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계속을 바라는 소망
* * *
"꽃이 보고 싶어."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봄날.
어째서일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어.
"꽃... 말씀이십니까?"
"응. 알록달록한 꽃. 그게 보고 싶어."
대륙의 북쪽에 있는 공국은 겨울이 기니까.
봄이라곤 해도 꽃이 피어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카일, 네가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만, 나이 답지 않은 투정을 부리고 말았지.
"흐음, 꽃, 꽃이라..."
'지금 꽃을 보러 가는 건 무리입니다, 아가씨' 같은, 그런 평범한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내게 답했지.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너는 방문을 열고 나갔어.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황혼의 시간.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너를 걱정하며 난 내 손을 뜯었어.
괜한 부탁을 한 걸까.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한 걸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네가 들어왔지.
"기다리셨습니다, 아가씨."
어디를 다녀온 건지, 흙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말이야.
"카, 카일? 괜찮아?"
"별 거 아닙니다. 아, 그리고 이걸..."
네가 내게 내민 붉은색의 꽃. 나만큼이나 작고 여린 꽃.
설국화. 공국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의 이름이야.
"카일, 내가 했던 말은 그냥..."
장난이었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이 너무 반짝여서 말이 나오지 않았어.
"카일, 잠깐만 무릎을 꿇어 봐."
"이렇게, 말씀이십니까?"
어느덧 부쩍 키가 커져버린 카일.
이제 네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할 지경이야.
까치발을 들어도 네에게 입맞춤할 수 없어.
하지만 네가 무릎을 꿇어 준다면.
쪽.
"아, 아가씨?"
"이건 포상이야, 카일. 고마워. 내 투정을, 기쁘게 들어줘서."
"그래도 이런 짓은 곤란합니다. 전 일개 기사일 뿐, 이런 걸 바라지는..."
흐흣, 카일. 얼굴이 완전 새빨개졌어.
바보, 역시 넌 바보야. 내 마음도 눈치채지 못하는 바보.
날 미소 짓게 한 건 꽃 한 송이가 아니라, 밝게 웃는 너의 얼굴이니까.
"흠흠, 그러니까 행동을 삼 가주셔야 합니다. 알겠죠?"
"네에."
"건성으로 대답하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너에게 받은 이 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될 정도야.
고급진 화분에 꽃아 둘까. 얼려서 방 안에 장식할까.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방법이 하나 떠올랐지.
"카일, 이 꽃, 말려도 될까?"
너의 노력을, 너의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해서.
하지만 너는 이렇게 말했지.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가씨."
"어, 어쨰서?"
조금 섭섭했던 내게, 너의 다음 말은 달콤하기 그지없었지.
"다음엔 아가씨를 직접 꽃밭으로 모시고 갈 거니까요."
언젠가 널 바깥으로 데려다줄게.
"......"
"그러니까 그 꽃은 그냥 두셔도 됩니다. 꽃밭에는 더 아름다운 꽃이 한아름 있을 테니까요."
"카일은 바보."
"네, 아가씨?"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나는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맞아, 네 말대로야. 봄이 오면, 너와 함께 꽃을 보러 갈 테니까.
그러니까 기다릴게. 네 손을 잡고 꽃밭 속으로 들어갈 그날을.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장면이 떠올라.
아름다운 꽃으로 둘러싸인 너와 나. 싱그러운 향기에 취한 우리.
난 꽃점을 보고, 넌 내게 꽃다발을 만들어 주고.
봐봐, 지금도 꽃이 피었어.
너무나 아름다운 꽃이.
* * *
"봐봐, 카일. 꽃이... 피었어..."
"...그렇네요, 아가씨."
아나스타샤가 카일에게 손을 뻗었다.
마치 자신을 안아달라는 듯이 애처롭게.
하지만 카일은, 우리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네요."
우리가 있는 층 전체를 가득 메운 가시덩굴.
이미 이곳 자체가 그녀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이 자리에 피어난 것은 꽃 같은 것이 아니라...
"끔찍한 괴물이군요. 꽃 모양의 마물은 많이 봤지만, 저런 형태는 처음입니다."
오웨인의 말대로다. 저것은 꽃보다는 식인 괴물에 가까울 지경이다.
암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고, 뿌리 대신 촉수가 자라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주의해야 할 건 역시."
"아나스타샤의 뒤에 있는 거대한 꽃. 분명 저것이겠죠."
모든 걸 잡아먹을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는 거대한 꽃봉오리.
마력을 빨아들여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저것 앞에, 오웨인의 공격은 모조리 무(無)로 돌려졌다.
'거기다 이 독(?). 방 전체가 독으로 가득 찼어.'
아나스타샤가 내뿜는 독은 대상자를 천천히 죽음으로 인도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간 우리가 불리해진다.
"인질을 방패로 내세우다니, 일말의 자존심도 없는 겁니까, 마리엣타."
"어머, 무슨 말씀을. 인형사가 인형의 뒤에 숨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마리엣타가 아나스타샤를 조종하는 이상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나의 신성력도, 신시아의 마기도, 오웨인의 마법도, 카일의 투기(?)마저도.
"하아, 하아."
"신시아. 마왕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신부님! 난 괜찮아. 오히려 나보단 아나스타샤 언니가 더 힘들 테니까."
이미 모두가 지쳐 있다. 연속된 전투로 누적된 피로는 우리를 좀먹고 있다.
'사용할 틈은, 보이지 않나.'
단 한 번. 잠깐의 틈새만 있다면, 레이크에게 받은 말뚝을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자, 아나스타샤. 저 자들에게 고통을 선사하세요. 고통에 몸부림쳐 죽어가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는 거예요."
"꽃... 데려... 아름다운..."
식인꽃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든다.
베어도, 베어도 다시 재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놔두면, 독을 품은 폭탄으로 변해 그 자리에서 폭발한다.
어쩌면 그녀의 마왕의 힘은 가장 악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읻다.
먹잇감을 천천히 말려 죽이는, 독을 품은 식충 식물. 그녀의 마왕의 령태는, 상대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데 특화되어 있으니.
'하지만 뭔가 다르다.'
카일. 그녀의 기사.
그에게만큼은, 아나스타샤는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고 있다.
한 줌 밖에 남지 않는 이성이 카일을 보호하고 있는 건가. 아니, 어쩌면 본성으로 그를 공격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가씨. 부탁입니다. 제발, 제발 그런 슬픈 얼굴은 하지 말아 주세요."
"카...일..."
카일의 애원에도, 아나스타샤는 허공을 바라보며 무자비한 공세를 잇는다.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다.
"로렌스 씨. 이런 말을 드리기 안타깝지만... 어쩌면 그녀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괜찮습니다. 모든 죄는 제가 떠안고 갈 테니까요."
오웨인이 말이 맞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한 여인의 가냘픈 목숨. 저울의 반대편에는 수백만의 목숨이 달려 있다.
간단한 일이다. 아나스타샤를 베어내고, 마리엣타도 함께 베어내면 끝날 일이다.
나와 오웨인이 모든 힘을 짜낸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
카일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아나스타샤의 죽음이 구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열쇠는 이미 이곳에 있다. 열어야 할 자물쇠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역할은... 정해져 있겠지.
"카일, 하나만 묻겠습니다."
"......"
"당신은 아나스타샤를 구하고 싶습니까?"
"...말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신부."
카일이 천천히 일어나 검을 들었다.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그의 각오를 읊으며.
"제게 있어 아가씨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사입니다. 아가씨를 끝까지 따르는 것. 그를 위해 제 모두를 바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제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나스타샤를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다.
내가 신시아를 생각하듯, 카일도 아나스타샤를 생각한다.
지키고 싶고, 곁에 있고 싶고,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내가 검을 들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다.
"이걸 받으십시오."
"이 말뚝은...?"
"기회는 단 한 번 뿐입니다.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가, 그걸 가슴에 꽃아 넣으십시오. 그럼 마왕화가 풀릴 겁니다."
세바스를 고쳐 든다. 앞으로 사용 가능한 기술은... 두 번 정도가 한계인가.
"...지금 저보고 아가씨의 몸에 상처를 입히란 뜻입니까."
"저를 믿어주시면 좋겠네요. 제가 당신을 믿듯이."
"......"
"그녀에게 가는 길은 제가 뚫겠습니다. 어떻게든 반드시 한 번은. 그 다음은... 당신의 몫입니다, 카일."
카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제 2의 방안 따위는 생각하지 않겠다.
"오웨인. 잠깐만 시간을 벌어주세요."
"생각이 있나 보네요. 알겠습니다."
검은 번개가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마리엣타 같은 훼방꾼은 마지막 도박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신시아, 저를 도와주세요. 제게 힘을 나눠 주세요." "응, 알겠어!"
세바스의 손잡이에 두 사람의 손이 엇갈려 마주잡힌다.
나의 신성력과 신시아의 마기가 섞여, 세바스의 초록색 검날이 탁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당신들, 설마 이 아가씨를 포기할 셈인가요?"
"아니,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검을 위로 높이 든다.
1형, 단죄. 그 파괴력을 바닥에 퍼트릴 뿐이다.
카일이 아나스타샤에게 향할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가라아아아아!"
신시아가 간절함을 담아 외친다. 그 마음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바닥을 반으로 가르며, 신성력과 마기가 뒤섞인 검기가 길을 연다.
* * *
"꽃밭이...망가져..."
가시 덩굴로 가로막힌 벽이 사라지고, 빛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 명의 남자가 앞을 향해 달려간다.
"카...일...?"
"아나스타샤아!"
앞으로 남은 거리는 단 세 발자국.
"아나스타샤! 대응하세요. 저 자를 양분으로 만드는 거예요!"
마리엣타가 인형실에 마기를 불어넣는다.
아나스타샤의 뒤편에 자리 잡은 거대한 꽃이 입을 벌렸다.
하지만... 카일은 결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정신 차려, 아나스타샤!"
"꽃이, 겨울이 다가와. 난 또다시... 어두운 방 안으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카일이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반짝이는 무언가. 그 작은 무언가를 보자.
"말도 안 돼... 움직임이 멈췄다고?"
호흡조차 잊어버린 채, 아나스타샤가 멍하니 카일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오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
증표. 카일이 아나스타샤에게 준 증표. 아나스타샤가 카일에게 준 증표.
경의와 인연과 친애와 결속, 그리고 애정. 그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그들의 상징.
"반...지..."
"아나스타샤, 넌 바보야."
카일이 그녀를 끌어 안았다.
아나스타샤가 부서지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강하게.
"항상 나한테 바보, 바보 거리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바보야."
"...카일?"
"그래. 카일이야. 너를 지키는 기사. 그리고 너의... 첫 번째 친구."
카일에게 있어 지금만큼은, 그녀는 지켜야 할 아가씨도,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마왕 후보자도 아니다.
아나스타샤. 꽃을 좋아하고, 웃는 모습이 예쁜 평범한 소녀. 단지 그뿐이다.
"뭐 하는 거야, 이 고물 인형이!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그렇게는 두지 않습니다." "오웨인? 이럴 때에...!"
오웨인의 검은 번개가 마리엣타의 인형실을 튕겨낸다.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던 두 사람이 재회하는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
"꽃이 져버려도 괜찮아. 겨울이 와도 괜찮아."
"안 돼... 고독이 찾아와... 끝없는... 고독이..." "그렇지 않아."
카일이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왕이든 뭐가 되었든, 아나스타샤의 얼굴은 여전히 가녀리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찾아올 테니까. 새싹이 움트고, 꽃이 다시 필 테니까." "......!"
"그리고 그때까지 내가 옆에서... 네 손을 잡아줄 테니까."
네가 더 이상은 외롭지 않도록.
"...계속?"
"그래, 계속. 네가 죽을 때까지 옆에서."
카일의 말에, 아나스타샤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히힛, 계속 함께, 있고 싶어..."
"그래. 그러니까 지금은... 편히 쉬어."
"있잖아, 카일. 나, 계속 믿고 있었어. 네가 말해 준 거. 날, 밖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
아나스타샤가 미소를 지었다.
겨울을 녹이는 봄의 햇살보다 밝은 얼굴로.
"그러니까, 그러니까."
카일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며, 아나스타샤가 속삭였다.
"계속, 당신의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역시 바보구나, 아나스타샤."
카일이 아나스타샤에게 입맞춤했다.
손등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그녀의 입술에.
"네가 내 곁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네 옆을 지키는 거야."
"...기뻐."
"계속 손을 잡고 있을게. 네가 다시 눈을 뜰 그 순간까지."
푹.
카일이 아나스타샤의 가슴에 말뚝을 꽂았다.
레이크가 로렌스에게, 다시 카일에게 건넨 빛의 말뚝을.
선대 현자의 연구의 결과물, 마왕의 힘을 봉인하는 마도구를.
"신부님, 저길 봐! 덩굴이...!"
마기를 머금은 꽃은 시들고, 방 안을 가득 메운 덩굴이 썩어 없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찰나의 순간, 마왕 후보자 아나스타샤는 마왕의 가능성을 잃었다.
* * *
"검붉은 기둥이, 줄어들고 있어?"
스피네가 기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베론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건가."
"쿨럭, 잘 되었군, 베론. 쿠훅, 이걸로 사이좋게... 지옥으로 갈 수 있겠어."
방안을 가득 메운 마법진. 자신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 현자가 고안한 최후의 비술.
방해하려고 한다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론은 그러지 않았다.
저 대마법이야말로, 자신의 스승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였으니 말이다.
"길버트. 어째서 나 따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가."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마법진의 마지막 문자가 그려지며, 최상층 전체가 거대한 빛의 철창에 둘러싸였다.
베론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힘이 대부분 빠져나가는 사실을.
"친구이기 때문이지. 바보이기도 하고. 자네도, 나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길버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마, 베론. 그리고...'
잘했다, 오웨인.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길버트는 머나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길버트, 당신의 용기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용사 디바인. 그가 다시금 성검 스펜타를 손에 들었다.
누군가가 이어지길 바란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 나라는, 이 세계는 이곳에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압도적인 힘의 격차는 줄었다.
마왕으로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베론은 무한한 존재가 아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마왕이다. 일순에 주위를 파멸로 이글 수 있는 규격 외의 존재다.
그럼에도 그들이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용사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들이 용사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망집을 끊어내겠다, 베론."
"...마음대로."
베론이 손을 펼쳤다. 마왕으로서, 용사를 쓰러뜨리기 위해.
"스펜타. 너의 족쇄를 한 단계 풀어라."
용사의 성검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신들이시여. 우리에게 피의 투지를."
성녀가 어깨의 붕대를 풀며 기도에 나섰다.
"스피네, 내 몸 잘 부탁한다."
"...흥. 이번엔 다쳐도 책임 안 질 거니까."
아득. 레이크가 손가락을 물었다.
"이게 '운명'의 뜻인가."
베론이 마법을 펼쳤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공간 자체를 뒤틀고 터뜨리는 대마법. 인간이었을 시절, 결국 성공하지 못했던 7서클 너머의 마법.
"베어내라, 스펜타."
허나 그의 마법은 스펜타에 베어졌다. 아니, '삼켜졌다'.
무방비한 베론의 목을 향해 두 자루의 검이 날아든다.
빛을 머금은 용사의 검이, 음속을 꿰뚫는 광전사의 검이.
"방어를."
손을 들어 보호막을 펼치려는 찰나, 그의 몸이 굳기 시작했다.
봉인 술식. 길버트가 목숨을 바쳐 자신에게 건 마지막 마법.
"...이번에도 자네가 방해를 하는군, 길버트."
눈을 감고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베론은 그대로 손을 떨궜다.
꺼져가는 불꽃이 마지막으로 타오르듯, 넘쳐흐르는 복잡한 감정을 함께 짊어진 채로.
푸욱.
용사의 성검이, 광전사의 혈검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더 이상 재생할 수도 없는, 필살(必?)의 상처를 만들며.
"해냈어...!"
스피네가 베론을 바라보았다. 생기를 잃은 눈으로 바닥에 쓰러지는 베론의 모습을.
디바인이 그에게 다가간다. 마왕이 아닌, 곧 죽어 없어질 베론의 혼에게.
"베론, 당신은 명백한 악이었다."
"......"
"하지만 당신에게도 목숨은 있다. 그러니 묻도록 하지."
"......"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
할 말, 할 말이라.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다.
용사. 자네는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나. 만약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나는 스승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읊기엔 너무나도 피곤했기에.
"...그립군."
그 말을 끝으로, 베론은 시체도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두 번째 마왕이자 마도 공화국의 마왕이었던 '망집의 베론'.
그는 그렇게 용사의 손에 쓰러졌다.
* * *
"젠장, 젠장, 빌어먹을! 어째서 이런 일이...!"
"이걸로 끝입니다, 마리엣타. 순순히 받아들이세요. 좋아하잖아요? '운명'이라는 거."
마왕은 쓰러졌다. 아나스타샤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든 게 끝났다. '운명'의 마왕을 돕지도, 마왕 후보자를 데려가지도 못했다.
모든 건 전부 저 빌어먹을 안경 꼬맹이 때문에.
"...이대로 끝나진 않을 거예요. 모든 건, '운명'의 뜻대로."
마리엣타가 차원문을 열었다. 적어도 자신의 몸을 내빼는 것쯤은.
"그렇겐 안 되죠."
마리엣타가 도망치려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마치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차원문.
이건 오웨인의 소행이 아니었다. 오웨인으로는 자신의 차원문을 해제할 수 없다.
"당신들이 도망치는 건 이제 질렸거든요."
로렌스. 성국의 신부. 성유물의 주인.
세바스가 땅에 꽂혀 있다. 주위를 초록빛으로 감싸며.
마리엣타가 미리 얻지 못한, 공화국에서 오웨인과의 싸움으로 얻은 제 3의 기술.
'성역'. 모든 마법을 강제적으로 해제하는 대(?)마법전의 기술.
"하, 아하하하하하하!"
"마음 같아선 당신을 사로잡아 정보를 얻고 싶지만... 아쉽게도 전 더 이상 이단심문관이 아니라서요."
철컥. 로렌스가 품에서 총을 꺼냈다.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까.
"물어봤자 대답도 안 해줄 거고요. 그렇죠?"
"당신, 당신만 아니었다면...! '운명'에서 벗어나 있는 당신 같은 자들 때문에...!"
타앙.
경쾌한 총소리와 함께 마리엣타의 몸이 뒤로 고꾸라졌다.
마왕 추종자는 씨앗이다. 대륙을 좀 먹는 악의 씨앗.
"...안타깝군요."
"역시, 오래 알고 지냈던 자의 죽음은 보기 힘들었나요, 오웨인?"
로렌스의 물음에 오웨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제가 직접 끝내지 못해서요."
"푸훗, 그거 말 되네요. 아, 카일과 아나스타샤는..."
"괜찮아, 신부님."
신시아가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자고 있어. 서로 손을 꼭 쥐고."
카일과 아나스타샤의 맞잡은 손을 보며 신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기쁨과 다행스러움이 공존하는, 그런 밝은 미소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