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62화 (62/109)

〈 62화 〉 망집의 탑(3)

* * *

있잖아, 카일. 너는 기억나?

네가 나의 기사가 된 그날, 너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맹세했지.

아나스타샤 아가씨, 당신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카일, 너는 알까.

너의 그 작은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나의 삶의 희망이 되었는지.

솔직히 말할게. 나는 무서웠어. 기사가 된 너를 보았을 때 말야.

혹시 변하지는 않았을까. 너는 내가 알던 그 철없는 소년이 맞을까.

얼마가 지나고, 모든 건 쓸모없는 걱정이었던 걸 깨달았지.

네가 가끔씩 보여주는 그 웃음. 손을 가리고 미소를 짓는 그 얼굴.

그 모든 게 사랑스러워서, 나도 그만 웃어버렸어.

카일.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야.

네가 그날 맹세했던 것처럼, 내 곁을 지켜 줘.

내 옆에 있어 주고, 내가 악몽을 꿀 때는 손을 잡아 줘.

네가 있어준다면 난­.

마왕이, 되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이건 그 증표야.

우리가 친구라는 증표. 우리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증표.

그리고 언젠가...

아니, 이건 말하지 않을래.

이것만큼은 꼭 네 입으로 듣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을게. 이 증표에 새로운 의미가 쌓일 수 있도록.

저길 봐. 눈이 내리고 있어.

어린 시절엔 너무나 싫었던 눈이지만, 지금은 가슴이 두근거려.

언젠가 네가 말했듯이, 너와 함께 밖으로 나가 눈길을 걷는.

그런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나날.

그러니까 카일. 난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내가 다가와 주기를. 문을 열고, 내 손을 잡아줄 그 순간을.

* * *

"...읏."

"괜찮습니까, 카일?"

베론의 소환수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중, 기사 카일이 손을 붙들며 멈춰 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부."

"이봐, 거기! 집중해!"

스피네의 앙칼진 말에, 카일이 다시 검을 빼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그의 손에 보이는 것은... 반지인가?

"젠장, 장애물이 너무 많아!"

성검이 빛을 가르고, 성녀의 힘이 전장을 뒤덮는다.

마녀의 마법이 불을 뿜고, 광전사의 검과 창이 적을 부순다.

허나 용사 일행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소환수는 조금도 줄어들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끝이 안 보이는군요."

"베론의 마력이 받쳐주는 이상, 소환수는 끊임없이 재생할 겁니다."

베론의 마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저 마수의 군대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베론의 마력은... 무한에 가깝다.

공기 중에 잔존하는 마력까지 모조리 마기로 바꿔 자신의 것으로 삼을 테니.

"오웨인, 뚫을 방법은 없는 겁니까?"

"있기야 합니다. 하지만 추천드리진 못하겠군요."

"일단 들어봅시다!"

어차피 이대로 계속 가다간 위로 나아갈 수 없다.

검붉은 빛의 기둥으로부터 꾸준히 마력을 공급받는 베론. 그와 맞서려면 최대한 단기전으로 끌고 가야만 승산이 있다.

"소환수를 강제로 전송시키는 겁니다. 마탑의 바깥으로."

"...미쳤습니까, 오웨인?"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마탑의 밖이라면 마력 연결이 약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쓴다면 소환수들을 막을 사람이 없어진다.

통제할 방법이 없는 소환수의 무리는 도시를 휩쓸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테니까.

'적어도 저것들을 막아 줄 사람이 있었다면...'

[신부 오빠?]

그때, 내 머릿속으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네모네. 성국의 붉은 성녀.

"아네모네? 어떻게 제게 연락한 겁니까?"

[신부 오빠가 준 이 꽃 머리핀. 이걸 매체 삼아서 성법을 쓰고 있어요. 처음 해봤는데 잘 되는 것 같아요!]

"크리스는요? 다른 사람은 괜찮나요?"

[네! 언니도 제 옆에 있어요! 그리고 기사단장 님도, 다른 마법사들도 모여 있어요!]

아무래도 큰 착각을 한 것 같다.

이곳은 마도 공화국의 수도. 용사 일행만큼은 아니더라도, 강자의 반열에 든 자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들이라면 이 재앙에 같이 맞서 줄까? 우리의 짐을 기꺼이 같이 짊어질까?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

"아네모네. 성녀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네, 뭐든지요!]

"지금 그쪽으로 차원문을 열 겁니다. 마수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아마 힘든 싸움이 될 거예요. 다치는 사람도 있겠죠."

[...신부 오빠의 말이니까, 뭔가 의미가 있는 거겠죠?]

"길게 설명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네모네."

잠깐의 침묵 끝에, 아네모네가 밝은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맡겨만 주세요! 다른 분들은 마왕을 쓰러뜨리러 가셔야 되잖아요!]

"그럼 그쪽은 맡기겠습니다, 아네모네."

[알겠어요. 아, 대신 안경 오빠에게 말 한마디만 전해주세요.]

안경 오빠라면 오웨인을 가리키는 걸 테고. 아네모네가 그에게 전할 말이란.

[크리스 언니를 다치게 한 건 제가 꼭 갚아주겠다고 말이에요!]

"푸흡."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렇지. 아네모네는 이런 성격이다.

좋지 않은 감정은 지워버리지만, 대가는 확실히 받아내는 시원스러운 성격.

"오웨인. 차원문을 준비해주세요. 제 일행과 다른 사람들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즉시..." "아, 그리고 아네모네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군요."

아네모네. 그 이름을 듣자 오웨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정이 어떻다 하더라도 그가 아네모네를 공격한 건 사실이니.

"크리스를 다치게 한 죄는 꼭 자기가 직접 물을 거라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죄를 묻겠다. 그 속에 담긴 아네모네의 뜻은 명료했다.

자신이 죄를 물을 때까지 절대 함부로 죽지 말 것.

"무릎을 꿇고 사과하기 전까지는, 절대 쓰러져선 안 되겠네요."

"알면 됐습니다."

오웨인이 입꼬리를 올린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보았던 거짓된 표정이 아닌, 모든 걸 내려놓은 남자의 소박한 웃음이다.

"마탑주 님! 마녀 씨! 저를 도와주십시오!

* * *

"후우."

"괜찮으십니까, 성녀 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크리스 언니. 이 정돈 가뿐하거든요!"

한 데 모은 두 손을 풀고, 아네모네는 탑 위를 바라보았다.

원초적인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마탑. 한때 공화국을 떠받치던 다섯 기둥 중 하나는, 전설 속에 나오는 마왕성이 되어버렸다.

마탑의 입구는 막혀 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겠다는 듯, 베론이 일그러뜨린 공간의 벽이 탑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가로막았다.

자신들은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다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볼 뿐.

"저 탑 어딘가에 신부 오빠가, 신시아 언니가 있는 거겠죠. 마왕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로렌스라면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언제나, 로렌스는 언제나 싸워 왔다.

자신이 잊혀진 도시에서 거듭된 죄의 늪에 빠졌을 때도, 로렌스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구하러 와 줬다.

신시아를 구하고, 자신을 구하고, 성국의 성민들을 구하고, 잊혀진 도시의 빈민들을 구하고.

그리고 지금은 타국의 시민들을, 아니, 전 대륙의 사람들을 마왕의 공포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신이시여. 대륙을 굽어 살피는 일곱 신이시여. 부디 신부 오빠를,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세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부디 신들의 은총이 자신들에게 내려지기를, '운명'을 이겨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것이 성녀의 역할이니까.

"...오는군요."

크리스가 손가락을 뻗어 마탑의 앞을 가리켰다.

흑색 마탑을 상징하는 검은색의 차원문. 로렌스가 미리 경고했던 대로, 차원문을 타고 소환수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마왕의 마기를 받아들여 마수로 변모해 버린 소환수들. 허나 마력 연결이 끊긴 지금이라면, 저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저희 또한 지켜주소서."

아네모네가 기도를 올렸다. 잊혀진 도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아네모네는 혼자가 아니었다.

"성녀님, 제 뒤로 물러나십시오."

성국의 성기사, 크리스가 방패를 들었다.

"그래, 저놈들이 전부 베론 그 자식의 물건이란 말이지? 잘 알겠어."

제국의 기사단장, 올리비에가 창을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동기의 업(?)은, 같은 동기가 갚아야 하는 법이겠지."

공화국의 적색 마탑주, 카레니나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왕에게 맞서기 위해 모인 수많은 마법사들.

적색, 청색, 황색, 백색, 흑색. 그리고 그에 소속되지 않은 수많은 자들.

모두가 이 자리에 모였다. 도망친다는 선택은 처음부터 없었다.

"할 수 있어요."

아네모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은 천 년 전과 다르다. 오직 용사 한 명에게 기대어 공포에 떠는 비극의 시대는 지났다.

마왕의 근원이 인간이라면, 그걸 막을 수 있는 자 또한 인간이리라.

"우린, 할 수 있어요!"

성녀의 외침. 그에 맞춰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발을 내디뎠다.

이 나라를, 대륙을 지키기 위하여.

* * *

"로렌스, 잠시 할 얘기가 있다."

베론이 있는 최상층으로 향하던 중,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용사 파티의 일원, 광전사 레이크. 그자였다.

"갑자기 뭡니까, 레이크?"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헛소리라고 치부해도 좋아. 정신 이상자의 미친 소리라고 생각해도 좋고."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당신은 '운명'을 믿나?"

...운명이라. 어딘가의 기분 나쁘게 생긴 마왕 추종자가 생각나는 말이다.

혹시나 싶어 총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두 번 당할 순 없으니까.

"난... 대략적인 흐름을 알 수 있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예언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어떤 기록을 읽어낸 건데... 후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지. 하여튼 말하고 싶은 건 하나다."

미래를 알 수 있다니, 쉽사리 믿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말을 꺼낸 레이크의 표정은 진지했고, 거짓이 없었으며, 간절하기까지 했다.

"지금의 시나리오는, 예정에 없었던 일이야."

"...시나리오?"

"베론의 마왕화는 조금 더 나중에 벌어질 일이었어. 본래는 이 자리에 없는 황색과 백색 마탑주의 지원이 있어야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레이크가 말을 잇는다.

"마왕 추종자에게 납치되었어야 할 마왕 후보자는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신시아였다."

아니, 잘못 판단했군.

헛소리다. 들어줄 가치조차 없는 광인(?人)의 주절거림.

"방금 말은 흘려들을 수 없겠군요."

"잠깐, 로렌스. 그 총은 내려놓고 얘기하자고. 신시아가 대신 납치되었어야 했다는 뜻이 아니야."

"안타깝군요. 제겐 그렇게로만 들려서 말이죠."

이 자가 용사 일행만 아니었다면, 당장 다리에 총알을 쑤셔 박았을 텐데.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예정이 완전히 꼬여 버렸어. 예상보다 더 일찍 베론이 각성했고, 신시아 대신 아나스타샤가 납치되었지. '운명'이 꼬여버린 거야."

"그래, 당신이 봤다던 미래에는 어떻게 되었답니까?"

"우리와 다른 네 마탑주의 활약으로 베론을 처치하지. 신시아는... 당신이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그런데 모든 게 바뀌었어."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애초에 절대 다수의 인간은 미래를 보지 못하니까."

나의 대답에 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두려울 건 없다. 이제까지 불확실한 확률 속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예측되지 않는 미래에서 살아갈 테니까.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레이크가 내게 뭔가를 던졌다.

한손 크기의 작은 송곳. 아니, 말뚝인가?

"...이건?"

"마왕의 힘을 억누르는 말뚝. 일회용이다. 우리 쪽은 아마 필요가 없을 테니까."

"갑자기 이런 걸 주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은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다, 로렌스."

레이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맨 앞에서 달려가던 오웨인이 외쳤다.

"도착했습니다. 이 앞이 상층부로 향하는 통로예요."

공간의 일그러짐이 가장 극심한 곳. 청색 마탑주의 거처.

이 문을 넘어서면... 마왕과 마주칠 것이다. 한때 차기 현자로 지목받던 마법사의 말로(??)가.

'어쩌면 아나스타샤가 있을지도 모르고.'

"모두 준비는 됐지?"

"물론이죠, 스피네 씨. 저도, 디바인 씨도, 레이크 씨도, 다른 모두들도.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어요."

성녀 일렌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스피네가 문을 열어젖혔다.

한껏 긴장되어 잇는 공기의 흐름. 모두가 숨을 죽이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그때.

"마왕 후보자는 그쪽에게 맡기겠다."

아주 조용히, 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왜 그래, 신부님?"

"아니, 아닙니다, 신시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신시아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더니, 그대로 내 소매를 부여잡았다.

신시아의 떨림이 손끝을 타고 내게도 전해져 온다.

"무섭나요, 신시아?"

"솔직히 말하면... 맞아, 신부님.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마기, 나랑은 비교도 되지 않아."

몸을 떨던 신시아가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리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애써 밝게 웃는다.

"헤헤, 바보 같지, 나? 여기가지 와 놓고서 겁을 먹다니."

"아뇨, 신시아. 그렇지 않습니다."

신시아의 손을 맞잡는다. 작고 보드라운 손은 땀으로 흥건하다.

이렇게나 떨고 있는데도 신시아는 내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저도 두렵습니다. 저 앞에 있는 건 마왕이에요.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하지만 신부님, 전혀 떨고 있지 않는걸."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신시아의 앞에선, 언제나 멋있는 신부님으로 보이고 싶거든요."

처음부터 내 목적은 하나였다.

신시아에게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신시아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그걸 위해서라면, 그녀의 길을 막는 모든 걸 치워버릴 것이다. 설사 그게 '마왕'이라 불릴 지라도.

"...신부님은 바보."

"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신부님은 충분히 멋있는걸. 매일 반해버릴 정도로."

"...그거 다행이네요."

술식의 해독이 끝나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마왕으로 향하는 문이.

누군가는 자신의 사명에 따라 이곳에 왔다.

누군가는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또 누군가는 인연이 있는 자의 죄를 함께 짊어지기 위해 왔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을 위해 왔다.

각자만의 뜻을 품은 채, 마탑의 최상층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문 틈 너머로 보인 것은.

"어머, 어머머, 꽤나 많이 오셨네요."

"마리엣타...!"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오웨인."

한때 흑색 마탑의 부마탑주였던, 마왕 추종자 마리엣타.

그리고.

"...아가씨."

"zk...dlf..."

마왕으로 피어나기까지 아주 조금 남은 후보자, 아나스타샤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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