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먼 훗날, 당신이 이르길(2)
* * *
"뒤로 물러서지 마! 전선을 지켜!"
한때 청색 마탑이라 불렸던 건축물의 앞.
그림에 그려져 있던 마물의 군세가 재현되어, 일그러진 차원문을 통해 끊임없이 빠져나오고 있는 전쟁터.
누군가의 애절한 외침도, 함성과 비명 소리에 묻혀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다.
"꺄앗!"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콜록, 괜찮아요, 크리스 언니."
성국의 붉은 성녀, 아네모네.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그녀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꺼림칙해. 너무나 끔찍한 기운이야.'
그녀의 직감이 말했다. 저 끔찍한 마왕성 어딘가에 로렌스와 신시아가 싸우고 있을 거라고.
자신은 함께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나중에 돌아올 소중한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더 힘내야 해.'
로렌스와 신시아가 걱정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들이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
피를 닦은 손가락 끝은 너무나도 붉다.
그리고 '붉음'은 그녀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전쟁에 나선 전사는 피를 흘리고, 전쟁터에는 피가 고이는 법이니.
이런 난전이야말로, 그녀가 가진 '피의 권능'을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여신이시여. 피와 그림자의 여신, 에레쉬키갈이시여."
아네모네가 두 손을 모았다.
기도를 올리는 곳은 여신이되, 축복을 바라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대의 발 밑에, 저의 옆에 있는 모든 이들을 지킬 기적을 내리소서."
그녀의 기도와 함께, 하늘에 거대한 피의 문장이 떠올랐다.
여신 에레쉬키갈의 상징. 그 상징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핏빛의 벽.
차원문을 타고 몰려오는 마수들의 무리가, 성녀의 권능에 여지없이 막힌다.
"이 틈이에요! 부상자를 뒤로! 싸울 수 있는 자는 전열을 채워 주세요!"
어째서일까. 자신은 이런 성격이 아닌데.
좀더 유약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호받는 것이 당연한 나이일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
지금의 아네모네는 그것을 구별할 수 있었다.
"성녀님..."
"이봐, 성기사 씨. 당신네 성녀, 생각한 것보다 더 당찬데?"
제국의 기사단장, 올리비에가 검은 재가 묻은 창을 털며 말했다.
"그야 물론입니다. 이미 성녀님은... '성녀'라 불릴 자격을 갖추셨으니까요."
"성국의 우상이 저렇게 나서는데, 나도 가만있을 순 없지."
올리비에가 창을 바로잡았다.
비록 이 자리에는 자신의 활약을 지켜봐 줄 종자가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간다!"
투기가 실린 창끝의 움직임에 따라, 올리비에의 전신이 창과 함께 앞으로 출두했다.
투웅. 벽을 뚫고 넘어가려는 마물의 머리에 그녀의 창이 닿았다.
창은 움직임을 멈췄으나, 그녀가 창에 담은 투기는 멈추지 않고 궤적을 이어나간다.
이윽고 순식간에 마수의 몸이 터져나간다. 꿰뚫지도, 후려치지도 않고 단지 닿았을 뿐인데도.
제국의 기사단장이 내지른 창은 목표가 있었던 공간과 함께 모든 것을 꿰뚫어 날려버린다.
"...이것 참."
올리비에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번의 출두에 수 마리의 마수가 휩쓸려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봐 버렸기 때문이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자욱한 먼지가 사그라들고, 저 멀리 흐릿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쓰러뜨린 것보다 더욱 많은 수의 마수가, 차원문을 비집어 열고 밖으로 빠져나오는 모습을.
"이럴 수가...!"
"끝이 없잖아. 청색 마탑주는 대체 무슨 짓을..."
절망적인 상황. 그럼에도 아네모네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흙이 잔뜩 묻은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모두가 바라 마지않던 말을 외친다.
'생각해, 아네모네. 이 상황을 헤쳐나갈 방법을. 신부 오빠라면 어떻게 했을까, 신시아 언니라면?'
아네모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 이 자들은 전부 자신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해내야만 한다. 그 생각이, 아네모네의 심장 고동을 더욱 빠르게 했다.
그리고.
"하늘을 봐!"
누군가가 소리쳤다.
"카레니나 님이시다! 적색 마탑주 님이셔!"
"그리고 옆에 있는 건... 청색 부마탑주?"
아네모네도 그들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적색 마탑주 카레니나. 베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마법사이자 마도 기사단의 단장.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자는... 면식이 있는 자다.
"꼴이 말이 아니네, 다들."
"흥, 이 나라의 마탑주들은 전부 저런 성격인 건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려오는 카레니나에게 올리비에가 비아냥거렸다.
그 옆에 있는 푸른 눈의 여인을 경계하며.
한때 청색 마탑의 부마탑주였으며, 그와 동시에 마탑주 베론의 오른팔에 가까운 소환수.
그러나 지금은 버림받은 인형에 불과한 여인, 티니아.
그녀가 카레니나를 따라 이 전장에 도착했다.
* * *
"자, 즐거운 인형극의 개막이랍니다."
마리엣타의 손가락 끝에서 보랏빛의 실이 퍼져나간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인기척의 정체는.
"흥, 이런 걸 숨기고 있던 겁니까, 마리엣타."
인형이다. 가죽이나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닌, 실제 사람의 사체로 만든 인형.
미처 청색 마탑을 빠져 나가지 못한 마법사들, 그리고...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인물들로 만들어진 인형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솔직히 말할게요. 역겹습니다, 마리엣타."
"어머, 당신이랑 별반 다를 거 없답니다? 누구나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는 법이잖아요?"
마리엣타의 손가락에 따라 인형이 고관절을 꺾어대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원정 중 실종된 고위 기사, 이름난 서연방국의 전사, 거기에 이단심문관으로 보이는 인형까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역겨운 취미로군.
"로렌스 씨, 카일 씨. 제 말 잘 들어주세요. 마리엣타에 관한 겁니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습니까?"
"마리엣타는 인형술의 대가입니다. 부마탑주가 되었을 때엔, 흑색 마탑의 그 누구도 인형술로는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마탑주 님조차도."
흑색 마탑은 강령술과 인형술의 본토라고 들었다.
이미 사전에 인형술을 사용해 왔던 그녀가 흑색 마탑의 마법까지 훔쳐냈다면, 결코 쉬운 상대가 되지는 않으리라.
"인형술은 도구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사전에 얼마나 뛰어난 인형을 제작했느냐에 따라 전투력이 갈릴 정도죠."
"인간의 사체를 그대로 때려박았으니, 품질 측면에선 말할 필요도 없겠군요."
말 하고 있는 사이에도 인형 하나가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들고 있던 세바스로 튕겨냈지만, 인형이라 할 지라도 그의 검은 매섭고 묵직했다.
"하지만 인형술에도 약점은 있습니다. 시전자와 인형을 연결하고 있는 마력의 실을 끊어버리는 것. 인형사 본체의 전투력은 비교적 약하기에, 두 분의 실력이라면 힘들이지 않고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애초에 마리엣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대상의 생명을 신경 쓰지 않고 배제하라는 명령은, 과거에 이단심문관이었던 나에게 있어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아나스타샤다.
"아가씨는,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아직 마왕이 된 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보 직전이군요."
아나스타샤는 마리엣타에, 그리고 베론에 의해 강제로 마왕으로 개화하였다.
베론이 마왕으로 각성한 것도 그녀가 마왕의 힘을 각성한 영향이 컸겠지.
이미 신시아의 폭주를 경험하던 나지만, 다른 형태의 마왕은 여전히 당황스럽다.
"오웨인, 당신이 사용하던 '그걸' 사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거라면 마왕 억제 술식 말씀이십니까? 무리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변모를 막는 것이지, 이미 변한 대상을 되돌리는 마법이 아닙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단단한 무언가가 손에 짚인다.
용사 일행 중 한 명, 광전사 레이크가 맡기고 간 봉인의 말뚝.
이걸 사용한다면 해볼 만한 도박이겠지만...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카일, 오웨인. 아나스타샤를 무력화시켜 주세요."
"마리엣타와 인형들을 상대하면서 아나스타샤를 제압해라, 란 말씀이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리한 부탁을 하시네요."
"해보겠습니다. 아니, 해야만 합니다."
마리엣타의 인형실에는 아나스타샤도 묶여 있다.
어떻게든 저 실만 끊는다면, 아나스타샤는 잠시간 행동을 멈출 것이다.
"뭘 그렇게 쫑알거리고 있는 걸까요, 당신들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리엣타."
오웨인의 검은 번개가 그의 몸을 감싼다.
"당신 험담입니다. 이 늙어빠진 추녀."
"어머,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고 싶은 건가요?"
마리엣타가 손을 움직여 인형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육체라곤 생각하기 힘든 각도로 공격해오는 인형의 무리들.
허나 그들이 이미 '죽은' 자라면, 나도 더 이상 거리낄 필요는 없다.
"신시아, 모두들! 잠시 엎드리세요."
성유물의 형태는 소유자와의 공명 단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분화된다.
내가 깨우친 최초의 형태. '검'의 형태를 띈 세바스와 가장 잘 어울리는 기술.
"단죄."
시야의 가장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내가 인지한 공간 전체에 가상의 수평선을 그어낸다.
무언가를 베고, 자르고, 끊어내기에 적합한 기술, '단죄'.
검 끝의 궤적을 따라, 대다수의 인형이 조각나 힘 없이 쓰러졌다.
"흐음, 그래도 마냥 피라미만 모인 건 아닌가 보네요."
"신부님은 피라미가 아니야, 아줌마!"
"이, 이 버릇 없는 꼬맹이가...!"
신시아의 도발에 넘어간 마리엣타가 손을 움직인다.
방향을 바꿔 신시아를 향해 돌진하는 인형들.
"신시아!"
"괜찮아, 신부님. 이 정도 쯤은!"
검은 날개가 신시아를 감싼다. 한 쌍의 날개가 견고한 방패가 되어 검과 도끼를 막아낸다.
이미 여러 번의 싸움을 거쳤기에, 신시아의 전투 센스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흩날려. 마구잡이로 터져버려."
신시아의 주위로 검은 깃털이 흩날린다.
하나 하나가 짙은 마기를 품고 있는 초소형 폭탄. 깃털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주위의 인형을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지금입니다, 다들 앞으로!"
인형을 헤치고 앞으로 나간다. 팔을 베어내고, 머리를 떨어뜨리며.
수가 줄어들수록 움직임이 더욱 정교 해졌지만, 그래 봤자 인형일 뿐.
한때 저 자가 기사였든, 전사였든, 이단심문관이었든. 의지 없이 움직이는 인형에 전투의 기교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치잇."
마리엣타가 입을 열어 영창을 시작했다.
인형의 목덜미에서 빛을 발하는 마법진. 올리비에를 습격했던 폭발 마법진과 같은 모양이다.
"그건 안 되죠."
아네모네의 영창에 맞춰, 오웨인도 손가락을 들어 마기를 조작한다.
충돌되는 술식. 반발하는 마력.
인형의 머리가 수 차례 돌더니, 그대로 툭, 하고 부러져 바닥에 떨어진다.
"다 쓴 장난감은 터뜨리려 한다니, 여전한 악취미네요."
"여유 있는 척하는 건가요? 우스워라."
"아니, 여유 있는 척을 하는 건 그쪽이겠죠."
뭔가 이상했다. 마리엣타는 인형을 조종하며 단 한 번도 '그녀'를 사용하지 않았다.
마왕 후보자, 아나스타샤. 마리엣타의 수중에 있는 인형 중 최고의 성능을 자랑할 그녀를 말이다.
"로렌스 씨, 저게 인형술의 두 번째 단점입니다. 자유 의식이 있는 생물을 조종할 땐, 그만큼 큰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법이죠. 더군다나 그 대상이 마왕에 가까운 존재라면..."
"마리엣타는 아나스타샤를 온전히 조종하기 힘들다, 그런 뜻이군요."
우리의 말을 들은 마리엣타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인형을 다루지 못한다는 말은, 인형사인 그녀에게 있어 가장 모욕적인 언사일 테니까.
"흣, 흐흣, 그래, 알겠어요. 인정하죠. 이 아가씨는 제 힘으로도 조작하기 쉽지 않아요."
고개를 내려 쿡쿡 웃으며, 마리엣타가 한손에 묶인 실을 모두 뜯어내기 시작했다.
실에 베여 손에 피가 흥건히 묻었음에도, 마리엣타는 광소를 멈추지 않는다.
"쓸모 없는 인형은 버려야 하는 법이죠."
"기이이이이..."
사체로 만든 인형이 힘 없이 바닥에 고꾸라진다.
마기가 빠져나가자, 인형은 썩은 고깃덩이로 변해 바닥의 얼룩이 되었다.
"자, 당신 차례랍니다, 아나스타샤."
"dkvk... zkdlf..."
인형실이 아나스타샤의 몸을 옭아맨다.
머리를 짚으며 우리를 바라본 아나스타샤의 눈동자는, 끔찍할 정도로 붉었다.
"아가씨...!"
"진정하세요, 카일. 이성을 잃으면 안 됩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마왕이 된 것이 아니라면, 아나스타샤는 충분히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
"신시아, 잠시 얼굴을 보여주시겠어요?"
"알겠어, 신부님."
생각해라. 수도 없이 폭주한 신시아가 어떻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는가.
신부님이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내가 마왕으로 변해도, 로렌스 오빠는 날 구하러 와줄 거니까.
그게, 신부님 얼굴을 볼 때마다 입맞춤을 한 게 생각나서...
언젠가 신시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감정. 마음의 변화. 필요한 것은 인상적인 기억.
마왕이 아닌, 아나스타샤 본인의 기억을 일깨워 줄 누군가.
"바로 당신입니다, 카일."
아나스타샤가 연모하는 상대. 아나스타샤가 그리워하는 상대.
그녀의 호위 기사, 카일.
지금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
"아나스타샤를 막을 유일한 사람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