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그는 변하지 않는다(5)
* * *
신부는 검을 들었다.
흑마법사는 마기를 모았다.
로렌스의 호박색 눈동자가 오웨인을 응시하고,
오웨인의 자수정 마안은 로렌스를 간파한다.
폭풍이 오기 전날의 밤처럼 고요한 방 안.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서로를 예의 주시하는 두 남자의 정적만이 일대의 공기를 긴장시킨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우."
한 번의 심호흡. 그걸 신호 삼아 로렌스는 앞으로 달렸다.
아니, 그건 '터뜨렸다'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눈으로 채 따라가기도 힘든 속도. 로렌스가 내지른 발걸음이 뒤쪽의 공간을 헤집어 놓는다.
겨우 시곗바늘이 한 번 움직였을 뿐인데, 이미 로렌스는 오웨인의 앞에서 검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투콰앙.
뒤늦게 따라온 소리. 귀를 울리는 굉음에 정신을 차린 오웨인은 손을 뻗어 마법진을 펼쳤다.
"상급 보호..."
"늦었습니다."
투웅. 로렌스가 내지른 검이 오웨인의 옆을 강하게 타격한다.
마기를 휘감은 팔로 간신히 막아냈지만, 충격에 머리가 강하게 울려온다.
"쿨럭, 진심이네요, 로렌스 씨."
"그러기로 했잖습니까."
오웨인은 생각했다.
이 자는 지금까지 싸워왔던 상대와는 다르다.
자신의 길을 막는 자라면 그가 누구든, 로렌스는 가차 없이 적을 베어 넘길 것이다.
"흑뢰(?雪)."
그렇기에 오웨인도 마음을 다잡았다. 비록 로렌스를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로렌스를 막아야만 했다.
이건 자신의 욕심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할 길이기도 하기 때문에.
검은 번개가 터져 나온다.
오웨인의 상징. 오웨인만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이든 찢어 발기는 검이자 창이자 화살.
바닥에서, 천장에서, 양 옆의 벽에서.
방 안을 휘감은 검은 번개가 의지를 가지고 로렌스를 향해 다가온다.
"......"
로렌스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궤도조차 예측할 수 없는 저 검은 번개는, 어떤 방향으로 도망치든 피할 수 없다.
마법진은? 그런 건 애초에 없다.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방향성이 다르다.
기존의 마법이 일정한 선과 원으로 구성된 술식에 가까웠다면, 저 흑마법은 몸에 새겨진 주박에 가깝다.
이 검은 번개를 정 멎게 하고 싶다면.
'벨 수밖에 없겠군.'
마기의 원천. 저 흑마법사를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수호성인."
로렌스는 번개를 멎게 하는 것보다, 직접 받아내는 방법을 택했다.
오웨인을 베어낼 자신이 없는 게 아니다. 흑뢰를 몸으로 받아낼 리스크에 겁을 먹은 것도 아니다.
'아직 당신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웨인.'
어째서 흑색 마탑을 배신했느냐. 무엇 때문에 신시아를 납치했느냐.
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품은 거냐. 목적이 뭐냐.
그런 것들을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봐야만 했다.
아니, 하지만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은.
"제 계획이 무너지게 둘 순 없습니다, 로렌스 씨."
검은 번개가 늑대의 형상을 취하며 로렌스에게 파고들었다.
로렌스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보호기, '수호성인'.
찬란한 빛의 방패가 로렌스의 앞에 떠오른다.
흑뢰의 늑대, 광휘의 방패. 둘이 부딪히자 거대한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후우."
연기가 가라앉는다.
흑뢰는 로렌스에게 닿지 못했지만... 방패는 산산이 부서졌다.
모순. 검은 번개는 방패를 뚫지 못했다. 빛의 방패는 번개를 막지 못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수준 차이다. 둘 중 누가 이길지는... 서로도 알 수 없다.
"오웨인. 저는 당신을 쓰러뜨려야 합니다."
"신시아 씨를 위해서, 맞죠?"
"맞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로렌스가 검을 눕혀 들었다.
발걸음이 무겁다. 오히려 잘 됐다. 절대로 뒤로 물러나지 않을 테니.
"당신에게 묻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말에, 오웨인은 미소를 흘렸다.
자신은 배신자다. 지금 당장 로렌스에게 목을 베어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런데도 내게 묻는다고?
오웨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은 비슷했지만, 결코 동류는 될 수 없었다.
"대답할 건 없습니다, 로렌스 씨."
양손에 마기를 가득 담는다.
파지지직. 검은 번개가 공기를 이지러뜨리며 휘몰아친다.
이것이 자신의 대답이다.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전 흑마법사니까요. 아주 사악한."
"......"
로렌스는 눈을 감았다.
쯧. 혀를 차며 그대로 검을 든 채 앞으로 향한다.
그건 오웨인도 마찬가지다. 검은 번개를 두른 몸 곳곳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로렌스를 이길 수 없다고, 그렇게 직감했기에.
"로렌스!"
"......"
검이, 번개가. 다시금 맞부딪혔다.
방 안이 요동친다. 창문이 부서지고, 천장이 무너지려 한다.
그렇게 수십 합. 더 이상 아무런 말 없이 상대의 공격을 받아낸다.
"흑뢰!"
오웨인의 번개가 낭자하고.
"......"
로렌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분히 그 공격을 받아낸다.
힘의 차이는 크게 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어째서, 어째서 그걸 쓰지 않는 겁니까."
입가에 흘린 피를 닦으며, 오웨인이 로렌스에게 물었다.
"단죄. 당신은 그걸 쓸 수 있지 않습니까. 확실하게 저를 포함한 이 방 전체를 베어버릴 수 있는."
최초의 공격. 그조차도 검날이 아닌, 검의 몸통 부위를 이용한 '타격'이었다.
계속되는 공방에 오웨인은 깨달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로렌스는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은 신시아를 데려갔다. 그렇다면 당연히 분노에 몸을 맡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오히려 평온해 보이는군요."
처음 이 방에 들어온 로렌스는 분명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하, 하하. 눈치챈 겁니까? 저로선 당신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오웨인은 자조했다. 크리스라는 성기사, 그리고 성녀 아네모네.
그들과의 전투에서 너무나 많은 마력을 소모해버렸다. 너무나 많은 마법 스크롤을 사용해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 없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을 테니까.
"언제든지 베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까?"
"아니요."
"나 따위에겐 검을 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겁니까?"
"아니요."
"그럼 대체 왜...!"
서로를 눈앞에 둔 대치 상황.
그러나 로렌스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대신 검을 쓸어내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검의 이름은 세바스(안식일)입니다. 죄를 지은 자들을 단죄하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지었죠."
"하핫, 딱 어울리잖아요? 저 같은 사악한 흑마법사를 죽이기엔..."
"한 가지 맹세를 했습니다. 이 검을 뽑을 때는, 명백한 죄인이라고 생각되는 자들만 베어 넘기기로."
오웨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제발 다음 말은, 다음 말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다.
허나 그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로렌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전 아직 당신을 죄인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까득. 오웨인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은 저런 동정 같은 게 아니다. 좀 더 흑마법사답게, 좀 더 악인(?人)에 걸맞은 처사를 받아야만.
오웨인의, 자신의 기분이 풀릴 것만 같았는데.
"으아아아아아!"
검은 마기가 폭주한다. 온몸에 검은 균열이 생기고, 부하를 견디지 못한 신체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이 차올랐다. 지금이라면 저 신부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만 같다.
모든 힘이 손 끝에 모이고, 검은 번개는 거대한 신화 속의 창이 되어.
그대로, 로렌스를 향해 올곧이 나아갔다.
"......후우."
로렌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자 창은 수호성인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성유물에, 세바스에 손을 가져다 댄다. 초록빛을 내며 공명하는 세바스.
새로운 길이 열리려 하는 감각이다.
'처음에 사용할 수 있었던 건 단죄뿐이었다.'
1형, 단죄.
그건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자신을 상징한다.
죄인을 처벌할 누군가가 필요했기에, 로렌스는 단죄를 익혔다.
2형, 수호성인.
그건 수호자로서의 자신을 상징한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기에, 지켜야 할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렇게 로렌스는 수호성인을 익혔다.
그리고 3형.
거창한 이유는 없다. 상징하는 건... 굳이 따지면 화자(?者)일까.
단순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저 남자와, 흑마법사라고 자칭하는 남자와.
이대로는 서로의 손에 피를 묻힐 뿐이다.
'...알베르.'
오래전, 자신과 목숨을 걸고 싸운 옛 친우가 그러했듯이.
그렇기에, 로렌스는 3형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주 조용한 공간.
"3형."
로렌스가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고요의 성역(??)."
땅에, 검을 내리꽂았다.
세바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순백의 공간.
로렌스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던 검은 창은, 아지랑이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이것이 로렌스가 찾아낸 대답이다.
주위의 모든 마법을 무(無)로 돌리고, 마나, 마기, 신성력, 투기. 그 어떤 수단도 사용하지 못하는 순백의 공간으로 주위를 뒤바꾼다.
"하, 하하하하..."
오웨인이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방금까지 자신을 좀먹던 마기도 사라진 지 오래다.
눈을 깜빡인다. 검을 내버려 둔 채, 로렌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퍽.
그의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이건 크리스의 몫입니다."
퍽, 퍽. 계속되는 주먹질에 머리가 흔들린다.
"이건 아네모네, 이건 아나스타샤."
퍼억. 이번 건... 특히나 강하다.
"그리고 이건 신시아의 몫입니다."
그래, 이걸로 된 거다. 오웨인은 자신의 패배를 통렬히 실감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베론, 그자를 막지는 못했지만... 로렌스라면 자신이 못다 한 일을 다하리라 생각한다.
오웨인은 눈을 감았다.
패자에게 합당한 처우를 받기 위해.
......
"뭘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겁니까."
툭. 오웨인의 머리에 닿은 것은 검날이 아니었다.
로렌스의 주먹이, 별로 힘도 실려 있지 않은 주먹이 오웨인의 이마에 닿았다.
"이건 제 몫입니다. 이제 얘기를 할 맘이 생겼습니까?"
"...없다고 한다면요?"
"꺼림칙한 마음을 억누르고 당신을 베어야겠죠."
오웨인이 털썩,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에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전투에 모든 힘을 쏟아서? 아니, 분명 그건 아니다.
"제가 하나 추리해 볼까요?"
"...마음대로."
로렌스가 오웨인 뒤편의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처음 당신이 제국의 후보자를 공격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 당신이 마왕 추종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오웨인이 제국의 인사들을 습격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렉스는 정신을 잃었을 뿐이었습니다. 마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왕 후보자로서의 용도가 될 수 없는' 상태로 말이죠."
만약 습격한 상대가 마왕 추종자거나 청색 마탑이었다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은 사용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아마도 올리비에에게 과한 제압을 한 건 그녀의 능력을 믿었거나... 어쩌면 그녀가 흑색 마탑주를 모욕한 것, 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군요."
"...하핫."
오웨인은 긍정의 웃음을 흘렸다.
자신에게는 간파의 마안이 있는데도, 정작 인과를 통찰해내는 건 자신이 아니라 로렌스 쪽이었다.
"그리고 흑색 마탑에서. 크리스와 아네모네는 쓰러져 있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가지런히 말이에요. 웬만한 응급 조치도 되어 있었고요."
"......"
"정말로 악인을 연기할 생각이 있었던 겁니까?"
로렌스가 문 앞에 도착했다.
아마도 이 건너편에는 신시아와 아나스타샤가 있을 것이다.
"확신을 가진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 방에 오고 나서부터 였습니다."
이단심문관이었던 시절부터, 로렌스는 수많은 죄인들과 생사를 건 혈투를 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오웨인에게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기'. 누군가를 죽이려는 자의 눈빛이.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오웨인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은.
"당신은 베론의 계획을 망치려고 한 겁니다. 그렇죠?"
베론이 노리는 건 마왕 후보자의 힘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후보자에게서 후보자의 '힘'을 일시적으로 빼앗는다면 어떻게 될까?
베론이 구속될 때까지. 후보자들이 마도 공화국을 빠져나갈 때까지.
허나 오웨인의 계획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은 단순한 신뢰를 바탕으로 굴러가지 않기에. 그런 구조이기에.
그렇기에 오웨인은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당신은 분명 올바르지 못한 방법을 사용했지만."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러나 마왕을 추종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렇기에 암약과 모략을 좋아한다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러나 딱히 금기를 탐하는 데 관심을 두진 않는다.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오웨인은 흑마법사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것.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지키는 것.
오웨인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흑마법사건, 악의 혈통이건, 그런 건 처음부터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는 변하지 않는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
"그래, 그게 당신의 표정이군요."
지금 오웨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로렌스는 굳이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앞으로 있을 삶에서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회자 되리라는 것뿐.
"신시아."
"아, 신부님!"
문을 열자 드러난 것은,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고 있던 신시아의 모습이었다.
옆에 있는 침대에는 아나스타샤의 모습도 보인다. 두 사람에게 상처는 없어 보인다.
"기다리게 했네요."
"으응, 괜찮아! 갑자기 오웨인 오빠가 날 묶었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부탁받았으니까. 잠시만 여기 있어 달라고. 미안하다고."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로렌스가 신시아를 끌어안았다.
소란을 눈치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가씨!"
"으음, 카...일...?"
"오웨인. 이 바보 녀석 같으니... 걱정했잖느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마탑주 님."
기사 카일과 마탑주 길버트.
두 사람은 각자의 인연에게 다가갔다.
'이걸로 끝이군.'
오웨인의 계획은 어긋났다. 그럼에도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표정으로, 그냥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 * *
그런데... '그녀'는 어디 있지?
"오웨인, 그녀는 어디 있습니까?"
"그녀, 라뇨?"
"부마탑주 마리엣타 말입니다. 아까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죠? 이미 당신들에게 제압된 것 아닙니까?"
올리비에를 습격한 인형들. 그것들을 조종한 건 분명 마리엣타였다.
그렇다면 마탑 어딘가에 분명 그녀의 모습이.
"아하하하핫! 결국 실패해버렸네요, 오웨인?"
"이건...!"
모두가 있는 방 안에, 어느 여인의 비웃음이 울려 퍼진다.
부마탑주 마리엣타. 분명 그녀였다.
"정말이지, 당신은. 중요한 부분에서 마음이 약해져서 탈이라니까."
"마리엣타?"
천장에 기이한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저 모양은... 거미줄?
"재미없는 연극은 여기까지. 더 이상은 숨길 필요가 없겠네요."
투명한 보랏빛의 거미줄을 타고, 마법진에서 마리엣타가 내려왔다.
그런데... 모습이 다르다. 흑색 마탑의 검은 로브가 아니다. 어깨를 훤히 드러낸 웃옷에, 찢어진 망사로 이루어진 하의.
"마리엣타?"
"어머, 마탑주 님도 계셨네요. 아니, 이제는 이렇게 불러야겠군요."
"그게 무슨...?"
"귀찮은 노인네. 지긋지긋했어."
그 순간이었다. 방을 가득 메운 인형실. 그 실에 길버트도, 카일도, 그리고 오웨인조차도 속박되고 말았다.
일순의 방심이 부른 결과. 어째서 그녀가?
'빌어먹을. 모든 수를 생각했어야 했는데...!'
"마리엣타, 당신은 대체...?"
"푸훗.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신 건가요, 꼬마 도련님?"
상기된 얼굴로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마리엣타가 속삭였다.
"모든 건, '운명'이 흐르는 대로."
'마왕 추종자...!'
어째서 생각하지 않았을까.
'몇 년' 전에 두각을 드러낸 마법사. 그렇다면 가능성은 충분했을 텐데...!
"신시아! 제 뒤로 오세요!"
"신부님..."
신시아가 내 등을 꽉 잡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는 신시아를 저것들의 손에 넘기지 않으리라.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신부 씨."
마리엣타가 허공에 손가락을 그었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뻗어나간 보랏빛 거미줄. 그것이 향한 곳은.
"하읏?"
"아가씨...?"
아나스타샤. 공국의 마왕 후보자였던 그녀였다.
"오웨인, 당신은 실패했어요. 정 베론을 막고 싶었다면, 마왕 후보자를 전부 죽였어야죠."
"거짓말. 거짓말이야...!"
"역시 당신에게 마법사는 어울리지 않아요."
"이런 젠장...!"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뻗는다.
하지만... 신시아를 품에 안고서는, 도저히 아나스타샤에게 손이 닿지 않았다.
인형실에 묶인 아나스타샤가 마리엣타에게 끌려간다.
마치 거미줄에 잡혀버린 백색의 나비처럼.
"이거 하나만 말해둘까요? 당신들은 결코, '운명'을 막을 수 없어."
파지지직. 마리엣타의 뒤편으로 푸른색의 차원문이 열린다.
푸른색. 그렇다면 저 차원문이 향하는 곳은 분명...!
"카일...!"
"아가씨이이이!"
카일이 인형실을 쥐어뜯기 시작한다.
실에 베여 온몸에 피를 흘리는 카일의 모습은...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애써 실을 끊어낸 카일이 아나스타샤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카...이."
지잉. 손이 닿기 직전, 차원문은 아나스타샤와 마리엣타만을 데리고 닫혀 버렸다.
"아나, 스타샤..."
이 방 안에 남은 것은... 무력감과 절망, 후회였다.
허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겠지.
'마왕 후보자를 데려갔다는 건, 다시 말해...'
* * *
"으읏...!"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성국의 성도. 빛의 성녀가 머무는 대성당.
갑자기 밀려오는 현기증에, 빛의 성녀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느낌은 분명 저번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좋지... 않아.'
갈망의 바알. 대륙에 나타난 첫 번째 마왕.
그가 부활했을 때도, 빛의 성녀에게는 똑같은 반동이 찾아왔다.
"...테오도어, 모두에게 알리세요."
"성녀님? 갑자기 무슨 말씀을..."
"두 번째 마왕이... 탄생했다고."
* * *
"용사님, 방금 그건...?"
"...시작됐군."
용사 디바인과 성녀 일렌.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색 마탑을 바라보았다.
청색 마탑의 상층부가 일그러지며, 공간의 틈새에 숨겨져 있던 끔찍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냈다.
마왕성. 마왕이 탄생할 때, 일대의 장소가 통째로 뒤바뀌는 현상.
"디바인! 일렌! 지금 바깥이 뭔가 이상..."
뒤늦게 달려온 스피네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
"...저게 대체 뭐야."
"준비해라, 스피네. 마왕이 탄생할 거야."
스피네의 뒤를 따라 레이크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 넷은 모두 깨달았다. 자신들의 사명을 다할 떄가 왔다는 사실을.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나 빨리. 이건 전개랑 다른데...!"
"정신 차려, 레이크!"
레이크가 손톱을 뜯기 시작했다. 스피네가 그를 다독였지만, 그녀 역시도 다리를 떨고 있다.
일렌은 기도를 드렸다. 디바인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상대해야만 하는 것은 '마왕'이다. 개인의 형태를 한 재앙.
그럼에도 그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목표는 마왕성. 일그러진 청색 마탑을 향해.
"그런데 레이크, 혹시 마왕 후보자가 각성한 걸까? 우리가 만난 여자애가 혹시..."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레이크가 검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왕이 되는 건... 아마도 '그자'일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