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폭풍이 오기 전에(2)
* * *
같은 장소, 같은 방법으로 일어난 또 다른 사건.
당연하게도 크리스의 재판은 중지되었다. 두 사건의 법인이 같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힘이 실렸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재판을 담당한 사제 측에서 마련한 방에 구금되었다. 일전의 차가운 감옥이 아니라는 점은 위안거리다. 거기다 한스가 옆에 꼭 붙어 있으니, 웬만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오셨습니까, 단장님!""
나와 리날도 씨, 그리고 디나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으로 왔다.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은 탓일까, 귀찮은 구경꾼들이 몰려 있지는 않았다.
사람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둘러싼 사제들의 모습. 내 예상이 맞다면 저들 안에 있는 건...
"또... 시체일까요?"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죠."
이렇게 말하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냈다. 어떤 모습으로 목숨을 잃었든, 우린 이단심문관으로서 담담히 시신의 모습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사제들에게 다가가 리날도 씨에게 받은 견장을 보여주었다.
"사건을 맡은 로렌스입니다. 잠시 시신의 상태를 볼 수 있겠습니까?"
무언가를 향해 열심히 성법을 사용하고 있던 여사제 한 명이 나를 돌아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짝 놀라며 여사제.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 말했다.
"시신, 이요? 혹시 다른 곳에서 또 일이 벌어졌나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방금까지만 해도 부패 방지 성법을 걸었던 그 시신을 말하는 것인데.
여사제의 어깨를 살짝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참혹한 현장이...
"...응?"
"로렌스 오빠... 이 사람, 살아있어요."
시신이... 아니었다. 피를 많이 흘리기는 했지만, 눈앞의 성기사는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어깨를 관통한 상처. 하지만 급소는 아니었다. 공격할 의도는 있었으나, 목숨을 빼앗으려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비키세요! 아직 치료가 덜 끝났습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성법이 아니었다. 사제들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치유 성법. 그 강화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되었군, 로렌스. 다행히 이번엔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니, 아니다. 모든 것이 명백히 다르다.
차이점을 고르라면, 가장 먼저 피해자의 상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사건의 희생자인 마리나는 목에 수많은 자상의 흔적이 보였다.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가장 먼저 찌른 거겠지. 목격자를 불러 모으지 않도록.
하지만 이번에는 상처가 적다. 오른쪽 어깨에 집중된 상처. 성기사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충분히 목을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정체 모를 그림자의 실력은 입증되어 있으니.
'목적이 달라. 일부러 살려 뒀나?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다시 일을 저지를 이유가 있을 리...'
어쩌면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사건과 두 번째 사건의 범인이 다른 경우.
그렇다면 두 번째 사건에도 이유가 생긴다. 모두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밤이 아닌, 한낮에 범행을 저지른 이유.
'크리스가 범인으로 몰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크리스의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 일이 벌어졌다는 건,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
의심 가는 사람이, 한 명. 크리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나설 정도로 그녀와 친한 사람. 경비병의 시선을 피해 정확히 급소를 피해 공격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로 담력이 높은 사람.
"에델바이스... 발랑틴."
증거라고는 조금도 없는데. 또다시 '감'이 발동한다.
이단심문관으로서의 감. 오를란도 스승님의 밑에서 개화한 나의 재능.
내 모든 감이 한 사람을 가리킨다.
'에델, 대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 * *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언덕, 누군가가 풀숲에 숨어 사람들이 모인 곳을 몰래 살펴보았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깊이 눌러쓴 후드. 허나 그녀의 검고 기다란 머리카락은 후드로도 채 가려지지 않았다.
"이걸로... 된 거겠지..."
사람들의 이목이 끌린 것을 확인한 여인이 후드를 벗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델바이스 발랑틴. 이단심문회의 일등 이단심문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매서운 눈매가 인상적인 여인.
그녀가 품속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닦았다.
'미안, 미안합니다.'
자신이 상처 입힌 성기사에게 용서를 빌며, 에델이 그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신께 기도를 올렸다.
죄에 죄가 더해진다. 모든 것을 돌려놓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럼에도 그녀가 꿋꿋이 버티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아직... 자신의 '책무'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시작될 거야. 키리에의 피로 물든 혁명이.'
이단심문회의 국장, 키리에는 이전부터 성국의 전복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금의 교황은 타락했다. 신의 뜻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우리 이단심문관들이야 말로 성국을 이끌어갈 적격자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이 그녀의 논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하지만, 하지만 이 방법 밖엔 없어. 보다 확실하게 너희를 구할 방법은.'
모든 것은 그날, 로렌스와 헤어지고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결정한 날부터 시작되었다.
드레이크. 이단심문회의 부국장인 남자. 그가 건넨 제안을 에델이 승낙하면서부터.
이런 일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로렌스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드레이크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썼다. 남들 앞에선 절대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그런 단어를 쓸 정도로, 지금의 성국은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로렌스. 그 이름을 들은 에델은 깊이 고민할 필요 없이 드레이크의 손을 잡았다.
'조금, 아주 조금 남았어. 조금만 있으면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될 테니까.'
다시 후드를 눌러 쓰고 에델이 몸을 뺐다.
우선은 피 냄새가 나는 이 손을 닦자. 흔적이 남지 않게 정성 들여 꼼꼼히.
'금속의 감촉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네.'
에델은 총을 위주로 사용하는 이단심문관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단심문관이 총을 주력으로 사용한다.
검을 사용하는 심문관들은... 대체로 '특이'하다는 평을 받는다. 성격에 문제가 있다거나, 전투 스타일이 독특하다거나.
검을 사용하는 이단심문관, 그 중에서도 자신과 면식이 있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로렌스 프랑. 성기사단장 리날도에게서 성유물을 물려받아 검술을 전수받은 역대 최고의 이단심문관.
그리고 또 한 명은... 자신과 같은 성을 지닌 자, 키리에 발랑틴.
뒤틀린 가학성을 지닌 그녀는 목표로 한 대상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급소를 빗나가게 해 고통을 늘린다던가, 온몸에 피가 낭자하게 뿜어지는 모습을 좋아한다던가.
'우욱...!'
헛구역질이 나온다. 사람의 살갗을 뚫고, 얇고 날카로운 금속을 찔러 넣는 감각. 에델은 이 감각이 너무나 불쾌했다.
자신은 총이 좋았다. 총으로 목숨을 빼앗는 건 생각보다 그리 현실감이 와닿지 않았으니까. 방아쇠를 당기는 것 만으로 처단할 수 있다. 몸에 피를 묻힐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단검을 고집한 이유는... 크리스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 포르베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오를란도의 제자 중에선 둘밖에 없는 같은 여자라 서로 속을 터놓고 지냈다.
그런 크리스가 위험에 쳐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속한 집단 때문에.
그렇기에 나섰다. 이번 건은 드레이크의 계획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단심문관이 아닌, 크리스의 친구로서. 그래서 에델은 거짓 사건을 일으켰다.
끼이이익.
허름한 여관의 문을 연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표정이 어둡네, 우리 동생?'
에델이 가장 혐오하는 인간. 키리에였다.
키리에가 에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푸흡, 왜 그러니, 그렇게 깜짝 놀라고. 아, 혹시 이것 때문이야?"
키리에의 뒤편은... 피로 물든 시체가 가득했다. 그녀를 추종하는 이단심문관들이 시체의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키, 키리에 국장님? 이건 대체..."
"고양이가 숨어 들어서 말이야. 아주 못된 도둑 고양이가."
도둑 고양이. 그건 이단심문회의 일종의 은어였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배신자'. 계획을 적에게 알리거나 훼방을 놓는 스파이.
에델이 천천히 시야를 내렸다. 이 방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칫하면 그대로 무너져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죽은 자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이 아는 얼굴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공통점도, 에델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너무 겁먹지 마, 에델. 우린 '자매'잖아? 자매끼린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덜덜 떠는 얼굴로, 에델이 키리에에게 되물었다.
'드, 드."
"드? 잘 안 들려."
"드레이크 부국장은, 어디에?"
순간, 키리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에델의 입에서 드레이크가 나온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시인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죽이지 않았어."
"......"
"드레이크는 그래도 우릴 위해 제법 고생해줬으니까 말이야."
키리에가 말하는 '우리'에는 더 이상 드레이크의 자리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드레이크는 '우리 쪽'인 줄 알았는데, 설마 뒤에서 내 등에 칼을 꽂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키리에의 눈이 붉어졌다. 마안(??). 키리에가 불법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손에 넣은 마안. 보는 이에게 끝없는 공포심을 심어주는 붉은 눈.
붉은 시선이 에델의 트라우마와 겹쳐,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으, 흐으, 흐윽, 으으윽...!"
"드레이크는 죽지 않을 거야. 성도가 불길에 휩싸이는 그 순간까지. 절망에 사로잡혀 끔찍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을 때, 자책과 후회로 산산이 부서질 때. 그때가 제일 기분 좋지 않겠어?"
틀어졌다. 모든 가정과 전개가 무너졌다.
실패했다. 실패했다. 실패했다실패했다실패했다실패했다실패했다실패했다
드레이크라면 분명 해낼 줄 알았다. 눈앞의 광녀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키리에를 막을 생각이다. 이미 준비는 거의 끝났어. 반역 따위 일어나지 않도록, 누군가가 그녀를 멈춰야만 해. 설령... 내가 그녀를 죽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드레이크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괜찮을 줄 알았다. 키레이를 몰아내고,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오랜 악몽이 끊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협력했다.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나, 나, 나를, 어떻게 할... 생각..."
"그러니까 말했잖아, 에델. 내 소중한 여동생."
키리에가 에델의 귀에 속삭였다.
"우린 자매야. 너를 해치고 싶지 않아. 우리 귀여운 아기 고양이."
차라리 저 말을 믿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악몽이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키리에의 붉은 눈이, 손끝 하나까지 전해지는 소름 돋는 감각이 꿈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현실임을 느끼도록 만든다.
"하지만... 못된 장난을 친 여동생에게는 훈육이 필요하겠지."
"그만... 내 몸에... 더는 손대지 마...!"
손이 다가온다. 키리에의 손이, 그 끔찍했던 기억 속의 손이.
에델이 풀썩 주저앉았다. 도망칠 수 없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릴까?
아니, 키리에는 자신의 자결 조차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자, 에델. 다시 떠올려 보자.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을."
키리에의 손이 에델의 뒷목에 닿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주문을. 에델의 정신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진 각인을 일깨울 주문을.
"떠올려라. 우리의 목적을 기억해 내라. 그리고..."
두 눈의 초점이 흐려진다. 모든 이성이 어두운 안갯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키리에 휘하에 있었던 자들이 지닌 술식. 대상자를 무감정한 살인 기계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성법.
"신을 위한, 검이 되거라."
에델의 등에 있던 검은 문자가 빛을 발한다.
의식이 끊기기 전 마지막 순간, 에델은 간절히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우린 친구니까요, 에델.
괜찮습니까? 다친 데는 없나요?
수도원에 수녀 자리 하나쯤은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로렌스. 자신의 친구이자 소중한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로... 렌스..."
뚝. 에델의 눈가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고개를 숙인 에델을 향해, 붉게 상기된 얼굴의 키리에가 질문했다.
"자, 에델. 내 여동생. 잘 잤니? 오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 어때?"
에델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고, 차갑고, 무미건조한 표정.
입가에 인형 같이 딱딱한 미소를 새기며 에델이 대답했다.
"네, 언니. 너무나... 상쾌한 기분이에요."
대답하는 여인은 더는 에델이 아니었다.
에델바이스 '발랑틴'. 키리에의 소중한 여동생만이 있을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