 같지 않은 싸움이다.
"시작하죠."
마왕은 결코 모든 것의 종말을 상징하지 않는다.
막아낼 수 있고, 실제로 막아낸 전적이 있다.
지금은 천 년 전과 다르다.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자들에게 있어, 겨우 마왕의 전조로 절망할 시간은 없다.
"단죄."
"흑뢰."
몰려오는 마왕의 전조에게 검을 내지른다. 오웨인의 검은 번개가 사방에 내리치고, 마탑주와 마법사들이 영창을 외운다.
"모두 물러나!"
그때, 하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보인 것은, 최소 수십 자루로 보이는 화염의 창.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양손으로 마법진을 그려내고 있는 보라색 머리의 소녀였다.
"스피네?"
"간다아아앗!"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스피네가 수십 자루의 화염창을 동시에 터뜨려 쏘아낸다.
"뭐 저런 무식한..."
"놀랄 틈 없습니다, 오웨인!"
재빨리 검을 역수로 들어 '수호성인'을 펼친다.
'안 돼. '수호성인'으로 지킬 수 있는 수에는 한계가 있어...!'
이대로 가다간 아군의 공격에 우리가 먼저 당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여신 에레쉬키갈이시여, 부디 저들을 숨겨줄 그림자를 내리소서."
붕대를 감은 여인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어깨에 매인 붕대를 풀며 여신의 이름을 읊조리는 이 여인은 분명.
"...성녀?"
광장을 가득 메우는 폭음(?音). 삽시간에 몇 마리나 되는 마왕의 전조가 터진 풍선처럼 갈기갈기 찢겼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아니, '영향'조차 받지 않았다.
"휴, 다행이야. 어떻게든 시간을 맞췄어...!"
공격을 막아낸 것은 반투명한 회색의 장막. 그리고 그걸 사용한 건 아마도... 이 회색 머리의 여인이겠지.
나는 이 여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성국의 신부, 로렌스가 성녀님을 뵙습니다."
"...네에?"
용사와 함께 다니는 또 하나의 성녀. 통칭, '붕대를 감은 성녀'.
언젠가는 만나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이야.
"사, 사람 잘못 보셨... 아, 스피네 씨!"
"꺄, 꺄아아아앗!"
공중에서 떨어지는 스피네. 그녀를 향해 어떤 남자가 뛰어간다.
"읏차."
"주, 죽는 줄 알았어.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너야말로, 왜 잘만 날다가 갑자기 떨어지지?"
"나도 모르게 신나서 공격에 집중하느라... 흥, 아무튼 네가 말한 대로 했잖아!"
"그래, 그래. 잘했다, 스피네."
용병 레이크. 마녀 스피네. 거기에 붕대를 감은 성녀와...
"...함부로 들어갈 틈 조차 없군요."
"성검의 힘인 건지, 본인의 힘인 건지."
주위의 공간을 모두 검격으로 채우며, 날개 없는 사룡을 순식간에 베어버리는 용사까지.
'이게 용사 일행. 마왕을 상대하는 최전선.'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때, 마탑주 길버트가 소리쳤다.
"전조가 약해져 있다. 지금이 기회야!"
그의 말에 다들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검을 들어 발을 내디뎠다.
* * *
"으읏, 하읏...!"
"괜찮아요, 신시아 언니?"
신시아가 묵고 있는 방. 하얀 침대 위에서 신시아가 괴로운 신음을 내고 있었다.
온몸을 부여잡은 신시아의 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성녀님.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로렌스도 보이지 않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물에 적신 수건을 언니의 이마에 올리며, 아네모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조심스레 신시아의 몸에 손을 올려 '권능'을 시도한 순간.
"...읏."
"성녀님?"
지잉, 하고. 머릿속이 강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네, 크리스 언니."
아네모네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느 한 곳, 그곳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런 느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크리스 언니, 신시아 언니를 부탁할게요."
"잠, 성녀님?"
"괜찮아요! 신부 오빠를 찾으러 가는 것뿐이니까!"
아니, 사실은 좀 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가진 권능. 여신 에레쉬키갈의 권능.
그 힘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머리가 울리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공명(??). 이건 분명 공명이야. 그런데 어째서?'
아네모네가 달린다. 이유도, 목적도 부정확하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 길의 끝에서 만나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성녀. 성국의 어둠이 만들어 낸 두 성녀가,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 한 장소에 모이려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