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79화 (79/109)

〈 79화 〉 폭풍이 오기 전에(1)

* * *

성국에 사는 국민들 대부분은 신의 뜻을 따르는 성직자이다.

당연하게도 그들 전부가 사제와 성기사로 대표되는 다섯 직업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크기에 차이는 있어도 신의 존재를 믿고 따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신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이나 경전, 신이 실재함을 입증하고 자기수양에 전념하는 자들도 있는 법이다.

그들은 '수도사'라고 불린다. 다른 이름으로는 수도승(몽크). 속세에 어울려 살기를 거부하고, 외딴 산 위나 숲 속에 수도원을 짓고 신의 진의(?)를 깨닫기 위해 끝없는 수행을 반복하는 자들.

그리고, '이단'을 심판하는 이단심문관과는 달리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를 제재하는 억제자의 역할.

성도 근처의 어떤 산. 대륙 내에서도 험준하기로 소문난 '잿빛 산'.

그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중턱에 세워진 거대한 규모의 수도원. 수도사들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인 '잿빛 수도원'.

성도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절벽의 끝에, 어떤 남자가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에델의 생일이니까 곧 참석해,라고..."

젊은 나이임에도 하얗게 샌 것처럼 보이는 백발. 남자치고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신비한 인상의 청년.

수도사들이 입는 헐렁한 옷 틈 사이로 보이는 단련된 육체는, 그가 결코 속세의 검과 창을 두려워해 수도원으로 피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소중하디 소중한... 친구의 탄생일인데."

로제리오. 수도승(???) 로제리오 그레고리.

추기경 오를란도가 거둔 다섯 제자 중 한 명이자, 잿빛 수도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을 가진 수도사.

동문이자 친구이기도 한 사제 한스의 편지를 찬찬히 읽은 그는, 편지를 정성스럽게 접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곤란해."

수도사에겐 할 일이 있다. 이단심문관만큼이나 성국 전역을 감시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니까.

최근 성국 전역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들.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성기사나, 대량으로 죽어 있는 사제들.

명백한 이상 신호다. 누군가가 '타락'하고 '부패'했으며, 올바를 것이 틀림없는 신의 뜻을 왜곡하고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또... 사과 편지를 써야겠는걸."

자신은 곧 성도(??)로 향한다. 에델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어쩌면 잠시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의 냉정할지 모르는 선택이, 나중에는 친구들을 지킬 수 있는 결과로 피어날 것이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요, 로제리오?"

한참을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로제리오의 앞에, 아담한 키의 수녀가 말을 걸었다.

수녀복 안쪽으로 보이는 분홍색 단발. 자신을 볼 때마다 짓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마냥 반짝거리는 눈빛.

로제리오에게 눈앞의 수녀만큼 상대하기 껄끄러운 상대는 없을 것이다.

"...란 님. 무슨 일이십니까."

"또 '님'을 붙이고. 로제리오는 그런 딱딱한 태도만 없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에요."

방금까지 청소를 한 건지, 대나무 빗자루를 한 손에 들어 허리춤에 갖다 대며 성을 낸다.

"친구의 편지를 보니,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그렇습니다."

"한심스럽다뇨? 우리 로제리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친구의 생일도 축하하러 갈 수 없는 남자가 뭐가 대단하겠습니까."

자신이 잿빛 수도원에서 할 일은 하는 동안, 성국 전역에서 친구들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다.

비록 내가 없어도, 친구들은 훌륭히 달의 기사 크루거를 제압했다.

로렌스와 에델바이스는 버려진 도시, 레고르에서 새로운 성녀 후보를 찾아내었다고 한다.

거기에 마도 공화국에서 '마왕'까지 막아냈으니... 잿빛 수도원에 있는 자신이 평화롭다고 착각할 것만 같아 걱정이 될 정도다.

"푸훕. 여전히 이상한 데서 절 웃게 만드네요."

"웃지 말아주십시오, 란 님."

경망스럽게 한 바퀴 빙글 돌며, 수녀 란이 로제리오를 향해 웃었다.

"로제리오가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곧 성국을 구할 일이 생길 거예요."

"......"

그렇다. 란의 말이 맞다.

곧 자신은, 그리고 잿빛 수도원을 비롯한 성국 전역의 수도사들이 성도로 집결할 것이다.

성국에서 일어날 수습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알고 있습니다. 수도원장님의 말씀이니 어쩔 수 없죠."

"그렇죠, 그렇죠? 위대하고 현명한 우리 수도원장님의 말씀이니, 아무리 고지식한 로제리오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겠죠?"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수녀 란이 입을 가리고 히죽대며 웃었다.

잿빛 수도원의 수도원장은 수도사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성기사단의 기사단장 리날도, 이단심문회의 국장, 키리에. 그리고 세 명의 추기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 비록 나이나 성별, 외견조차 불명이지만 말이다.

"란 님은 짓궃으십니다. 저도 명칭 정도는 제 마음대로 부르고 싶은데."

"흥. 그건 재미없어서 싫네요. 이래 봬도 제가 로제리오보다 선배, 그것도 압도적인 선배니까 제 말은 따라주셔야죠?"

마치 평범한 소녀라도 된 것처럼 볼을 부풀리는 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내 그녀의 표정이 차갑게 식기 시작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로제리오도 알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빛의 성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죠."

빛의 성녀. 현시대에 존재하는 세 명의 성녀 중, 성국에 머물고 있는 단 한 명의 성녀.

신의 계시를 들을 수 있다는 그녀는, 예언의 권능을 지녔다는 난나와의 접신을 통해 미래를 예언하곤 했다.

"저희들 중 3분의 1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꽤나 담담하네요. 그중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는데."

3분의 1.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에 3분의 1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1000명 중 30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이번 임무는 결코 '임무'라는 간단한 단어로 축약할 수 없는 것이다.

"전 괜찮습니다. 설령 이번 일로 목숨을 잃는다 한들, 분명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이 분명할 것이니까요."

성직자의 목숨은 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설령 누가 죽는다 한들, 그 죽음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다른 이보다 특별히 더 무겁게 느껴지는 죽음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성녀님께서는 한 사람의 죽음을 더 예견하셨죠."

로제리오의 말에, 수녀 란이 눈을 감고 대답했다.

"교황님. 교황 프란체스코 2세."

성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 교황과 성녀.

하지만 성국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교황의 수완이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는다면... 성국은 혼란에 빠질 것이 틀림없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잖아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라고만 얘기했고."

"그런 기밀 정보를 손쉽게 말씀하시는군요."

"로제리오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애초에 예언이 100%의 확률로 맞는다면 여러분이 갈 일도 없었을 거고."

교황의 죽음을 막기 위해. 성국의 혼란을 막기 위해. 어떤 이의 야망을 막기 위해.

로제리오가, 그리고 다른 수도사들이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주먹에 맨 붕대를 바짝 매고, 각자의 방식으로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다녀오겠습니다, 란 님."

"님은 빼라니까요! 후우..."

바람이 불었다. 먼지를 실은 뿌연 바람이. 따가운 먼지에 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로제리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저 멀리, 절벽의 아래를 향해 달리는 로제리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심히 잘 다녀와요, 로제리오."

* * *

종달새가 지저귀고, 따뜻한 햇빛이 내 얼굴을 비추는 아침.

평소와는 달리 아침의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악몽도 꾸지 않았고, 그렇다고 다른 좋은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그냥... 푹 잤다. 근육의 피로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뭔가... 부드럽군.'

손끝에 닿는 감촉에 집중한다. 나로선 알 수 없던 어머니의 품이 연상되는 부드럽고 따듯한 품.

눈앞에 있는 건,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고 내 얼굴을 꼭 안은 채 자고 있던 신시아의 모습이었다.

"으응... 신부님?"

"좋은 아침입니다, 신시아. 덕분에 편히 잘 수 있었어요."

어제의 추태는 괜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어제의 그 일은 부끄럽기 그지없었으니까.

어쩌면 두고두고 놀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잠을 잘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이불을 걷어 찰지도 모른다.

그런 내 걱정이 표정으로 묻어났는지, 신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춰주었다.

"오늘 표정, 엄청 좋아 보여."

"...고맙습니다."

모든 감정을 털어내서일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아주 찰나의 휴식이 있었으니, 이제 다시 힘을 내야 할 때다.

오늘은 크리스의 첫 번째 종교 재판이 있는 날. 참고인의 신분으로서 재판에 참석해야만 한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신시아."

"열심히 해, 라고 말하면 또 너무 무리하겠지? 그러니까..."

신시아가 양팔을 뻗었다. 자신을 안아달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리고 그 너머... 그녀가 내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입술을 포갰다. 여느 때처럼.

사랑하는 연인처럼. 다정한 가족처럼. 서로를 의지하는 운명처럼.

그렇게 입을 맞추고 나서, 신시아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신부님이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신시아의 미소가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그만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다른 성직자들은 종교 재판 전에 신들께 기도를 올린다던데... 나에겐 더 이상 신에게 기도를 올릴 이유가 없겠지.

신시아. 나만의 행운의 여신이 날 지켜봐 주고 있으니까.

* * *

"도착했군, 로렌스."

성기사단장, 리날도. 그 역시 이미 재판소에 도착해 있었다.

평소라면 그가 잘 입지 않을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서.

"첫 재판은 중요하네. 여기서 무죄가 입증되지 않는다면, 크리스티나는 추기경의 앞에서 새로이 재판을 받아야 할 테니까."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아직 누가 범인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느 정도 확보했으니까요."

감옥에서 크리스를 만났을 때, 그리고 그녀에게 몹쓸 짓을 했을 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크리스는 범인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성법 '기억의 호수'를 맹신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친구니까. 로렌스 프랑은 크리스티나 포르베아라는 사람을 알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은 것은 논리와 증거로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기만 하면 될 뿐.

"로, 로렌스 오빠!"

그때,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황급히 재판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묶인 머리카락. 잘못 끼운 단추 사이로 보이는 하얀 천이 그녀의 다급함을 보여주었다.

"디나? 어째서 여기에..."

"느, 늦어서 죄송해요...! 후우, 후우. 저도 이단심문관이잖아요! 재판소에 들어올 자격은 충분하다고요!"

견습이라도 이단심문관은 이단심문관이다.

관계자가 아닌 재판에 참여할 권리는 디나 역시 가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지, 진짜요? 또 쫓겨날 줄 알았는데. 정말 고마워요, 로렌스 오빠!"

"일단 옷부터 다시 입고 올까요? 그런 태도는 재판관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제서야 자신의 꼴을 바라본 디나가 '꺄악'거리는 비명과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리날도 씨가 코웃음을 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꽤나 재미있는 사람이 많이 생겼군, 로렌스. 나랑 검을 맞댈 때보다 지금이 더 즐겁겠어."

"당연한 말씀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리날도 씨와의 수련은 제 인생에서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었습니다."

"농담도 하는 건가? 꽤나 여유가 생겼군."

여유, 여유라. 그래, 맞다. 여유가 생겼다.

너무 어렵게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지금은 크리스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확신만이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슬슬 시작하는 분위기군. 난 이만 자리로 돌아가 보겠네, 로렌스."

재판소에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성도에서 일어난 참혹한 살인 사건의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크리스의 유죄를 말하며 나의 반대 석상(?上)에 선 이단심문관들.

그녀의 죄에 대해 판결할 재판관과... 증인이 될 문지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고인의 신분인 크리스가 들어왔다. 한스에게 어깨를 기대며 부축을 받으면서.

"...한스. 크리스의 상태는­."

"괜찮아, 로렌스. 잠시 탈진이 온 것뿐이야. 너는... 네 일을 다해."

한스와 눈을 맞췄다. 이제 믿을 것은 나의 설득력과 언변 밖에 없을 테니.

크리스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는 듯.

저 모습만큼은, 아무래도 보기 싫었다.

"괜찮습니다, 크리스."

"......"

"당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이제부터 없어질 겁니다."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 내 자신감과 의지를 크리스에게 전달할 수 있는 한 마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고마워."

떨리는 목소리로 크리스가 속삭였다.

그래, 그거면 된다. 난 실수하지 않는다. 실패하지 않는다.

모든 배역이 갖춰졌다. 재판소를 둘러본 재판관이 망치를 두드리며 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 엄숙하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성도에서 일어난 성기사의 죽음에 대한 성기사 크리스티나 포르베아의 1차 재판을..."

"재, 재판관님!"

아주 찰나였다. 급하게 재판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성기사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린 것은.

그리고 숨을 헐떡이는 성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만으로 재판을 중지시킬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 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성벽에서 성기사가 검은 로브를 입은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연락이...!"

'뭐라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음에 파묻힌 재판소. 밝아지는 한스의 표정.

수면 아래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