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61화 (61/109)

〈 61화 〉 망집의 탑(2)

* * *

"...주인님?"

달빛에 흔들리는 백발. 푸른 마력을 발산하는 사파이어의 눈동자.

베론의 오른팔이자, 한때 청색 마탑의 부마탑주였던 여인.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론이 만들어낸 최고 수준의 소환수.

티니아. 그녀가 눈을 떴다.

"주인...님."

아니, 이미 그녀는 베론의 소환수가 아니다.

자신은 이미 실패해 버렸다. 완벽을 추구하는 베론에게 있어, 자신의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 소환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감응. 마력이 느껴집니다. 방향은, 청색 마탑...?"

이미 마력 연결이 끊긴 지 오래일 텐데, 베론의 마력이 선명히 느껴졌다.

절대 헷갈릴 일은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창조의 마력이기에.

"의문. 베론 님의 마력이 달라졌습니다. 예측, 마기와 흡사, 마왕의 권능. 가설 추론, 베론 님은... 설마..."

그렇기에, 티니아는 그의 변모를 가장 먼저 눈치챘다.

더 이상 대마법사 베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망집에 사로잡힌 마왕만이 남아있을 뿐.

혼란과 슬픔에 빠진 티니아에게 어떤 여인이 다가왔다.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 적색 마탑주, 카레니나.

베론과 길버트의 동기인 그녀 역시 대부분의 사태를 눈치챘다.

"역시, 너도 느끼고 있었구나."

철컹. 티니아를 가두고 있던 감옥의 문이 열렸다.

무릎을 꿇은 티니아에게 카레니나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나오도록 해.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 * *

"여기가 청색 마탑이라고요?"

흑색 마탑주 길버트의 차원문을 통과해 빠져나온 곳은 청색 마탑이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청색 마탑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신부님, 신부님. 이곳, 뭔가 꺼림칙해..."

신시아는, 그리고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회의실로 향하는 문이 있던 대회랑. 청색 마탑의 웅장함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이곳저곳에 있던 바로 그 장소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 참, 끔찍하네요."

"시체로 보이는 것도 있군. 마탑에 잔류한 청색의 마법사인가?"

모든 것이 너무도 변해버렸다.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물건은 반쯤 부서져 파편이 흩날렸고, 마탑의 벽은 마기에 잠식되어 역겨울 정도로 형태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둥.

"검붉은색의 기둥. 이게 근원인가 보네요."

"오웨인.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이 빛의 기둥 전체가 마력 창고입니다. 베론, 그 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창고 말이죠."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마치 '마왕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변모한 마탑.

주위의 마력을 빨아들여 마기로 뒤바꾸는 검붉은 탑.

그리고 머리 위로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

"마왕입니다."

마왕.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버릴 파괴의 재앙.

대륙에 나타날 여덟 마왕 중 하나가 이곳, 마도 공화국의 수도에서 탄생한 것이다.

"설마... 아가씨가..."

공국의 기사, 카일이 어두운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아닐 겁니다, 카일 씨."

"오웨인?"

"전 흑마법사입니다. 마기에 대해서는 알기 싫어도 능통할 수밖에 없죠. 이건 아나스타샤 씨의 마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의...?"

"베론."

나의 말을 받은 자는... 길버트였다.

베론과 같은 스승을 둔 사이임과 동시에, 그의 목적을 알고 있는 유일한 자.

"마기에서 느껴지는 마력 패턴. 베론의 것과 닮았어. 아니, 똑같아."

마왕이란 신화 속에 나오는 종족이나 신이 아니다.

그 근원은 인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말살하는 존재.

마왕의 소질만 있다면,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마왕으로 변모할지 모른다.

"신부님, 나 무서워..."

아니, 신시아는 빼고. 그녀만큼은 절대로 '마왕'이 되지 않도록 막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내 손으로.

"상층으로 올라가죠. 아마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베론이 은거했었던 숨겨진 장소 말입니다."

* * *

"...이 모습은."

"아, 이성을 찾았나요, 베론?"

청색 마탑의 최상층. 베론이 장악한 숨겨진 공간.

한떄는 총명한 기를 발산하던 베론의 눈동자는, 탁한 마기를 두른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담을 뿐이었다.

"역겹군. 추악해. 스승님이 보신다면 어떤 말씀을 할지."

"어머, 당신이 선택한 모습이잖아요? 좀 더 기뻐할 줄 알았는데."

마리엣타의 물음에 베론이 고개를 저었다.

"기쁘다, 라. 설마. 조금도 그런 감정은 들지 않아. 그렇다고 후회가 생기지는 않고. 지금 이 감정을 무어라 하면 종을까."

베론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단지 그뿐인 동작에, 방의 한쪽에 있던 자신의 동상이 폭발하며 무너져 내려졌다.

"힘이 충만해. 대마법사로서 나름 강한 힘을 거머쥐었다 생각했지만... 모든 게 내 착각이었군."

배론이 마리엣타를 돌아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럴 '운명'이 아니었기에. 자신과 같은 어떤 강대한 힘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마리엣타. 자네의 뒤에 있는 자가 누군지 알 것만 같아." "...그런가요?"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외양도. 그 무엇도 모르지만, 본질만큼은 알 수 있겠군."

마왕 추종자 레서, 마왕 추종자 로리안, 마왕 추종자 마리엣타.

그들 모두 공통적으로 언급한 단 하나의 단어.

"운명. 아마도 나와 같은 마왕일 테고. 그렇지?"

"...하핫."

언젠가 빛의 성녀가 로렌스에게 언급한 마왕의 여덟 본질.

갈망, 망집, 환란, 속박, 배격, 투쟁, 타락, 그리고 운명.

북왕국에서 '갈망의 바알'이 강림해, 용사 일행에게 봉인당했다.

그리고 마도 공화국에서 '망집의 베론'이 새롭게 탄생했다.

허나 개연성에 맞지 않았다. 한 시대에 한 명도 태어나기 힘든 마왕이 여덟이나 나타난다니.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뒤에서 유도하지 않는 이상. 가령, '마왕 추종자'를 조직한 자라던가.

"같은 마왕, 이라뇨. 하핫,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요?"

"......"

언제나 상대를 깔보는 미소를 짓는 마리엣타지만, 그녀의 주인을 언급하는 그녀의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그분은 당신과 격이 달라요. 봉인 따위 당하지 않은 고귀한 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힘을 제련하여... 으읍?"

마리엣타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 힘은... '그분'의 의지다. 자신의 방정맞은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경고.

"실례. 너무 말이 많았네요. 그렇죠. 전 제 일을 해야죠."

마리엣타가 손가락 끝에서 인형실을 뽑아내 누군가에게 연결했다.

공국의 마왕 추종자, 아나스타샤. 아직 마왕이 되지 못한 번데기에 가까운 그녀를 조종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지, 마리엣타."

"네, 네. 바쁘니까 빠르게 끝내주실래요?"

"내가 마왕이 되는 것도, '운명'이었나...?"

현명했기에, 지혜로웠기에. 베론은 깨달을 수 있었다.

대륙의 흐름, 마왕의 탄생, 용사의 등장, 결집되는 영웅들.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저들은 적재적소에 나타나 대륙을 혼란으로 이끌었다.

어쩌면 '운명'의 마왕의 진정한 능력은­.

"그야, 당연하잖아요?"

"......!"

"이것만 기억하세요. 모든 건 '운명'의 뜻대로."

깍듯한 인사와 함께, 마리엣타와 아나스타샤가 자리를 옮겼다.

홀로 남은 베론은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운명'이 있는 것인가.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명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 이젠 상관없나."

주먹을 쥐었다. 다시 펼쳤다.

자신의 사상을 바꿀 정도로 강대한 힘. 기존의 자신이 호수였다면, 마왕의 힘은 드넓은 바다와도 같았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바다'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잔'이었다.

"그래, 알겠군. 이제야 알겠어.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베론이 손을 뻗었다. 아직 자신의 소환수와의 마력 연결은 끊기지 않았다.

비록 그는 마왕이나, 여전히 베론이기도 했다.

"호기심. 이 힘으로 어떤 것까지 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스승님을... 살릴 수 있을지."

자신의 힘은 어디까지 통용되는 걸까. 지금 베론의 관심사는 오직 그뿐이었다.

허나 이대로라면 방해꾼이 들이닥칠 것이다. 자신은 '마왕'이기에. 힘을 합쳐 막아야 할 공통의 적이기에.

"벌레들의 날갯짓이 들려오는군."

자신을 막을 자들은 누구인가.

현재 수도에 남아있는 마탑주. 적색의 카레니나와 흑색의 길버트는 자신을 막을 것이다. 같은 스승을 둔 자로서, 현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오웨인. 그 실패작도 마찬가지다. 일족의 원수 따위를 위해 그는 기꺼이 불길로 뛰어들 것이다.

공국의 기사, 성국의 성녀, 제국의 기사단장, 그리고 마왕 후보자.

그리고 그 검은 신부도.

"운명, 운명이라고 했나."

마리엣타의 말을 듣고서, 베론의 눈에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투명한 실과 같은 무언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운명의 흐름'일 것이다.

과거에 만났던 인물들은 모두 그 흐름 속에 있었다.

로렌스. 그자를 제외하고.

"변수는... 제거해야 하는 법이지."

아, 그러고 보니 더 있었지. 자신을 막기로 결심할 벌레들이.

용사. 그리고 그의 일행.

이 세계에 운명이 있다면, 그자들이야 말로 마왕과 맞서 싸울 운명을 가진 자들이니.

베론이 읊조렸다.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기 위해서.

"오너라. 나의 소환수들이여."

* * *

"잠깐! 다들 잠시만 멈추십시오!"

베론이 있을 최상층으로 올라가던 중, 오웨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들을 멈춰 세웠다.

"갑자기 왜 그럽니까, 오웨인?"

"마기의 흐름이 이상합니다. 이건 마치..."

그 순간,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탑 안을 가득 채웠다.

"크롸아아아아­!"

"꺄앗!"

바닥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마수보다도 흉측하고 기괴한 울음소리.

얼마 가지 않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여러 형태로 뒤섞여 비명을 지르는 듯한 합성수(키메라).

마기에 잠식되어 이성을 잃고 살아있는 것을 찾아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마수?"

"아니, 소환수네요. 아마 베론과 함께 실종되었던 것들 중 하나겠죠."

"그럼 빠르게 처리를..."

마수의 뒤편을 목격한 카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마왕을 묘사한 그림에서 보았던 마물의 군세.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재현되었으니까.

크르르르르.

크아아아아­.

취익, 쉬익, 취이익.

"아니, 무슨 놈의 숫자가...!"

"이건 힘들지도 모르겠군."

청색 마탑의 상층부를 가득 메운 마물들.

저들 중 몇몇은 사람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씹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일전에 싸웠던 마왕의 전조가 우스워 보일 정도의 수.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이 나라는...!

"뒤로 물러나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데자뷰가 일기 시작했다.

순은의 섬광과 함께,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모습을 드러냈다.

쉬잉­. 수평선을 긋는 찬란한 궤적.

우리의 눈 앞에 있던 마수는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몸이 무너져 사라졌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먼지가 사그라들고, 그 속에서 금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격에 마수를 베어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검을 검집에 넣는 남자.

용사, 디바인.

"용사? 당신이 여기 있다는 뜻은..."

"디바인! 후방은 전부 처리했어... 어라?"

짙은 보라색 머리의 마녀, 스피네.

만나는 걸로 치면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하지만 지금만큼 이들의 존재가 반가운 적은 처음이다.

'용사가 있다면... 할 수 있어.'

용사. 마왕과 천칭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마왕이라는 재난에 맞설 수 있도록 신이 보낸 마지막 희망.

두 번째 마왕을 공략하기 위해, 용사 일행이 청색 마탑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야, 북적북적하네요~."

"......"

"어쩌면 당신을 구하러 온 걸지도 모르겠는대요?"

"......"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예요? 그럼 섭섭한데."

베론으로 향하는 길목. 최상층의 바로 아래에 있는 드넓은 제단.

그곳에 아나스타샤와 마리엣타가 자리 잡았다.

"곧 있으면 이곳으로 날벌레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

"전 당신과 함께 그들을 막을 거고요. 어머, 어쩌면 당신을 베어 넘기고 지나갈지도 모르겠네요? 비정해라."

"......"

"그리고 그중에는 그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나스타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본 마리엣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카일. 당신의 기사."

"zk...dlf...?"

"드디어 대답해주는 거예요? 감동이어라~!"

"zkdlf, zkdlf, djel dlTdj...?"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그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은 제 뜻대로 움직여야 하니까."

인형을 조종하는 십자 모양의 나무판.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마리엣타가 웃었다.

"그러니까 부디, 이번엔 재미있는 인형극을 보여주길 바랄게요."

마왕 후보자, 아나스타샤.

비극적인 운명의 하수인이, 그녀에게 다시없을 기억을 선사하려 한다.

끊임없는 고독. 그를 통해 아나스타샤를 진정한 '마왕'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녀의 기사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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