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53화 (53/109)

〈 53화 〉 두 성녀(1)

* * *

"저 놈이 마지막이군."

"이제는 더 부를 동료도 없어 보이고 말이야!"

용사 일행과 마탑의 마법사들의 협공으로, 마왕의 전조는 단 한 마리만을 남기고 모두 쓰러졌다.

그중 용사 혼자서 베어 넘긴 수가 절반이었지만 말이다.

"디바인 씨. 마지막 남은 개체는 아마도..."

"그래, 계속해서 재생하던 놈이다.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야."

용사 디바인의 말대로다. 마왕의 전조가 무리를 이루어 나타날 때는 반드시 '핵'이라고 불리는 개체가 있고, 그 개체를 배제해야만 일련의 사태가 끝을 맺는다.

"하지만 디바인 씨의 검격에도 재생한 개체예요."

"스피네의 마법도, 레이크의 기교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디바인이 일렌을 바라 보았다. 싸우는 내내 무표정헀던 그였으나, 지금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걱정. 미안함. 그리고... 연민인가.'

디바인의 눈을 바라본 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해볼게요."

말을 마친 일렌이 자신의 어깨를 감싼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어깨에 선명히 드러난 보라색의 문장. 그림자와 피의 여신, 에레쉬키갈의 문장이다.

"피의 권능을 사용하면 재생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부탁드릴게요, 용사님."

"최대한 '그 힘'을 덜 쓰도록 해보지. 아, 그리고..."

성검 스펜타를 곧게 쥐며, 디바인이 일렌에게 말했다.

"용사님이 아니라, 디바인이라고 불러 줘."

"...정말. 알겠어요, 디바인 씨."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성녀 일렌의 미소에, 용사 디바인은 결연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크르르, 크라라라아아­!"

날개 잃은 사룡, 무쉬후쉬가 마지막 발악을 시작한다.

일렌이 준비를 마치자, 디바인이 가볍게 발을 내지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미끄러지듯 앞으로 향하는 디바인. 그의 손에 쥐어진 성검이 일직선의 궤적을 남긴다.

"지금이다, 일렌."

백색의 섬광과 함께 반으로 갈라진 마왕의 전조. 그것을 향해 일렌이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림자와 피의 여신, 에레쉬키갈이여. 부정한 피로 타락한 영혼을 붙잡는 육체를 파(?) 하시옵고, 지옥불로써 악의 씨앗을..."

신성력을 모으던 일렌의 영창이 어느 순간 멈췄다.

"일렌?"

이변을 눈치챈 디바인이 그녀를 돌아봤다.

갑자기 일렌이 어깨를 부여잡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렌! 괜찮나, 일렌!?"

"일렌!"

명백히 이상한 성녀의 행동. 디바인 뿐만 아니라 스피네도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어째서 갑자기 그녀의 성법이 무너졌는가. 그 이유는... 신성력에 민감한 나만이 알 수 있었다.

''공명' 현상이다. 같은 장소에 같은 종류의 권능이 펼쳐질 때 벌어지는 현상. 그렇다는 말은...'

나의 가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멀리서 나를 향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부 오빠!"

"아네모네."

일렌이 사용하려 한 권능은 그림자와 피의 여신, '에레쉬키갈'. 그리고 그 권능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한 명 더 있다.

성국의 세 번째 성녀. 붉은 성녀, 아네모네.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기에, 붕대를 감은 성녀의 권능이 간섭당한 것이다.

"그르, 그르르르...!"

"잠깐, 다시 재생하고 있잖아...!"

스피네가 손가락으로 마왕의 전조를 가리켰다.

반으로 갈라진 육체조차 순식간에 수복한 마수. 그것이 다음 목표로 삼은 자는... 무방비한 차림의 어린 여자애였다.

"아네모네, 도망치세요!"

"신부 오빠! 신시아 언니가 기다려서요... 네?"

젠장, 따라잡을 속도가 나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간 아네모네가...!

"스피네, 뒤는 맡긴다."

"잠, 레이크? 너 설마..."

한 발자국. 아네모네를 향해 손을 뻗는다. 하지만 너무나도 먼 거리다.

두 발자국. 까득, 하고. 누군가가 엄지 끝을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세 발자국. 음속을 초월한 굉음을 내며, 무언가가 내 옆으로 공기를 꿰뚫며 지나갔다.

"그롸아아아!"

그리고 네 발자국. 마왕의 전조가 들이민 발톱을 쳐내고,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아네모네를 안고 먼 곳으로 도망쳤다.

용사 파티의 일원. 광전사 레이크. 아네모네를 위험에서 구해 준 자는 바로 그였다.

"주, 죽는 줄 알았어...! 감사합니다, 용병 오...빠?"

그런데... 아네모네를 품에 든 레이크의 얼굴이 조금 이상하다.

붉게 충혈된 두 눈동자. 혈관이 드러난 눈가. 그리고 끝부분이 하얗게 샌 머리카락.

"레이크, 저 바보가!"

"...말려야겠군."

스피네와 디바인이 머리를 짚으며 전투 준비에 나섰다.

광전사 레이크... 광(?)전사... 설마?

"스으으으으..."

"꺄아아악!"

퍼엉, 하고 터져나가는 공기. 아네모네의 머리카락이 역풍에 흐트러졌다.

마왕의 전조를 향해 돌격한 레이크의 모습은... 마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장창을 들고 자비 없이 살갗을 뜯어낸다. 기교도 쓰지 않고, 손속을 두지도 않은 채.

"이봐, 신부님!"

스피네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라키며 말했다.

"우리가 저 바보를 막을 테니까, 당신은 저 빨간 머리를 지켜!"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 했습니다."

레이크가 전조를 상대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땅바닥에 주저앉은 아네모네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아네모네?"

"으으. 괜찮은 것, 같아요..."

"어째서 여기에 온 겁니까? 당신이라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죄,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꼭 여기로 와야 할 것만 같아서. 뭔가 머리가 찡­하니 울려와서...!"

머리가 울렸다라. 공명이 아네모네에게도 영향을 끼친 건가.

"진정해, 이 바보야!"

"포기해라, 스피네. 저번과 마찬가지야."

마왕의 전조를 상대하고 있는 용사 일행을 바라본다.

아니 이미 마수는 처참한 잔해로 변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 상태에서도 조금씩 재생하려는 게 보이지만.

그리고 레이크는... 여전히 눈빛이 돌아오지 않았다. 차라리 광소라도 지었다면 모를까,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다.

'다른 마법사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어. 일단은... 전조부터 완전히 끝장내야겠군.'

"아네모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 저 말인가요?"

"네. 저 마왕의 전조는 끊임 없이 재생을 하는 개체입니다. 용사의 공격에도 몇 번이고 부활하죠. 그렇기에 용사 일행의 성녀가 '권능'을 사용해 재생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아네모네라는 변수만 없었다면 성공했을 일이지만.

"성녀? 그럼 저 붕대를 감은 언니도..."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자, 아네모네. 당신의 힘을 보여주세요. 기적을 보여준 그날처럼."

"...해볼게요."

아네모네가 두 손을 모으고 신성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그림자와 피의 여신, 에레쉬키갈. 그중 '피'의 권능에 한해서 만큼은 그 어떤 성직자보다도 능숙히 사용할 수 있을 그녀.

아네모네의 앞에 에레쉬키갈의 문양이 새겨지더니, 이윽고 붉은 안개가 뿜어지며 마왕의 전조에게 향했다.

"그, 그르르르..."

꿈틀. 서로 엉겨 붙어 재생하던 뼈와 살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 다음에 올 결과는 당연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레이크의 잔혹한 일격이 전조의 잔해에 명중했고... 파스스 소리를 내며, 날개 없는 사룡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돼, 됐다...!"

"잘했습니다, 아네모네. 칭찬을 해주고 싶지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광전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으으으으..."

"지금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네요."

목표가 사라진 광전사는 다음 목표를 찾았다.

연약한 몸을 가진 어린 소녀와... 충분히 강해 보이는 신부를.

"아네모네, 뒤로 물러나세요."

"신부 오빠...!"

용사와 마녀. 그들이 손을 뻗기도 전에, 레이크가 공기를 터뜨리며 내 쪽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나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검날. 피할 틈은 없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했네요, 로렌스 씨."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들.

성검 스펜타를 든 용사가 레이크의 검을 가로막고 있었고.

나와 아네모네 앞에 적색과 흑색의 보호막이 이중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오웨인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아네모네를 몸으로 감싸고 있었고.

마녀 스피네가, 레이크의 몸을 뒤에서 안으며 그의 몸을 얼어붙였다.

"다행히 이번엔 시간에 맞췄군."

"마탑주님이나 다른 분이 아니었다면, 저랑 로렌스 씨가 사이좋게 꼬치구이가 될 뻔했고요."

"여전히 무모한 방법을 쓰는 거냐, 오웨인."

두 뼘도 채 되지 않을 거리에, 레이크가 붉게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살다살다 용사 일행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줄이야. 별 일이 다 있군.

"이제 끝났어, 바보야."

레이크의 등을 붙잡으며 스피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쩌저적. 발 끝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레이크의 몸은, 어느새 하반신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였다.

"스피네. 그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다."

"...꼭 해야 해? 그, 보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으으, 이 바보, 바보 멍청이!"

마침내 얼굴을 남기고 모두 얼어붙은 레이크. 그의 등을 힘차게 두드린 스피네가 조심스레 나에게 다가왔다.

"이봐, 신부님. 잠깐만 비켜줄래? 그 바보랑... 해야 할 게 있어서."

"원하시는 대로."

그녀의 말대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대체 무슨 마법을 쓸 거기에 저렇게 얼굴을 붉히는지.

"으, 역시 안 되겠어! 그냥, 그냥 얼린 채로 데려가면 안 돼?"

"잘도 살아 있겠군."

스피네가 눈을 질끈 감더니, 그대로 레이크의 볼에 입을 맞췄...

입을?

"제가 지금 뭘 본 거죠? 저런 걸로 해주가 될 리가..."

"조용히 하십시오, 오웨인."

"갑자기 왜 화를 내는 겁니까?"

입을 맞춰서 진정시킨다라...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한 대처법이다.

그래, 아마 스피네라는 여자도 결코 원해서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결코 신시아를 진정시킬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입술의 감촉을 기대한다거나 하진 않았다.

"으, 으으으."

"정신 차렸어?"

"...보아하니, 누굴 다치게 한 것 같지는 않고."

"다치게 할 뻔했어. 너가 지키려 했던 사람을."

레이크가 아네모네를 바라보았다. 눈과 머리카락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험악했던 얼굴도 다시 평범한 청년의 것으로 변했다.

'저게 광전사... 서연방국의 전사들 중 극소수가 가진 체질.'

"이 바보야! 어째서 광화를 쓴 거야!?"

"저 소녀를 구하려면 그 정도의 속도가 필요했다. '이걸' 사용하면 디바인도 앞지를 수 있으니까."

깨문 흔적이 보이는 엄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레이크가 말했다.

"후, 그래. 말을 말자."

"그리고... 너희들이 나를 막아줄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

쩌저저적. 갑자기 스피네가 레이크의 얼굴에 손을 올리더니, 그대로 광전사 모양을 한 얼음 동상으로 만들었다.

"스피네? 갑자기 무슨?"

"아, 아, 아직 광화가 안 풀린 것 같아서 말이야! 음, 그렇고 말고! 아하, 아하하하하..."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스피네의 얼굴은... 아네모네의 머리카락보다 더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 * *

흑색 마탑과 적색 마탑의 주도 하에, 전투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져 나가고 있다.

부상자는 경상이 셋. 중상은 없음. 그리고 사망자는... 아무도 없다.

"평범한 산책일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꼴이 될 줄이야."

"그래도 썩 재미있었죠?"

"오웨인. 한 마디만 더하면 저도 흑색 마탑을 떠나겠습니다."

아네모네, 그리고 오웨인과 함께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중, 흑색 마탑주 길버트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네모네처럼 붉은 장발을 흩날리는 여성과 함께 말이다.

"오웨인, 나는 먼저 마탑으로 돌아가 보마."

"저도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옆에 분은...?"

"용사 일행을 안내하고 있는 적색 마탑주, 카레니나다."

적색 로브를 허리에 둘러매고, 배꼽을 드러낸 짧은 기장의 옷을 입은 여인. 적색 마탑주, 카레니나.

마도 공화국에 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마탑주를 셋이나 만날 줄이야.

카레니나가 나와 오웨인, 그리고 아네모네를 보며 말했다.

"얘기 들었어. 당신이 길버트하고 계약한 흑마법사. 당신은 성국에서 온 마왕 후보자의 보호자고..."

"저, 전 성녀 아네모네라고 합니다!"

"아, 그래. 성녀."

마탑주 카레니나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흠흠, 공화국의 적색 마탑주 카레니나가 성녀를 뵙습니다."

"네, 네, 네, 네에?"

"당황하지 마세요, 아네모네. 앞으로 익숙해져야 할 상황입니다."

아네모네가 어버버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성녀'란 성국의 우상. 그녀에게 있어 이런 예의는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길버트에게 얘기 들었어. 베론에게 한 대 쥐어줬다면서?"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지만요."

오웨인이 고개를 꾸벅이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푸흡. 상상만 해도 꼬시네. 마음 같아선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카레니나가 뒤쪽을 가리켰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무리.

"우리 측 귀빈께서, 꼭 당신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해서 말이야. 특히 붉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성녀님께."

"네, 저요?"

"그럼 잘 해봐~!"

그 말을 끝으로, 적색 마탑과 흑색 마탑의 인원들이 떠났다.

용사 일행. 용사와 성녀. 광전사와 마녀. 그중 우리에게 용무가 있는 자는... 한 명 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이..."

용사 디바인에게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회색 머리의 여인.

온몸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은 병약한 인상의 성직자.

"당신이 성국의 새로운 성녀인가요?"

붕대를 감은 성녀, 일렌.

아네모네와 같은, 불현듯 탄생한 성녀가 입을 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