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63화 (63/109)

〈 63화 〉 먼 훗날, 당신이 이르길(1)

* * *

공국의 눈길이 녹기 시작하는 어느 봄날, 너는 평소와는 다른 얼굴로 나를 불렀지.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카일, 손, 내밀어 줘."

등 뒤로 두 손을 모아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너.

살짝 상기된 너의 얼굴을 보니 그만 장난기가 돋아 이렇게 말했어.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정원일을 하던 도중이라 손이 흙투성이입니다. 주실 것이 있다면 다음에 다시..."

"그, 그런 건 괜찮아...!"

저 작은 몸에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는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꾹 참고 손을 내밀었어.

"카일, 눈 감아."

대체 뭘 하려는 걸까. 길가에 핀 꽃이라도 보여주려는 걸까.

당신의 명령이니, 기사인 나는 따를 수밖에.

눈을 감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장갑 위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지.

"이건... 반지입니까?"

"응, 맞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공국에는 어떤 문화가 있어. 특별한 인연을 맺고 싶은 사람에게 반지를 선물하는 것.

그 뜻은 친애가 될 수도, 경애가 될 수도, 우애가 될 수도.

그리고, 순수한 의미의 '사랑'이 될 수도 있었지.

"의미? 어, 그러니까 이건, '앞으로 잘 부탁한다'라는 의미야."

"음, 잘 모르겠네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는 너.

그때 깨달았지. 귀공녀 아나스타샤는, 기사 카일에게 허락받지 못할 감정을 품고 있다고.

당신의 미소가 기뻤지만, 동시에 슬프기도 했어.

너와 첫 번째 친구였던 이름 없는 소년을, 넌 이미 추억으로 남겨두기로 정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준 풀잎 반지를 넌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카일, 장갑 벗어 줘."

"아가씨, 하지만 전 기사입니다. 반지 같은 장신구는 아무래도..."

"됐으니까 얼른!"

당황스러웠지. 왼손은, 아직 왼손만큼은 보여선 안 됐어.

똑똑한 너라면 내 손에 있는 상처를 보면 눈치챌 거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기사와 아가씨의 관계로 남기 힘들어질 테니까.

"후우, 알겠습니다, 아가씨."

"...에헤헤."

곧 바스러져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던 네가 환히 웃는 모습을 보자, 내 마음도 따뜻한 기운이 퍼지네.

눈을 녹이는 3월의 햇살보다, 나에게만 보여주는 너의 미소가 더욱 싱그럽게 느껴져.

오른손의 검지에 끼운 조그만 반지. 그걸 바라보며 너는 고개를 숙여 작게 웃었지.

"자, 됐습니다."

"후훗, 잘 어울려, 카일."

손을 마주하고 수줍게 웃는 너는, 우물쭈물거리며 내게 손을 뻗었어.

가녀린 손가락을 애써 들면서 말이야. 그 뜻은... 명확했지.

"저기, 카일. 나도 끼워 줘."

"뭘 말씀이십니까?"

"반지 말이야. 지금 나, 끼울 힘이 없으니까..."

아나스타샤, 너는 알까.

거짓말을 할 때의 너는 항상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자, 손을 이쪽으로."

"...꿀꺽."

검지, 중지, 약지, 소지.

어느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져.

네가 원하는 손가락이 어디인지는 대강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난 너의 기사니까.

'그럼 소지(小?)에, 약속의 의미로...'

내 뜻을 알아챈 걸까, 너는 손을 움직여 위치를 바꿨지.

"흠흠."

"...아가씨?"

"자, 어서 해 줘, 카일. 손 떨어지겠어."

그 차가웠던 어린 여자아이가, 어떻게 이런 말괄량이가 되었을까.

뿌듯함을 느끼며, 추억을 회상하며. 배덕감을 억누르고, 내 나름대로의 진심을 담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응, 물론이야."

아나스타샤, 당신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습니다.

* * *

베론에게 향하는 최상층의 문 앞.

그곳을 지키고 있는 자는 마왕 추종자 마리엣타, 그리고 마왕 후보자 아나스타샤였다.

"음, 이렇게나 많이 몰려온 건 예상외인데 말이죠."

"마리엣타, 또 그 가증스러운 미소를 짓는군요."

"아하, 아하핫. 설마 그런 말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오웨인? '왜 나를 속인 겁니까' 같은 싸구려 연극 대사를?"

그녀의 말을 들은 오웨인이 손에 검은 번개를 모았다.

하지만 그 힘은 너무나 미약해 보인다. 크리스와, 나와 싸운 데다 청색 마탑을 돌파하며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해버린 탓이겠지.

"진정하십시오, 오웨인. 아무리 당신이 끊임없이 마기가 샘솟는다 해도, 몸이 버티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굳이 오웨인이 나서지 않아도,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나, 신시아, 카일, 길버트, 그리고 무엇보다 용사 일행이 이쪽에 있다.

이 정도라면 저 둘을 제압하는 것쯤은 무리 없이...

"해볼 만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마리엣타가 고혹적인 웃음을 내짓는다. 마치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안타깝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마리엣타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 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검붉은 기둥이 강한 마력을 휘감으며 마탑 전체를 울렸다.

"꺄앗!"

"제 손 잡으세요, 신시아!"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마리엣타가 말을 이었다.

"아아, 드디어 시작이네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화선(?火?)에 불이 붙고 말았어요."

...도화선? 저 검붉은 기둥이?

대체 베론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단 말인가.

내 의문에 답이라도 하려는 듯,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마탑 전체에 울려 퍼졌다.

[불청객이 왔군. 환영하네, 나의 오랜 친우여.]

"...베론? 자네인가?"

[베론, 베론이라... 길버트, 자네는 아직 날 그렇게 불러주는군.]

베론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그는 '인간'이라는 껍질을 허물었기 때문에.

"더는... 돌아올 수 없는 거겠지?"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후우. 베론, 난 자네를 막겠네. 한때나마 같은 스승을 두었던 자의 인연으로써."

[그게 자네의 뜻이라면. 하지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청색 마탑을 관통하는 검붉은 빛의 기둥. 그 기둥이 점점 굵어지며 주위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길버트, 자네라면 이미 마력의 흐름을 읽었겠지.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는 건, 불안을 조금이라도 종식시키기 위함인가.]

"...자네는 악취미야. 설마 그런 걸 만들다니."

저 빛의 기둥에 무언가 있는 건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지?

"마탑주 님, 방금 말씀하신 건 대체..."

"...폭탄일세."

길버트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주위의 마력을 모조리 빨아들여 몸집을 더욱 키우고 있는 기둥을.

"청색 마탑, 그 자체를 폭탄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지. 간단히 계산해도, 수도 전체가 폭발의 범위에 포함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대마법의 시전자, 베론을 죽이는 것. 단지 그뿐일세."

길버트의 말이 끝나자, 그의 앞에 검붉은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일전에 보았던 청색 마탑의 차원문과 흡사한 모습. 하지만 색이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자네를 초대하지. 그리고 다른 이들도.]

"......"

용사. 베론이 부르는 건 그들임이 분명하다.

디바인이 허리춤에서 성검을 빼들며 담담히 얘기했다.

"내 이름은 디바인. 과분하게도, 용사라는 무거운 이름을 지고 있다."

[날 막는 게 자네의 책무겠지? 나쁘지 않군. 시험해보고 싶어 졌어.]

검붉은 차원문이 더욱더 크기를 키웠다.

마치 자신이 있는 자는 목숨을 걸고 들어오라고 하는 것처럼.

[마왕은 용사에게 쓰러질 '운명'인 건가. 그걸 말일세.]

"베론. 당신과 마주하기 위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뭐든지.]

"너의 '본질'은 무엇인가?"

본질.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세계.

때로는 성격이, 때로는 가치관이, 때로는 세상 그 자체가 되어 개개인을 결정짓는 단 하나의 개념.

또한, 마왕을 상징하는 수식언이 되기도 하는 단어.

[망집.]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속에서 참을 수 없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마치 마왕 후보자들이 사용했던 '진언'을 듣는 것처럼, 온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망집, 망집이라. 알겠다."

그러나 용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굳건히 검을 세우고, 출정에 나서는 기사처럼 앞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우리는. 당신의 망집을 끊겠다."

디바인의 발걸음에 맞춰, 다른 일행들도 하나 둘 차원문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신들이시여, 부디 저희를, 모두를 지켜주소서."

"괜찮아! 이미 한번 해봤잖아! 다들 힘내자!"

성녀 일렌과 마녀 스피네가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레이크가 발을 내딛으며 내게 말했다.

"한 번 더 말하겠다, 로렌스. 그쪽은, 잘 부탁한다."

용사 일행이 모두 베론에게 향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흑색 마탑주뿐.

오웨인이 뭔가를 말하려 하자, 길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웨인, 널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넌 무서운 눈빛을 품고 있었지. 복수를 품은 눈빛을."

"...그렇습니까."

"그 대상은 베론이었지? 그렇게나 티를 내니 모를 수가 없더군."

길버트가 돌아와 오웨인의 어깨를 짚었다.

"하지만 넌 더 이상 증오를 내비치지 않았다. 나와 베론이 동문이었다는 말을 듣고서. 날 배려해 준 것이겠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마탑주 님."

"역시, 넌 처음부터 친절한 아이였던 거야."

"설마요. 전 흑마법사..."

오웨인의 멋쩍은 대답을 길버트가 가로막았다.

"아니, 넌 너다. 네 혈통이 어찌 되었든, 지금의 네 삶은 너만의 것이지."

"...명심하겠습니다."

"자, 선택하거라, 오웨인. 나와 함께 복수를 이루러 갈 건가?"

오웨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도 그의 복수심은 어렴풋이 눈치챘기에,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뭐라고 할 마음은 없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아니요, 전 가지 않겠습니다."

오웨인의 눈빛 끝에 걸린 것은 마왕 추종자 마리엣타, 그리고 그녀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이었다.

"아직 제 업을 마무리짓지 못했으니까요."

오웨인의 대답을 들은 길버트가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언제나 수많은 짐을 얹은 듯 피곤해 보였던 얼굴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우러나는 기쁨으로 말이다.

"다행이군, 오웨인. 정말 다행이야. 이걸로 나도, 진심으로 임할 수 있겠어."

"마탑주 님?"

"오웨인. 흑색 마탑으로 돌아가면 내 방 서랍을 살펴보게. 편지가 한 통 놓여 있을 거다."

"훗, 나중에 본인 앞에서 읽어드리면 볼만 하겠네요."

그만의 인사법으로, 오웨인은 자신의 고용주를 떠나보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와도 같은 누군가를.

"네네~, 이걸로 저희들만 남았네요, 그렇죠?"

"착각하지 마시길, 마리엣타. 저희끼리면 충분하다 생각되었기에 응한 겁니다."

"아핫, 아직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건가요, 도련님?"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다. 용사 일행과 흑색 마탑주가 마왕을 막아주기를.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리엣타, 당신을 막겠습니다."

"아가씨를 돌려받겠다."

마리엣타를 배제하고, 아나스타샤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것.

"zkdlf... djel...?"

"신부님, 아나스타샤 언니가 말하고 있어. 카일 오빠를 만나고 싶다고,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야."

신시아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힘을 봉인하는 로자리오를 조심스레 빼내 주머니에 넣고는, 심호흡을 크게 가다듬으면서.

"나 말이야, 계속 언니를 걱정했었어. 언니랑 나는 남 같지 않았으니까."

등 뒤로 검은 날개가 피어오른다.

공중에 떠도는 검은 깃털이 일대의 흐름을 뒤바꾼다.

"둘 다 원치 않는 힘을 품고 있고, 어둡고 쓸쓸한 공간에서 자라왔으니까."

신시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똑같고. 엄청 둔감하고 고지식하지만,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람을."

"tlstldk...?"

"응, 맞아, 언니. 나야, 신시아. 성국의 견습 수녀, 신시아 생크 프랑."

마왕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단 둘뿐이다.

천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태어난 용사거나, 혹은­.

"그러니까 언니, 미리 사과할게. 조금 아플지도 몰라."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는 마왕이거나.

"rjrwjd하지 마, 꼭 언니를 rndnjs해 줄 테니까. 나랑 신부님이. 오웨인 씨랑... 카일, 당신의 rltk님이 말이야."

신시아가 완전히 마왕의 힘을 해방했다.

가장 마왕답지 않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카일, 어쩌면 당신은 그렇게 불운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등 뒤에서 세바스를 꺼내 들며 그에게 말했다.

"당신들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신부."

쿠구궁. 바로 위층에서 거대한 굉음이 일기 시작했다.

이미 용사는 마왕과의 싸움에 접어들었다. 공화국의 사람들을, 세계를 구하기 위해.

반면 우리는...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하지만 이 싸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도 소중한 일이 될 수 있기에.

"시작하죠. 아나스타샤를 구하기 위해."

이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때다.

마도 공화국에서의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마침표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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