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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77화 (77/109)

〈 77화 〉 수면 아래에서(3)

* * *

"로렌스! 대체 무슨 짓...!"

"가만히 있어. 자칫하면 크리스가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성법의 기원은 마법사들의 마법이다.

하지만 성국의 성법 중에는, 공화국의 마법과 달리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 있다.

'기억'에 손을 대는 성법. 이단심문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성법도 그중 하나다.

"으흑, 하윽, 로렌... 스..."

"조금만 참아, 크리스티나. 금방 끝날 테니까."

이 성법은 위험하다. 시전 대상자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니까.

그렇기에 비상 사태이거나, 용의자가 자신의 범행을 끝까지 부인할 때만 간간히 사용한다.

나도 이런 걸 크리스에게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끔찍해요..."

"눈을 돌리지 마, 디나. 이게 이단심문관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만큼 너를 범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너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만큼이나 네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내 이단심문관으로서의 '감'이 말하고 있다. 크리스는 결코 범인이 아니라고.

하지만 넌 입을 여는 걸 거부했지. 원래의 네 성격이라면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했을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남은 건 '왜'라는 이유뿐이다.

답은 간단하다. 도 다른 누군가가 네 기억에 손상을 입힌 거야.

그러니까 내게 남은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그러니 날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으윽, 으아앗, 하아­."

"조금만 참아, 크리스...!"

한스의 말이 들린 걸까. 크리스의 태도가 이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마에 그려진 검은 성법진이 어두운 빛을 발한다.

"이 정도면 됐겠지."

크리스의 눈을 바라본다. 초점 하나 없이 멍한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비친다.

기억을 지울 수도, 기억을 바꿀 수도. 그리고 '기억을 되살릴' 수도 있는 위험한 성법. 우리는 이걸 '기억의 호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지금,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어제의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왔다.

"네 이름은 뭐지?"

"크리스티나... 포르베아... 포르베아 대(大) 수녀님께 세례를 받은..."

"네 사명은?"

"신의 뜻에 따라... 모두를 지키는 것..."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크리스가 나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대답한다.

아니, 최면이 맞지. 지금 크리스의 이마에 새겨진 성법진에는, 시전자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강요하는 성법이 걸려 있으니까.

"마리나가 누군지 알고 있나?"

"상냥하고 활기찬 아이... 멋진 성기사가 되고 싶어 한..."

마리나는 이미 죽었다.

그녀의 인생은 차가운 성벽 아래에서 쓸쓸히 마감되었다.

그녀에게 '멋진 성기사'가 된다는 미래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어제 마리나가 뭐라고 했지?"

"달빛이 밝다고 말했습니다... 순찰을 다녀오겠다고, 반대편 성벽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런데, 그런데...!"

여기군. 크리스의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크리스, 어쨰서 넌 마리나의 순찰 경로로 향한 거지?"

"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림자, 아주 어두운 어떤 그림자. 반짝이는... 단검. 그걸 쫓다가...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그 그림자는... 처음부터 마리나를 노리고 있었..."

­파지직.

크리스의 이마에서 붉은 전기가 피어나 내 손을 떨어뜨렸다.

예상대로다. 크리스의 기억에는 구멍이 나 있다. 왜곡되어 있고, 조작되어 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된다. 마도 공화국의 흑마법사나... 아니면 성국의 '이단심문관'들뿐.

"괜찮아요, 로렌스 오빠? 식은땀을 엄청 흘리고 있어요.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뇨, 괜찮습니다, 디나. 이 성법이 제 신성력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 것뿐이에요. 이 정돈 버틸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알아낼 순 없다. 다만 크리스에게 지워진 부분만을 살려낼 수 있을 뿐.

그래도 그거면 된다.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필요한 건 증거나 알리바이가 아니라... 크리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나의 '확신'이니까.

"계속하지, 크리스. 그다음엔? 그 그림자는 어떻게 되었지?"

"전... 그 그림자를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빨라... 손이... 닿질 않아..."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크리스가 쇠사슬로 묶인 손을 애써 앞으로 뻗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그때의 기억이 재생되고 있을 것이다.

마리나를 구하지 못한, 눈앞에서 마리나의 죽음을 지켜본 그때의 기억이.

"그림자가 마리나를 공격했습니다... 단검으로 그녀의 목을 찌르고... 발로 얼굴을 짓밟고... 제가 갔을 땐 이미..."

목에 난 자상과 전신에 난 멍은 이걸로 설명되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갑옷에 난 찌그러진 자국'은?

"뭔가 특이한 점은 없었나? 마리나의 배를 향해, 그림자는 무슨 짓을 했지?"

"기다란... 막대기를 가져다 대었습니다. 끝에서 불꽃이 나와... 갑옷을 부수고... 그건... 총?"

아득. 강하게 문 어금니에서 피맛이 났다.

1대 1로 성기사를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전투 실력.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

모든 것이 범인의 정체가 성국 내에 있다고 가리킨다.

"총? 하지만 경비병은 다른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했어요!"

"소음기를 썼겠지. 은밀한 임무에서 심문관 녀석들이 주로 쓰는 장치야."

크리스의 눈이 회색빛으로 변해간다. 기억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증거다.

아픈 기억을 더 끄집어내긴 싫지만... 아직 모자라다.

"마지막으로 떠올려라. 그림자는 어떤 존재지?"

"기억할 수... 없­"

크리스의 말이 돌연 끊겼다.

무릎을 꿇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달빛...?

"달빛이 밝다고, 마리나가 얘기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건가..."

한스가 한탄했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감옥의 천장 모서리에 뚫려 있는 창문. 조그만 창살 사이로 새하얀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달빛이 세상을 비춥니다... 선명한 빛이 마리나의 모습을 비추고..."

달빛은 모든 것을 공정히 비춘다. 피해자와 목격자, 그리고.

"그림자를 비췄습니다. 후드를 쓰고 있는... 여자? 머리카락이 검었고, 그리고..."

크리스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정체불명의 자객은 그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의 눈에 남은 것은 단 하나.

"성벽 아래로... 마리나가 떨어져... 저도 그 아이를 따라 아래로 가..."

"그 정도면 됐어, 크리스."

"마리나를 안았는데...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아...! 저는, 나는...!"

"그만."

크리스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그와 동시에 성법진도 안개로 변해 사라졌다.

고통스러운 기억의 되새김질은 이걸로 끝이다.

"...미안합니다."

"아니, 미안한 건 나지, 크리스. 고통스럽게 해서 미안해."

'미안하다'라는 말과 함께 크리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크리스의 몸을 받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가 말한 '미안하다'는, 마리나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크리스!"

"크리스티나 씨!"

한스와 디나가 감옥 안으로 뛰어왔다.

간수로 보이는 성기사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크리스는... 이제야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듯, 지쳐 곤히 잠들었다. 눈가에 가득히 눈물 자국을 만든 채로.

"이걸로 확실해졌군요. 크리스는 저희가 알던 크리스가 맞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우린 친구니까."

크리스는, 크리스티나 포르베아는 살인자 따위가 아니다.

배교자도 아니며, 이단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가까운 사람을 잃어 마음에 상처를 입은 피해자일 뿐.

"남은 건 어떻게 크리스의 무죄를 입증하느냐 정도겠군."

"그 점에 관해서라면 스승... 오를란도 추기경님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힘닿는 데까지 손을 써보겠다고 하더군요."

설령 크리스가 진짜로 죄를 저질렀더라도, 종교 재판에서 그녀에게 사형까지 내려지진 않을 것이다.

그전에 스승님이 에델이나 나에게 '끝을 맺어라'라는 명령을 내렸겠지만.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해진 게 있습니다."

수면 아래에서 성국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려 한 자.

마왕 추종자의 하수인인지, 단순한 개인의 소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단심문관. 마리나를 죽인 건 그자들 중 한 명입니다."

* * *

성국의 근처. 이단심문회의 거점 중 하나인 허름한 여관.

검은 머리카락을 한 데 묶은 여인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2층을 향해 올라갔다.

에델바이스 발랑틴. 이단심문회의 일급 이단심문관.

그녀가 들어간 곳은 욕탕이었다. 목욕 따위의 여유로운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거예요!?"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어떤 여인.

물 위로 드러나는 고혹적인 실루엣은, 그녀의 여유로움에서 묻어 나오는 매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어머 에델, 무슨 일이니? 같이 목욕이라도 하고 싶어진 거니?"

이단심문회의 국장, 키리에.

그녀의 느긋한 태도 안에는, '국장'으로서의 위압감도 함께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에델에게는 조금도 신경 쓸 사항이 못 되었다.

그녀가 지금 묻고 싶은 건 단 하나.

"성도에서 사건이 일어났어요.! 저도 변장을 하고 몰래 잠입해서 볼 수 있었죠...!"

"...뭘 말하고 싶은 걸까?"

꽉 쥔 에델의 주먹은 부들거렸다.

"아무 죄 없는 성기사를 죽인 사람, 당신이죠?"

성도에서 일어난 사건. 성벽을 순찰하던 성기사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채 성벽 아래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조사 자리에는 에델의 모습도 있었다. 구경꾼들의 사이에 숨어들어 본 현장은... 참혹했다.

에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렸다.

이런 참혹한 짓을 벌일 사람. '동기'도, '기술'도, '참혹함'도 모두 갖추고 있는 유일한 사람.

"당신이, 키리에 언니가 한 일이죠?"

그리고 국장 키리에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마냥 담담히 말했다.

"그래, 맞아."

"지금 대체 뭐라고­!"

에델이 총을 꺼내 들어 그녀에게 겨눴다.

하지만 쏠 수 없었다. 밖에는 키리에 휘하의 심문관들이 깔렸을 뿐더러, 지금 이 총을 쏜다 하더라도 그녀에겐 닿지 않을 것이기에.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에델. 겨우 피라미 하나 죽였을 뿐인데."

"내 친구가 누명을 썼어! 당신이 죽인 사람은 내 친구의 소중한 사람이었고!"

분노했다.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어째서 저 여자의 명령을 따르는가. 답은 하나다.

친구들의 도움이 되고 싶기 때문에. 로렌스에게 당당해질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하지만 이래서야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언니한테 손버릇이 좋지 못하네, 우리 에델은."

키리에가 욕탕에서 일어났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체로 천천히 에델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에델, 곧 큰 파도가 일 거야. '성국'이라는 탁하고 썩은 호수가 뒤엎어지는 거지. 기대되지 않니?"

"난... 난 당신이라면 알려줄 수 있을 줄 알았어...! 어떻게 해야 강해질 수 있는지...!"

강해진다. 에델의 소망은 그런 단순한 것이었다.

"간단하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도려내는 거야."

키리에의 손가락이 에델의 가슴에 원을 그렸다.

"소중한 것을 쳐내고, 끝없는 욕망에 몸을 맡겨. 그럼 자연스럽게 '강함'이 뒤따라 온단다."

"난, 난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에겐 소질이 있어. '여왕'의 소질이. 그런 사람에게는 굳이 깨달음을 위한 고행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은 법이니까."

키리에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까지 에델의 손가락은 방아쇠에서 계속 멈춰 있었다.

에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키리에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그리고 에델, 나의 미련한 여동생. 넌 한 가지 잘못 말한 게 있어."

그다음의 말을 듣고, 에델은 총을 바닥에 떨굴 수밖에 없었다.

"'죄 없는 성기사'라고 했었지? 틀렸어. 이 세상에 태어나 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단다."

철벅, 철벅. 흠뻑 젖은 키리에가 밖으로 나갔다.

욕탕에 혼자 남은 에델의 눈가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천장의 물방울이 닿은 건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눈물인지. 에델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곧­, 성국에 더한 피의 바다가 만들어지리라는 것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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