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수면 아래에서(1)
* * *
천 년 전,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가 나타나 모든 것을 뒤바꿨다.
기존에 존재했던 크고 작은 나라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고, 결속력을 잃은 인류는 재앙 앞에 그저 몸을 떨었다.
이윽고, 인간의 숫자보다 마물의 숫자가 더 많아졌을 때, 대륙에서 인류의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후에 성국이라 불릴 나라의 수도를 제외하곤 말이다.
남아 있는 자들은 성을 세웠다. 벽돌을 쌓고, 각자의 신앙이 담긴 문양을 그려 넣었다. 부디 이 벽이 자신들을 지켜주길 바라면서.
사람들의 염원이 신에게 닿았을 때, 평범했던 성벽은 어떤 '마(?)'도 침입할 수 없는 굳건한 최후의 벽이 되었다.
그리고, 용사가 태어났다. 성검을 든 용사가.
* * *
"...해서, 이 성벽은 지난 천 년의 세월 동안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전설이네요, 선배!"
성도 닌우르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그 위를 순찰하고 있는 금발의 여기사. 그리고 또 한 명의 여기사.
크리스티나 포르베아. 오를란도의 다섯 제자 중 하나이자, 로렌스의 친구이기도 한 성기사.
마도 공화국에서의 일련의 사건을 겪고 돌아온 그녀는, 곧 있을 에델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근무를 몰아서 하는 중이었다.
겸사겸사 자신의 후배 여기사를 교육시킬 겸 해서 말이다.
"어쩌면 단순한 전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500년 전에 있었다는 7국 사이의 대전쟁. 그때도 이 성벽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신의 뜻을 탐구하기엔 최고의 장소네요! 어떤 상황에서도 안심 그 자체니 말이에요!"
"함부로 말할 순 없습니다. 적이 이미 내부에 들어와 있다면, 이 굳건한 성벽도 제 역할을 못 할 테니까요."
크리스는 이미 그와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달의 기사 크루거. 모든 성기사의 귀감이 되는 자이자, 성국의 영웅이었던 인물.
허나 누구보다 신실했던 그 역시, 마왕 추종자들의 계략에 휘말려 달의 광기에 삼켜졌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마왕 후보자. 그때의 기억을 곱씹으면, 지금도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성국의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는 건 알고 계시죠?"
"네. 성국의 변두리에서 성기사들이 죽은 채로 발견되거나... 수도사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고요."
성국의 수면 아래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다.
교황은 공식적으로 이들이 '마왕 추종자'의 짓이라고 발표했지만, 크리스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왕을 부활시키려 하는 자들이 말단 성직자들을 죽여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가? 그걸 생각할 때마다 크리스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성도라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런 때일수록 저희 같은 성기사들이 더 힘을 내야만 합니다."
"후훗, 맞아요. 선배님은 기사단장 님이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모두 그분께 배운 얘기니까요."
성기사단장, 리날도. 성국을, 교황을 지키는 빛의 방패.
그가 있는 한 성국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교황을 지키는 한, 성녀만 있다면 성국은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달이 밝네요, 선배."
크리스의 후배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보다도 더 새하얀 달빛이 자신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갑옷에 비친 달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실 정도로.
오늘 같은 날은 순찰을 돌기 좋은 날이다. 그림자가 걷히는 밤에는, 혹시나 성국의 수도로 몰래 잠입하려는 불청객이 없기 때문이다.
"...선배, 저는 옛날부터 성기사가 되고 싶었어요. 리날도 님이, 그리고 선배님 같은 성기사분들이 저를 구해주신 적이 있거든요."
"당신도 분명 그렇게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저도 언젠가는 꼭, 선배님처럼 멋있는 성기사가 되고 싶거든요!"
달밤의 분위기에 취한 탓일까, 자신이 부끄러운 말을 한 것을 깨달은 크리스의 후배가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나, 나도 참 무슨 소리를! 전 반대 방향을 순찰하고 올게요! 반대편에서 다시 봬요, 선배!"
아직 어수룩한 티를 벗지 못한 후배를 바라보며 크리스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오늘은 문제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오늘 달은 무척이나 밝으니까.
새하얀 달은 행운을 상징한다. 비록 성국에는 그런 풍습이 없지만, 공화국에서는 그런 풍습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계속 오늘 밤만 같았으면 좋겠네.'
저 달에 손을 뻗으며 크리스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후배가 싸늘한 시체로 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건 그로부터 1시간쯤 뒤였다.
* * *
"성도가 보이는군요. 슬슬 준비합시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마차 안, 창문 밖으로 웅장한 성채의 모습이 보였다.
성도 닌우르타. 일곱 신의 뜻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생애 한 번은 거쳐가는 성지(??).
최초의 용사가 성검을 내려받은 곳이자 천 년 전 인류의 최후의 보루였던 이곳은, 매년 수많은 인파가 여러 목적을 지니고 몰려온다.
하지만 지금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제한된 사람들만 출입을 허락하는 상황이다.
이유는 두 가지. '달의 기사 크루거' 사태 이후로 크게 강화된 검문, 그리고 최근 성국을 불안에 떨게 한 불온한 사건들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신원이 누구보다도 확실하기에, 따로 검문 같은 건 받지 않아도 되겠지만.
"헤헤. 저도 함께 해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엄연히 제가 당신의 보호자니까요. 훈련이 잠깐 중단된 건 아쉽지만, 그래도 흔쾌히 이해해 줘서 제 쪽이 감사할 따름이네요."
"후, 훈련은 괜찮아요! 정말요. 네, 그렇고 말고."
이단심문관의 제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디나는 평범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목숨을 건 전투나 신이 내려준 사명과는 거리가 먼, 그런 평범한 소녀.
"드레이크는 어떤 모습을 더 좋아하련지..."
"네? 저희 오빠가 왜요?"
"아뇨. 아무것도. 옷이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그런가요? 헤헤헤. 고마워요, 로렌스 오빠."
'옷이 잘 어울린다'라는 말은 왜 다들 좋아하는 걸까.
말 그대로 옷이 예쁘다는 뜻일 텐데. 신시아도, 아네모네도, 심지어 에델이나 크리스도 얼굴을 붉히며 기뻐한다.
"빠안."
"갑자기 입으로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겁니까, 아네모네."
"신부 오빠는 사람의 마음을 너무 몰라요. 신시아 언니가 옆에서 눈 뜨고 보고 있는데도 다른 여자한테 추태나 던지고."
요즘 들어 아네모네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디나와 함께 있을 때마다 다가와서는, 신시아의 안부를 물어보거나 해서 화제를 돌린다.
아네모네가 신시아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나를 볼 때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아네모네."
"신시아 언니를 좀 더 바라봐 달란 뜻이에요, 바보 신부님!"
음, 확실히 신시아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알겠다.
하지만 요즘따라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후우, 됐어, 아네모네. 저렇게 둔감한 것도 신부님의 매력이니까."
"신시아 언니가 그렇게 유하게 넘어가니까 신부 오빠가 저러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아네모네. 최근에야 깨달았어. 신부님은... 꿀이 가득 담긴 꽃봉오리야. 그것도 냄새를 팍팍 풍기는."
남자한테 꽃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좀...
"하지만 그 꿀을 먹을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니까. 꽃향기쯤이야, 정실의 여유로움으로 넘어가 줄 수 있는 거지!"
"역시 신시아 언니...!"
신시아와 아네모네가 알 수 없는 얘기를 하는 사이, 마차가 성문 앞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성문에 쫙 깔린 성기사들. 그런데... 숫자가 조금 많다.
"성기사가 쫙 깔렸군요. 여기서부턴 걸어서 가야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드문드문 이단심문관들도 보이는 걸 보면."
마차에서 내려 성문 근처로 다가갔다.
우리의 신원을 확인하는 성기사들이 몇 있었으나, 옆에 있는 붉은 머리 소녀의 정체가 성녀란 걸 알아챈 다른 성기사들이 말렸다.
안으로 조금 들어가자, 사람들이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작게 들린 그들의 대화.
"저기지? 성기사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곳."
"쯧쯧.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성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건 뭔가."
"쉿, 조용히 해, 이 사람아! 그게... 낙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도 들리더군."
......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분명 크리스가 성도에 있을 텐데.
"저희도 확인하러 가죠."
* * *
"이건...!"
성벽의 바로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바닥에 흩뿌려진 혈흔이 참혹한 죽음을 그려낸다.
성민들을 통제하는 성기사들을 필두로, 사제에 이단심문관, 수도사까지 한 데 모였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있는 남자는...
'성기사단장 리날도? 그가 왜 여기에?'
적갈색의 짧은 머리를 한 근육질의 남자. 그가 사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험악한 인상을 쓰면서.
"사람들을 모두 물려! 현장이 훼손되면 안 된다!"
리날도 씨가 소리쳤다. 본디 온화한 인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저렇게 감정적으로 변할 정도면... 성기사의 죽음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리날도 경. 대체 무슨 일입니까."
"당신들도 어서 나가십... 로렌스? 혹시 자네, 로렌스인가?"
"오랜만에 뵙는군요. 리날도 경."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설마 여기서 리날도 씨를 볼 줄이야.
성기사단장에게 스스럼없이 인사하는 모습을 보자, 디나가 덜덜 떨며 내게 물었다.
"로, 로렌스 오빠? 혹시 성기사단장님과 아는 사이신가요?"
"네. 제 검술 스승이자..."
등 뒤에서 검을 빼들었다. 성국 내에 있는 몇 되지 않는 성유물 중 하나.
'세바스(안식일)'. 나의 참수도가 영롱한 청록의 빛을 내뿜는다.
"이 성유물의 전대 주인이기도 하죠."
"네!?"
"그렇게 당황할 것 없네. 이단심문관 놈들 중엔 대검을 다루는 자가 없다길래 내가 가르쳤을 뿐이고, 그 성유물은 이미 내 손에선 더 이상 빛을 내지 않았으니까."
덤덤한 말투로 리날도 씨가 대답했다.
든든한 큰 형님 같았던 평소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옮기지, 로렌스."
리날도가 나에게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사고'가 아니라 '사건'인가 보군.
"잠깐, 신부님! 나도...!"
"아뇨, 신시아.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앞으로 보게 될 사건의 증거는,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그녀들이 보기엔 너무 충격적일 테니까.
* * *
현장의 깊숙한 곳까지 나를 데리고 온 리날도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무언가를 덮어 놓은 천. 그 주위를 사제로 보이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보존 성법을 걸어놓았다. 네 의견을 들려주길 바라."
"전 일개 신부일 뿐인데요."
"지금은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로렌스. 부탁하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저것'에 다가갔다.
그 앞에서 구역질을 참으며 성법을 사용하고 있는 남자는...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스?"
"쿨럭, 누구, 우욱, 로렌스?"
한스 크라운. 원래라면 한참 생일 파티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이런 곳에 와 있는가.
"한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쿨럭, 이봐, 잠시 교대 좀 해 줘."
옆에 있는 사제에게 성법진의 유지를 맡긴 한스는, 더러워진 입을 닦아내고 일어나 내 앞에 왔다.
당혹감과 분노가 함께 서려있는 얼굴로.
"...설마 이 천 아래에 있는 시체는..."
"아니, 크리스는 아니야.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마음 한구석에서 생각하고 있던 최악의 가정이 사라졌다.
만약 저게 크리스였다면... 에델의 최악의 생일이 되었겠지.
그리고 나도 눈이 뒤집혔을지 모른다. 리날도 씨에게 뭐라 할 처지는 못 되는군.
"그렇다면 크리스는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일단 이걸 봐 둬, 로렌스."
한스가 무언가를 덮고 있었던 천을 뒤집었다.
그 아래에 있었던 것은 예상대로 피해자의 시신이었다.
찌그러진 갑옷, 차갑게 굳어 딱딱해진 피, 얼굴은 죽기 직전까지 고통에 겨워한 표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끔찍하군."
"크리스의 후배야. 성기사단장이 특히나 예뻐했던 기사이기도 하지."
"사망 원인은?"
"조사 중이야, 라고 말하기도 우습지. 로렌스, 넌 이게 평범하게 성벽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라고 생각해?"
보통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머리부터 다친다. 두개골 함몰, 혹은 척추 골절로 인한 즉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 시신은... 너무나도 이상하다. 두개골에 함몰된 흔적이 있긴 하지만, 낙사로 인한 상처라기보단 둔기에 맞아 생긴 상처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거기다 목 근처에 난 자상, 갑옷도 견디지 못한 어떤 거대한 충격, 게다가 전신에 난 멍자국...
"목을 먼저 베였군. 구타는 그 다음이야. 비명도 못 질렀겠어. 사인은 두개골에 가해진 강한 충격. 빌어먹을. 절대 추락사는 아니야."
"그야 당연하지. 성벽에서 추락사? 일반인도 아니고 성기사가? 게다가 성벽에서 근무하는 성직자들은, 모두 성벽에 걸린 추락 방지 주문을 알고 있어. 누군가 의도적으로 아래로 떨어뜨린 거라고."
가까운 사람이 이토록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면 누구보다 분노할 것이다. 특히 크리스처럼 정의롭고 다정한 사람은 훨씬 더.
그런데도 크리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한스, 설마 크리스는..."
"...감옥에 갇혀 있어."
한스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끔찍한 가정 하나를 입 밖으로 꺼내며.
"자신의 후배를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혐의로 말이야."
성도에 불쾌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