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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78화 (78/109)

〈 78화 〉 망가진 것들의 피로연

* * *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로렌스 오빠."

우리의 스승, 추기경 오를란도 님이 마련해 준 숙소.

디나가 내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남 말할 처지는 못 되는군.'

복도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걸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직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당장 내일 정오에 첫 번째 종교 재판이 시작된다.

­나는 여기에 남을게, 로렌스. 크리스의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한스는 크리스와 함께 감옥에 남기로 했다.

비록 바로 곁을 지켜주진 못할 지라도,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 만으로 상처 입은 크리스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 신부님!"

방문을 열자 신시아가 나를 반겨준다.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신시아의 얼굴을 보니, 온몸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다.

신시아의 앞에서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나는 그녀의 보호자니까. 신시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수고 많았어, 신부님. 얘기 들었어. 크리스 언니가... 누명을 썼다고."

"잘 해결될 겁니다, 신시아. 아네모네는...?"

"옆방에 있어. 크리스 언니를 위해 기도 중이래."

"그럼 우리 둘뿐이네요."

벌은 꽃꿀을 찾는 법이다. 목마른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신시아의 사랑. 그녀가 내게 보낸 사랑. 내가 그녀에게 보낸 사랑.

"신시아. 해도 될까요?"

"싫다고 말 안 할 거 알잖아."

신시아가 조심스레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신시아와의 입맞춤. 몇 번째든 마치 처음 입을 맞추는 것 같은 설렘이 있지만, 지금은 설렘보다 안심이 더 크게 느껴진다.

신시아가 내 곁에 있다는 안심. 신시아가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는 안심.

그리고... 신시아가 영원히 나와 함께일 것이라는 안심.

"하읍... 핫... 으읍..."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신시아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뒤섞인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점차 커지고, 서로의 숨결을 교환하며 열락의 감정에 빠져 들어간다.

"푸하아."

장장 2분 간 붙어 있었던 입술이 떨어지자, 밖으로 내민 신시아의 혀에서 꿀타래처럼 끈적한 실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저 모습을 보자니 한 번만 더 입을 맞추고 싶어 진다.

신시아와 교감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으니까. 나의 사명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모두.

"신시아, 미안합니다. 잠깐만 더..."

"안 돼, 신부님."

신시아가 손을 펼쳐 나를 가로막았다.

얼굴을 붉히고 숨을 가쁘게 내쉼에도 불구하고, 신시아는 내면의 욕구를 참고 나에게 말한 것이다.

어째서... 막는 거지? 그럴 이유도, 사정도 없을 텐데.

"저랑 입을 맞추는 게 싫어진 겁니까?"

"아니야, 신부님. 세상이 뒤집혀도 그럴 일은 없어."

"그럼 뭐 때문에...!"

감정이 고양된다. 격양된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쳐 거대한 해일을 만들어낸다.

지금 당장이라도 신시아를 넘어뜨리고 싶다. '안 돼'라고 말하는 저 앙증맞은 입을 내 것으로 틀어막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면 안 된다. 아직은 신시아를 상처 입힐 수는...

"신부님, 지쳐 보여."

"...지쳐, 보인다고요? 제가 말입니까?"

"응. 신부님이, 로렌스 오빠가 웃는 표정. 난 보지 못했어."

내게 말하는 신시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들켜선 안 된다. 드러내선 안 된다. 신시아의 말을 조금이라도 긍정하는 순간, 난 무너져 내릴 것이다.

"하핫, 그게 무슨 말인가요, 신시아. 보세요. 지금도 웃고 있잖아요? 신시아의 앞이라면 전 이렇게..."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 오빠."

신시아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까딱여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어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머리를 낮춰 줘, 오빠."

"이렇게... 말인가요?"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신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이,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가 너무나 자애롭게 보여서.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로렌스 오빠는 잘하고 있어.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로."

신시아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시, 신시아? 이게 무슨..."

"쉿. 지금은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냥 그렇게... 나한테 몸을 맡겨."

나를 쓰다듬는 신시아의 손은 의외로 기분이 좋아서, 그대로 잠에 들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쓰다듬어진 건... 거의 20년 만이군.'

프랑 사제님. 나에게 세례를 내려준, 나의 아버지와도 같은 자.

그가 내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나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그의 머리에­.'

"또 어두운 표정. 지금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대도."

신시아가 내 머리를 꼬옥 껴안으며 귀에 속삭였다.

신시아의 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이 차가워진 내 피부를 녹였다.

아니.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나만은 나태해져선 안 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많이 힘들었지, 로렌스 오빠?"

"......"

힘들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물론... 너무 힘들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고, 너무나 많은 일을 해냈다.

하지만 밖으로 표현할 순 없었다. 난 어른이니까. 난 강하니까. 신시아를 지키고, 아네모네를 지켜야만 했다.

"...괜찮습니다, 신시아. 전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힐 순 없습니다."

"정말 고집불통이네. 잠깐만 기다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위를 올려다보니, 신시아가 웃옷의 단추를 풀어 옷섬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첫 단추에 신시아의 쇄골이 드러났고, 두 번째 단추에 부드럽고 말캉해 보이는 살결이 드러났다.

세 번째 단추에 신시아의 계곡이 모습을 보였고, 네 번째 단추를 풀자 순백색의 속옷에 담긴 가슴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자, 오빠. 오늘은 나한테 마음껏 안겨도 돼. 어리광 부려도 되고, 투정을 부려도 돼."

신시아가 잠옷을 살짝 내려 속옷에 담긴 가슴을 꺼냈다.

이미 더 이상 '소녀'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그것은,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어질 것만 같이 매력적인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자, 얼른. 마음껏 해도 괜찮아, 로렌스 오빠."

안 되는데, 이래선 안 되는데. 마치 요정의 장난에 휘말린 것처럼, 내 얼굴이 신시아의 품을 향해 파고들었다.

"어때, 오빠?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아?"

"...네.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녀의 가슴 사이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미가 제 새끼를 품듯, 부드러운 살결이 내 마음을 평온케 한다.

신을 저버리고 타락할 것만 같은 감촉에, 보호자니 어른이니 하는 그런 어려운 얘기는 집어치우고 싶어졌다.

"마음껏 얘기해, 오빠. 난 수녀니까.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한탄을 들어줄 의무가 있으니까. 그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면 더더욱."

"실망하지... 않을 건가요?"

"걱정은. 괜찮다니까, 오빠. 난 어떤 일이 있든 오빠의 편이야. 세상이 전부 오빠를 적으로 돌린다 해도."

마음속에 굳게 가두고 있던 무언가에 금이 갔다.

마치 댐에 뚫린 구멍으로 물이 흘러넘치듯, 그렇게 감정이 북받쳤다.

"지쳤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자버리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편히 눈을 감은 건 언제일까.

난 잠들 수 없었다. 잠들면 안 되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한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나는, 그냥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옛날 옛날에, 어느 성국의 작은 마을에 있는 고아원에. 회색 머리의 아기가 버려졌다.

그 아이가 뛰기 시작할 때쯤, 그는 어떤 사제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몸을 깎아가며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난 어째서 성직자가 되기로 했더라.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너라면 멋진 신부님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래, 프랑. 네가 말했었지. 우리 같이 멋진 어른이 되자고.

"이단심문관 따위, 단 한 번도 되고 싶다고 말한 적 없었어."

학교를 떠난 소년은 어떤 사제의 밑에 들어갔다.

후에 추기경이 될 그 사제는 소년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본래라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열화되고 희미해졌어야 할 그 재능을... 사제는 강제로 일깨웠다.

"이단심문관으로 지내던 나날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소년은 감정을 죽였다. 모든 건 신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제의 뜻에 따라 소년은 기계가 되었고, 그렇게 성국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검 한 자루를 얻게 되었다.

소년은 청년이 되고, 재능은 꽃을 피워 성국에 피를 뿌렸다.

"하지만 나한텐 뭐가 남았지?"

모든 게 망가졌다. 내 손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었고, 남은 건 죄인들의 증오가 섞인 비명뿐이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환각이 보인다. 환청이 들린다.

피로 그어진 이정표. 그 끝에는 내 모습이 있고, 뒤를 돌아보면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

얼굴, 그 수많은 얼굴들. 전부 아는 얼굴들이다. 내가 죽인, 내 손으로 끝장낸 목숨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누군가는 했어야만 하는 일이었고, 모두가 날 칭찬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피 냄새는 지워지지 않아."

바스러져 부서지기 직전, 청년은 어떤 소녀를 만났다.

빛으로 된 철창에 갇혀,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의욕도 가지지 않던 어떤 소녀.

그 소녀가 너무나 불쌍했다. 어쩌면 그녀에게서 내 모습을 겹쳐봤던 걸지도 모르겠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끌린다고 누군가가 말했지.

"부탁이야, 신시아. 날 떠나지 마. 내가 없는 곳에서 행복해지진 말아 줘..."

아, 난 정말 쓰레기구나.

"괜찮아, 로렌스 오빠. 나도 마찬가지야. 오빠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웃을 수 있겠어?"

우리 둘 다 이미 망가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이미 늦었으니, 적어도 이 소녀만이라도. 그렇게 생각한 청년은 검을 버리고 신부가 되어 소녀를 거뒀다.

그렇게 1년, 소녀는 조금씩 웃음을 되찾아갔다.

"오빠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어. 신시아 생크 프랑의 세상은, 그 차디찬 방에서 끝났을 테니까."

그날부터 내 목표는 하나였다. 소녀를 '마왕'으로 만들지 않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내 인생 전부를 바쳐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함부로 목숨을 버려선 안된다. 소녀의 행복에는, '나'라는 존재도 있다는 걸 알아버렸기에.

"난 죽는 게 무서워. 더 이상 널 보지 못한다는 게 무서워."

"영원히 함께야, 로렌스 오빠. 눈을 감는 그 이후에도."

그러던 어느 날, 멈춰 있던 운명의 톱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왕'이 부활했다. 용사가 나타났다.

스승에게서 한 장의 편지가 왔다. 성국으로 오라는 편지였다.

신시아가... 마왕으로 '각성'했다. 영원히 잠든 공주였어야 할 그 모습이 깨어나고 말았다.

"방법이... 없었어. 난 다시 검을 들어야만 했고, 그대로..."

달의 기사를 죽였다. 모두의 목숨을 구했던 신실한 기사가, 모두의 목숨을 빼앗지 않도록.

이걸로 끝일 줄 알았다. 신시아는 마왕이 되지 않고, 용사의 손에 모든 마왕이 쓰러지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성녀가 말했지. 마왕은 모두 여덟이라고.'

신시아는 여전히 마왕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여전히 내 곁을 떠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지 않기를 매일 밤 기도하면서, 나는 다시금 운명의 소용돌이로 발을 디뎠다.

버려진 도시, 레고르. 그곳에서 어떤 소녀를 만났다.

붉은 머리의 성녀. 그녀를 구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친구를 죽였다. 아니, 형제를 죽인 거다.

­앞으로 나아가.

그 말이, 그 약속이. 내 몸에 주박을 씌었다.

맞아, 알베르. 앞으로 나아가야지. 난 멈춰 있으면 안 돼.

"멈춰 서도 괜찮아, 로렌스 오빠."

신시아가 내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가끔은 멈춰도 돼. 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봐. 오빠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봐. 주저앉는 거랑 멈춰서는 건 다른 거니까."

소녀를 구했다. 우리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마도 공화국으로 갔다. 용사를 만났고, 이 세상에 희망이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괴짜 흑마법사도 만났었지. 그도 우리처럼 어딘가 '망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공국의 인연들도 만났다. 신시아와 같은 마왕 후보자. 귀공녀와 기사는 서로를 아꼈다.

마왕이 부활했고, 마왕이 쓰러졌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았다. 누군가의 삶은 거기서 끝났지만... 누군가의 삶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답해 줘, 신시아. 나라면 구할 수 있었을까?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알베르를, 길버트 씨를, 다른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까?"

지금도 생각한다. 내 판단이 모두를 구하지 못한 건 아닐까.

"아마 그럴지도. 하지만 이미 흐른 시간은 붙잡을 수 없어."

"그래... 그 말이 맞지."

"구하지 못한 사람보다, 구한 사람을 봐. 로렌스 오빠 덕분에 에델 언니가 살 수 있었고, 아네모네가 살 수 있었어. 기분 나쁜 안경 오빠랑, 아나스타샤 언니.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나도."

내 행동은 잘못되지 않았다. 내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신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겠지.

"내가 힘낼 이유는 그거면 충분해. 내 주변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신시아, 너를 지키기 위해서. 처음부터 그것뿐이었어."

"알고 있어, 오빠. 그런 오빠가 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

신시아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쳐다본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니 몽롱하고 졸음이 몰려와서...

"하지만 오늘은, 오늘만큼은 푹 쉬면 좋겠어. 그러니까 용서해줘야 해?"

신시아의 눈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마음이 풀어진 탓일까,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하기 싫은 거겠지.'

"잘 자, 오빠. 힘내는 건 내일부터. 알았지?"

신시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마도 오늘은... 꿈조차 꾸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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