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외전 5. 저마다의 시선
* * *
"두 번째 마왕이 격퇴되었다, 라고요."
"그렇습니다, 성녀님."
투명한 피부의 여인이 찻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성국의 우상. 단 세 명만 존재하는 성녀 중 한 명.
'빛의 성녀'.
"처음 마왕의 각성을 알아차렸을 때만 하더라도 걱정이었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이 모두 신의 뜻이겠죠."
"이걸로 남은 마왕은 모두 여섯입니다."
'갈망'이 봉인되고, '망집'이 끊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모두 여섯. 환란, 속박, 배격, 투쟁, 타락, 그리고 운명.
"마왕 추종자들의 동향은 어떻죠?"
"현재로썬 잠잠합니다. 마도 공화국에서 보고되었던 대다수의 활동이 위축되었고, 특히 흑색 마탑에 잠입한 마왕 추종자를 색출해 낸 것이 유효했습니다."
흑색 마탑의 부마탑주로 활동하고 있던 마왕 추종자, 마리엣타.
원래 흑색 마탑이었던 그녀가 마왕 추종자가 된 것인지, 마왕 추종자였던 그녀가 부마탑주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공화국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그들의 손에 넘어갔으리란 사실뿐이다.
"다른 나라는 어떻죠?"
"제국은 빠르게 안정화에 들어섰고, 북왕국은 병력을 확충하고 있습니다. 남왕국은 여전히 내전 상태고, 서연방국은 불명. 그리고 공국은..."
공국. 마왕 후보자 아나스타샤의 고국.
이번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아나스타샤의 상태였기에, 공국 역시 나름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을 봉쇄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용사 일행을 의식해서겠죠."
용사 디바인은 공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왕 후보자 아나스타샤, 그리고 그녀로부터 비롯된 '귀공자/귀공녀'에 대한 의문.
공국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정에 나선 용사 일행을, 공국은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그쪽의 대공(大?)도 여간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군요. 설마 구원의 빛을 가리려 할 줄이야."
용사 일행은 신이 내린 구원이다.
'마왕'이라는 불공평하고 거대한 힘에 맞서 인류를 구원할 희망의 빛.
허나 빛의 성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용사'란 건 결코 '신'들이 빚은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애초에 성녀인 그녀조차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이란 건 결국.
"성녀님?"
"아, 미안해요, 테오도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어찌 됐든, 용사가 마왕에 대항하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역할은 단 하나. 길 잃은 어린양들을 인도하는 것뿐.
"성녀님. 앞선 내용 외에, 추가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직 정황밖에 없지만..."
"말해 보세요."
"이단심문회에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이단심문회. 성국의 썩은 싹을 뿌리 뽑는 이단심문관들의 집단.
예전부터 말이 많은 곳이었지만, 이처럼 누군가의 입을 통해 성녀의 귀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혹시 마왕 추종자와 관련이 되어 있나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다만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지는 이단심문관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그럼 됐습니다."
성녀가 기사의 말을 끊었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마왕과의 싸움에서 인류가 승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뿐이다.
이단심문회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든, 자신은 그런 사소한 것에 관심을 쏟을 이유도, 여력도 없다.
"모든 건 순리에 따라 움직일 겁니다. 제가 나설 이유도 없어요."
"...알겠습니다, 성녀님.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저희가 뒤틀어야 할 건 하나입니다."
달의 여신, 난나. 그녀에 의해 이 대륙의 미래가 점쳐졌다.
여신의 눈에 보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어둠뿐.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재가 되어 사라진 것만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미래의 모습이었다.
"모든 건, 예정된 '운명'을 비틀기 위해서."
천 년 전, 태초의 용사에게 봉인당하지 않은 유일한 마왕, '운명'.
그로 인해 마왕을 신봉하는 자들이 조직력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대륙 각지에서 혼란이 일었다.
그는 여덟 마왕 중 최초의 마왕이자, 가장 마지막에 상대할 최후의 마왕이 될 것이다.
'운명에 맞서기 위해선 더 많은 '패'가 필요해.'
평범한 인간은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운명이 뒤틀린 자'의 존재다.
'운명'이라는 거대한 강의 물줄기를 뒤틀어버릴 돌부리.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하고, 고요한 웅덩이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켜줄 자들.
이미 그녀는 몇 명을 점찍어 두었다.
그것이 용사 디바인을 위시한 용사 일행들. 운명의 틀에서 조금씩 벗어난 그들이라면, 분명 운명의 마왕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또 한 명.'
빛의 성녀가 웃음을 지었다.
이단심문관 출신의 신부. 마왕 후보자 신시아의 보호자. 로렌스 프랑.
그가 그녀의 예상대로, 아니 훨씬 더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해 주고 있기에.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네요."
"지금 무슨 말씀을...?"
"아니, 아무것도."
성녀가 잔을 전부 비웠다.
이미 수없이 뒤틀리고 변한 운명은 다른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분명 이 세계는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왕 추종자'. 그들이 운명의 흐름을 고정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 * *
어둠이 잠식한 어딘가의 고성(古?).
거미줄로 뒤덮인 어느 방, 그 한가운데에 있는 관에서 누군가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푸하아!"
요염한 얼굴을 한 단발의 여성.
눈가에 찍힌 눈물점이 그녀의 정체를 말해준다.
"깨어났나요, 마리엣타."
마왕 추종자, 마리엣타.
흑색 마탑의 부마탑주라는 신분으로, 마도 공화국에서 일련의 사건을 계획한 장본인.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건 남자는, 기분 나쁜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어머, 설마 옆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당신이 실패할 줄 알고 있었거든요."
안경을 고쳐 쓰며 옅은 미소를 짓는 청년.
레서. 성국의 성도에서 달의 기사 크루거를 이용해 테러를 계획한 자이다.
"제가 말했죠? 로렌스, 그자를 주의하라고."
"흥. 제 계획은 완벽했다구요! 로렌스, 그 자가 오웨인을 죽이기만 했어도...!"
'운명'에 따르면, 오웨인은 진즉에 로렌스에게 죽음을 맞았어야 했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오웨인을 죽이지 않았고,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흑색 마탑이 뚫려 마왕 후보자가 마왕으로 각성하지 못했다.
"당신이 인형사가 아니었다면, 진작 다진 고기가 되었겠죠."
"언제나 보험은 들어둬야 하는 법이니까요."
마리엣타가 자신이 깨어난 관을 살펴보았다.
마기가 담긴 실로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육체. 인형사로서 온전히 인형에 의식을 복사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제법 정성 들여 만든 인형이지만...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인형이야 또 만들면 되니까.
"당분간은 본체로 활동해야겠군요. 우스워라."
"흥. 한 번 당한 수에 두 번 당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절 우습게 보다간 당신의 목이 날아갈 거랍니다, 레서."
두 사람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비록 같은 뜻을 품은 같은 마왕 추종자라 해도, 서로 간에 뜻이 맞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코웃음을 치며 레서가 답했다.
"뭐, 당신의 실패 역시 '운명'께서는 관측하고 있었습니다."
"...제 실패요? 설마, 운명께서 분명 저의 성공을 언급...!"
"일련의 사건조차 운명의 뜻인 거죠. 설마 청색 마탑주가 마왕으로 각성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었나요?"
레서의 말에 마리엣타가 입을 다물었다.
"그분은 저희 같은 미물들과는 격이 다른 분입니다. 그 미천한 머리로 함부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려 하지 마세요."
"흥, 그분이 당신을 총애할 만하네요. 저도 나름 광신도라고 생각하지만... 당신은 '진짜'네요."
마리엣타 자신보다 몇 년이나 앞서 마왕 추종자로 행동해 온 레서.
대체 어째서 그가 '운명'을 따르는가. 마리엣타는 쉽사리 추측하지 못했다.
그때, 그들이 있는 방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피가 잔뜩 묻은 얼굴로 단검을 돌리며 들어오는 긴 머리의 여인.
"뭐야, 마리엣타잖아?"
마왕 추종자, 로리안.
버려진 도시, 레고르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그녀 역시 '운명'의 하수인이었다.
"...왔네요, 시끄러운 여자."
"시끄럽다니, 무슨 소리야? 상대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나라도 떠들어 줘야 분위기가 살잖아?"
로리안. 그녀는 한때 남왕국에서 이름을 날린 연쇄살인마다.
잔혹한 살인 수법. 범행의 용의주도함. 무엇보다 가장 악질인 점은, 이미 죽은 피해자의 시신에게 계속해서 말을 거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아, 대체 그분께선 무슨 생각으로 당신을 곁에 두시는 건지."
"뭐 어때? 그분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나한테 죽는 녀석들도 결국 그런 '운명'인 거잖아? 그분 덕분에, 난 약간의 망설임도 떨쳐버리고 썰어버릴 수 있다고."
후우, 하고 마리엣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 추종자는 모두 같은 마음을 품지 않는다.
어떤 자는 세상의 멸망을 바라기 위해, 어떤 자는 복수할 힘을 가지기 위해서, 또 어떤 자는 단순히 재미와 즐거움 때문에 '운명'의 뜻을 따른다.
그리고 어떤 자는...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마왕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자가 안 왔군요."
"워낙에 바쁘신 몸이니까 그렇겠지. 나라 하나를 통째로 전복시키는 게 그 사람 임무잖아?"
로리안이 벽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대륙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 지도. 북왕국, 공국, 서연방국, 남왕국, 제국, 마도 공화국.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성국(?國)의 수도, 성도 닌우르타.
로리안의 단검이 그곳에 박혔다.
"곧 성국은 무너질 겁니다. 자신들이 믿었던 자들의 손에 말이죠."
* * *
성국의 어느 도시, 그곳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건물의 꼭대기.
검은 머리를 한 데 묶고, 머리색만큼이나 검은 제복을 입은 여성이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성국의 뒤편을 지키는 이단심문관이자, 동시에 로렌스의 친우이기도 한 연인.
에델바이스 발랑틴. 바로 그녀였다.
"여기 있었군, 에델."
어떤 남자의 목소리에 에델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부국장님."
"뭘 그리 멍하니 있었지? 곧 임무 시간이다."
이단심문회의 부국장, 드레이크.
자신의 길을 정하기 위해 로렌스의 곁을 떠나 이단심문회로 돌아온 그녀는, 부국장의 밑에서 성국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잠시 친구의 소식을 좀."
읽고 있던 신문을 내보이며, 에델이 드레이크에게 답했다.
마도 공화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두 번째 마왕이 나타나고, 용사 일행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노력으로 마왕 각성 사태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한쪽 구석에는 로렌스의 모습도 있었다.
"흥, 어딜 다니나 했더니, 설마 공화국에 가있을 줄이야."
"뿌듯하다니 표정이시네요, 부국장."
에델이 로렌스의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비록 모습은 엉망진창이었어도, 그는 여전히 멋있고 듬직했다.
'골치 아프군. 기껏 연마된 칼이 무뎌지려 하고 있어.'
드레이크가 에델의 얼굴을 지켜봤다.
로렌스를 바라보는 에델의 표정은 저잣거리에 있는 마을 처녀와 다를 바 없었다.
이단심문관에게 필요한 것은 신에 대한 믿음과 이단을 섬멸할 각오뿐. 그 외의 다른 감정은 칼 끝을 무뎌지게 할 뿐이다.
"에델, 마지막으로 묻지. 정말 로렌스에게 돌아가 보지 않아도 괜찮겠나?"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부국장님."
에델이 신문을 날려 보냈다. 로렌스의 얼굴이 담긴 신문을.
이제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자신은 평범한 여자이기 이전에... 성국을 지킬 이단심문관이기에.
"전 돌아가지 않아요. 적어도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는."
"이번 일은 키리에 국장님의 호출이다. 목숨이 걸린 일일 테지."
"괜찮습니다. 이건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
에델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쩌면 다시는 로렌스의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와 칼을 맞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그래, 모든 건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일이니까.'
알베르. 로렌스와 에델의 소꿉친구였던 그 남자의 이마에 총탄을 박아 넣은 순간, 이미 그녀의 발목에는 '죄업'이라는 족쇄가 묶였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나아갈게. 그러니 로렌스 너도.'
뎅, 뎅, 뎅.
종소리가 울린다. 이델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러니까 부탁할게, 로렌스. 성도로는... 오지 말아 줘.'
때가 왔다. 성국이라는 거대한 호수에 거대한 물길이 일 순간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