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두 성녀(2)
* * *
"당신도 성녀인가요?"
붕대를 감은 성녀, 일렌.
그녀가 아네모네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한쪽 눈을 붕대로 가려 다른 한쪽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 눈빛은... 망설임, 의구심, 반가움, 거기에 약간의 안타까움이 섞여 있군.
"시, 신부 오빠. 저분들은 누구예요?"
"용사 일행입니다."
"아, 용사 일행이구나, 헤헤... 네, 네? 요, 요, 용사 일행이요?"
아네모네가 깜짝 놀라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아, 생각해 보니 아네모네는 용사 일행과 만난 적이 없었지.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성국의 신부 로렌스 프랑이, 용사와 그의 일행 분들을 뵙습니다."
"아, 저, 그, 성녀 아네모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수도원에서 한참 연습하던 자기 소개문은 어디 가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네모네.
그녀를 보고 눈을 깜빡이던 일렌이 손을 입가에 가져 대더니.
"푸, 푸훕."
하고 웃음을 지었다.
"아, 죄송해요. 너무 귀여워서 그만..."
조그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친 일렌이, 정중히 치마를 들어 올리며 우리의 인사에 답했다.
"저는 일렌이라고 해요. 아네모네 씨와 마찬가지로 성녀로 인정받았고, 지금은 디바이... 흠흠, 용사님을 인도하는 길잡이를 맡고 있습니다."
일렌을 시작으로, 용사 파티의 일원들이 차례차례 앞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이미 면식이 있는 자들.
"반가워, 신부님. 또 만나네? 난 스피네. 마녀야. 용사 일행이라기엔 어쩌다 보니 같이 다니는 정도지만."
"레이크다. 옆의 성질 고약한 마녀에게 고용당한 입장이야."
"또 왜 그래! 화 안 났다며!"
레이크의 몸 이곳저곳에는 아직 서리가 껴 있다. 어떻게든 원 상태로 돌아오기는 한 모양이다.
"아까 전에는 미안했어. 나름대로 정신을 차리려고는 해봤는데."
"아뇨! 제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레이크 오빠."
"그거 감사한 말이군. 아, 그리고 신부. 내 '경고'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나?"
'마탑주 베론을 조심하라'. 그가 우리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역시 뭔가 껄끄러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역시 수상한 남자다.
지금은 그가 적이 아님에 만족할 수밖에.
"어떻게 베론이 그럴 거라고 예상한 거죠?"
"용병의 감이지. 한 마디 더 하자면...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야."
"...이번에도 한 번 믿어보죠."
세 사람의 소개가 끝난 후, 마침내 디바인이 앞으로 나섰다.
순은으로 장식된 경갑. 허리에 찬 성검 스펜타.
감색 망토와 금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정식으로 인사하겠다. 디바인. 성은 없어. '용사'라고 불리고 있긴 하지만... 평범한 모험자라고 생각해도 좋아."
스피네가 화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남자, 선천적으로 남을 열 받게 하는 재능이 있다.
물론 그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용사도 엄밀히 따지면 모험가와 큰 틀은 비슷하니까.
'토벌 대상이 마왕이고,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점만 빼면 말이지.'
"당신이 이번에 새롭게 추대된 세 번째 성녀라고 들었다. 사실인가?"
"일단은 맞는데요..."
"흐음, 그런가. 성녀가 또 다시..."
아네모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 용사, 디바인이 사색에 잠겼다.
"잠시 이야기를 하지. 이왕이면 일렌과 나, 성녀님과... 신부, 당신까지 합해 넷이서."
"잠깐! 우리는 왜 빼는데?"
"가만있어, 스피네. 우리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니까."
성녀와, 성녀와 함께 하는 보호자의 조합이라. 용사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대충 알 것 같다.
일렌도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알겠습니다. 괜찮죠, 오웨인?"
"아, 안경 쓴 오빠라면 아까 몰래 떠났어요!"
어쩐지, 아까부터 오웨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니까요'라고 말하는 오웨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 *
"여기라면 괜찮겠죠."
어느 한적한 거리의 찻집. 우리 네 사람은 야외 테라스에 둘러앉았다.
반쯤 예상했지만, 역시 주위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사람 물리기' 마법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 사단이 일어났으니까요. 앞으로 1시간 동안은 그 누구도 오지 않을 거예요."
일렌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1시간 동안은 비밀스러운 얘기를 해도 새어나갈 걱정이 없다는 뜻이죠."
"주위에 사역마나 마도구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심해도 좋아, 일렌."
"고마워요, 디바인 씨. 흠흠, 그럼 시작할까요?"
일렌이 아네모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말로만 듣던 용사와, 자신보다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성녀를 앞에 둔 아네모네는 이미 딱딱하게 굳었지만 말이다.
"긴장할 거 없습니다, 아네모네."
"하지만, 말실수라도 하면...!"
"용사 일행은 겨우 그런 좁은 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은 당신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잖아요? 일렌 성녀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부른 걸 겁니다."
"...알겠어요! 성녀 아네모네, 최선을 다해 대화할게요!"
한층 가벼운 표정으로 아네모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태도에 사뭇 안심했는지, 일렌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아네모네 성녀님. 당신은, 어떻게 성녀가 되었나요?"
"성녀가 된 이유 말씀인가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아니요."
일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물은 질문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다.
"성녀가 된 '과정'을 말하는 거예요, 아네모네."
"과정?"
아네모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애 먼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그녀가 성녀가 된 과정. 그걸 설명하기 위해선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신시아나 에델, 크리스를 말하는 것이 아닌... 지금의 그녀를 만든 소녀, '아네트'.
그녀에 대한 기억을 꺼내는 것은 필시 괴로우리라.
"아네모네. 대답할 수 없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성녀님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아뇨, 신부님. 전 괜찮아요.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도록 힘내겠다고, 언니한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결연한 표정으로, 아네모네가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광신도 집단의 '실험'으로 탄생한 일.
이단심문회의 숙청으로 자신만이 살아남아 야산을 떠돈 일.
그리고 버려진 도시, 레고르에서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일까지.
"...그러다 신부 오빠랑 신시아 언니를 만났죠. 신부 오빠는 저에게 성녀가 되라고 말했고, 저는 그걸 받아들였어요."
"아네모네. 거짓말은 하면 안 되죠. 성녀가 되기 싫다고 저한테 공격을 날렸잖아요. 명백히 살의를 담아서."
"우와아악! 그, 그걸 말하면 어떡해요, 신부 오빠!"
이후, 성자 레고르를 막기 위해 기적을 일으키면서 아네모네는 성녀가 될 조건을 충족했다.
교황의 선포 아래, 그렇게 아네모네는 성국의 세 번째 성녀, '붉은 성녀'로 인정받고 우리 수도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을 위해서, 라. 감동적인 이유예요."
"헤헤헤. 아직 멀었는 걸요!"
"저랑 똑같네요. 소중한 사람이라면, 저도 있거든요."
일렌이 디바인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그랬었나, 일렌? 처음 듣는 얘기군. 그게 누구지?"
"...디바인 씨만 모르는 사람이요."
음. 대충 알겠군. 그런 관계인가.
"후우, 잘 들었어요, 아네모네. 그렇군요. 당신도 '실험'을 통해서..."
일렌이 자신의 손목에 묶인 붕대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라는 말은, 일렌 역시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의 권능을 몸에 담은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성녀님은 어떻게 성녀가 되셨어요?"
"저, 말씀이신가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네모네가 순수한 얼굴로 일렌에게 물었다.
일렌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이윽고 담담히 말하기 시작했다.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예요, 아네모네. 낳아 준 부모님의 얼굴도 모르는, 어떤 '실험'으로 탄생한 존재."
일렌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성녀의 흔적을 좇는 로제리오 녀석이 들으면 좋아하겠군.
"설명보단, 직접 보는 편이 빠르겠네요."
일렌이 그녀의 손에 묶인 붕대를 조심히 풀었다.
붕대 안쪽으로 드러난 것은, 보기 좋지 않은 흉터나 화상 자국이 아니었다.
"여신 닌후르삭의 문장?"
여신의 문장. 옅은 새을 띤 문장이 손등 위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내가 본 일렌의 권능은 분명...
"에레쉬키갈. 성녀님은 그녀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폭발로부터 사람들을 지킨 그림자의 방벽. 그리고 마왕의 전조의 재생을 막을 때 사용하려 한 피의 권능.
둘 다 그림자와 피의 여신, 에레쉬키갈의 권능일 텐데. 어째서 다른 여신의 문장이 있지?
"맞아요. 그건... 이쪽에 그려져 있죠."
일렌이 어깨에 묶인 붕대를 풀었다. 거기에 그려져 있는 문양은, 확실히 에레쉬키갈의 것이었다.
'붕대 안쪽에 그려진 문양, 붕대를 감은 곳은 모두 일곱... 설마?'
"복합 신성?"
"역시 성국의 성직자시네요. 바로 맞췄어요."
일렌이 손에 신성력을 불어넣자, 닌후르삭의 권능이 발현되어 주위를 녹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저 역시 어떤 '실험'의 결과물입니다. 내용은... 보시는 대로. 제 몸에는 칠교(七)의 일곱 신의 권능이 모두 새겨져 있어요."
"...용사가 당신을 신경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신의 권능이란 편리하기만 한 능력은 결코 아니다.
그 강대한 힘을 담는 것만으로, 육체에 무시 못할 부담을 주게 된다.
그렇기에 성녀는 선택받은 그릇이라 불리는 것이고,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선 하나의 권능을 담는 것이 고작이다.
'하물며 일곱 신이라니... 아마 저 성녀의 수명은.'
내 표정을 보고 눈치챈 걸까, 일렌이 애써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운명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런 몸이니까 용사님을, 디바인 씨를 도울 수 있는 걸요."
"일렌. 누누이 말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성녀가 아니야."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용사가 입을 열었다.
"일렌, 너다."
"당신의 발목을 잡는 건 사양이에요. 언제까지 가능할 진 모르겠지만, 이 몸이 사그라들 때까지 디바인 씨를 돕는 게 제 사명..."
"아니."
디바인이 똑바로 일렌을 응시했다.
"그렇게 두진 않을 거다. 내가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나기로 한, 그것도 너를 데려가기로 한 이유. 세상을 구하겠다는 그런 두루뭉술한 이야기는 아니야."
"...당신은 용사입니다."
"물론 마왕은 반드시 쓰러뜨릴 거다. 하지만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렌, 처음부터 너였어."
나와 아네모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디바인이 그대로 일렌의 머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디, 디바인 씨? 지, 지금 무슨...!"
"비록 난 보잘것없는 떠돌이 고아 출신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말할 수 있어. 일렌, 넌 성녀일 필요 없어."
"...앞뒤 가리지 않는 말씀을 하시네요, 디바인 씨. 하지만."
용사의 품에 안긴 성녀는 그 누구보다 포근한 웃음을 지었다.
보는 내가 다 부러워질 정도로.
"믿고 있을게요. 제게 있어 디바인 씨는...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고맙군."
저런 모습을 보이는데, 둘이 어떤 사이인지 구태여 물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로제리오 녀석. 성녀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던데.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호아아아아아...!"
아네모네가 입을 아, 벌리며 둘의 애특한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일렌이 다급하게 디바인에게 말했다.
"자, 잠깐만요. 이제 그만 놔주세요, 디바인 씨...!"
"갑자기 왜 그러나, 일렌. 밤마다 이런 식으로 얼굴을 파묻는 건 네 특기잖나."
"디바인 씨! 듣는 사람 오해하겠어요! 아니, 오해는 아니지만...!"
한숨을 푹 내쉰 일렌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아네모네에게 말했다.
"후우. 죄송해요. 이야기가 또 딴 데로 샜네요."
"아니아니, 괜찮아요! 저, 이런 얘기 엄청 좋아해요!"
"그럼, 계속 얘기해 볼까요? 어두운 과거나 성녀의 사명 같은 무거운 게 아닌, 평범한 얘기를. 좋아하는 음식이나 재미있던 추억 같은 걸로 말이에요."
생각했던 것보다, 붕대를 감은 성녀는 평범한 소녀에 가까운 듯하다.
원래부터 그랬다기 보단, 옆에 있는 용사. 저 남자 때문에 변한 거겠지.
'신시아를 만나고 아네모네가 변한 것처럼.'
어쩌면 일렌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같은 처지인 아네모네와 나누고 싶은 소박한 얘기들 일지도 모른다.
그래, 성녀보단 평범한 소녀에 가까운 아네모네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
"저기, 성녀님. 그럼 제 쪽에서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무슨 질문인가요?"
발그레한 얼굴로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며, 아네모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역시, 두 사람은 연인 사이...인 거죠?"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과 똑같군. 차마 말은 못 했는데.
"여, 여, 여, 연인 사이요? 에이, 설마요. 저랑 디바인 씨는 그냥 성녀와 용사 관계..."
"비슷하지."
"디, 디바인 씨?"
"계속 말하지 않았나, 일렌. 나는 너를 경애한다."
"그런 건 연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요!"
해가 산등성이 건너로 저물기 시작한다.
붉어지는 하늘의 색처럼, 두 성녀의 이야기도 무르익어 간다.
* * *
마도 공화국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작은 마을.
타지에서 온 자들이라면 방문할 이유가 전혀 없는 평범한 곳이지만, 지금 이 마을에 와 있는 손님은 특별한 존재였다.
"렉스, 난 잠깐 밖을 살피고 올게."
"조심하세요, 단장."
제국의 기사단장, 올리비에.
그리고 그의 종자이자 제국의 마왕 후보자, 렉스.
베론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어 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들은 잠시 이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슬슬 나오지 그래?"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작은 야산. 그곳까지 걸어 간 올리비에가 허공에 대고 외쳤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검은 로브를 입은 자들.
흑색 마탑의 것이 아닌,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입은 꺼림칙한 색의 로브.
"청색 마탑인가? 그것도 아니면... 마왕 추종자려나. 뭐 어찌 됐든."
올리비에가 장창을 돌려 잡았다.
감히 제국의 인사를 습격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각오는 되어 있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