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82화 (82/109)

〈 82화 〉 성도 붕괴(1)

* * *

"모두 소집해! 성문을 지켜라!"

"적은, 침입자는 누구냐!"

"이단심문관...? 그들이 어째서..."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평화로울 터였던 성도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전화(戰火)에 휩싸였다.

어떤 적이라도, 설령 그 상대가 마왕이라 하더라도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순은의 성벽은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내부의 적.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

"단장님께, 리날도 님께 알려라!"

검을 빼들고 방패를 치켜든 성기사의 외침이, 지금 이 나라가 어떤 위기에 쳐했는지 알려주었다.

"내전이, 벌어졌다고...!"

이단심문회의 국장 키리에를 필두로, 성국 전역에 퍼져 있던 이단심문관들이 성도로 집결했다.

허나 그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은 배교자들이 아니었다.

성도의 성직자들. 신의 뜻에 귀 기울이는 자들. 성도의 모든 것을 쏘고, 꿰뚫고, 베어내기 위해 검은 제복을 입은 자들이 발을 내디뎠다.

"물러서지 마라! 성국을 지키..."

­슈콱.

어떤 노쇠한 성기사의 말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베였다는 걸 인지할 틈도 없이 칼날이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기에.

얇은 세검을 손에 들고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흑발의 여인. 이단심문회의 국장, 키리에 발랑틴.

그녀의 지휘 아래 이단심문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성도를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국장님. 병영 창고를 점령했습니다."

"국장님. 성벽의 모든 초소를 제압했습니다."

하얀 천이 검은 물감에 물들어 가듯, 성도의 주요 시설이 차례차례 키리에의 손에 떨어졌다.

"당신도 이건 예언하지 못했던 걸까요, 난나시여."

'교황이 목숨을 잃는다'. 그런 예언쯤은 이미 키리에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교황을 죽이는지, 그전에 교황이 누군가에게 목숨을 빼앗겨 죽는 건지 조차 예언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성도의 경계가 삼엄해지리라고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키리에는 오히려 이 날을 선택했다.

'결국 필요한 건 정보야. 이 사태에서 무능한 사제들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건 신의 말씀 따위가 아닌­.'

이단심문회. 성국의 그림자를 지키는 검과 창.

지난 수십 년간 이단심문회는, 그리고 자신은 성국에 충성해 왔다. 그들이 우리를 가장 신뢰할 때가, 먹잇감을 사냥하기 가장 좋을 때라는 건 당연한 이치.

거짓 정보를 흘렸다. 성국의 외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고. 그들이 교황 암살 계획을 모의한다고 전했다.

물론 확실한 증거로, 마을 하나를 몰살하여 조작된 시체를 보냈다.

성벽에서 성기사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최대한 병력이 분산될 수 있도록.

이런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기는 성격이 아니기에, 키리에는 직접 자신의 손을 더럽혔다. 덕분에 목욕을 하는데 고생하긴 했지만.

"흐흣, 아하하핫­!"

봐, 보라고. 성도가 불타고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에. 내가 생각했던 대로.

예언의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에, 키리에는 알 수 없는 배덕감과 황홀감을 느꼈다.

"말씀드렸잖아요, 교황니임­! 당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상대는, 다름 아닌 우리 이단심문관이라고!"

성기사는 무리를 짓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수도사는 수도원에 틀어박혀 있다. 아마 그들이 나설 즈음엔 모든 일이 끝난 후겠지.

무능한 사제들은 지금쯤 신들에게 기도라도 올리고 있을까.

신부와 수녀는... 말할 가치도 없다.

그리고 이단심문관. 설마 드레이크와 그들의 부하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그래 봤자 겨우 그들뿐이다.

반대 세력 몇몇이 지방에 남아있긴 하지만, 나중에라도 축출하면 될 일이다. 이단심문회의 모든 권력은 이미 자신에게 있으니까.

그리고 에델, 나의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여동생.

"어때? 어떠니, 에델? 정말 아름답지 않아?"

양팔을 활짝 벌리며, 키리에가 에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빛. 마치 인형실에 걸린 것처럼 내가 말하는 대로 해주는 에델의 모습.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웠으며, 사랑스러웠다.

"그러게요, 언니."

에델은 총도, 칼도 집지 않고 그저 키리에의 뒤만을 졸졸 따라다녔다.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처럼 구는 에델을 보자, 키리에는 온몸을 떨게 하는 흥분을 참을 수 없었다.

'아아, 당장이라도 먹어주고 싶어. 저 이마에 입맞춤해주고 싶어.'

아니, 하지만 참아야 한다. 맛있는 음식일수록 나중에 먹어야 더 큰 기쁨을 느끼는 법이니까.

"저도 싸울게요, 키리에 언니. 저도 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거든요."

"아냐, 에델. 괜찮고 말고. 넌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어 주렴."

언제까지고 무능히, 계속. 내 장난감이, 꼭두각시가 되어주렴.

에델을 한 번 꼭 껴안은 키리에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치솟는 하늘은 어느새 뿌옇게 변했다. 이런 광경은 지금까지 수백 번이고 보았지만, 오늘만큼 아름다워 보이기는 처음이다.

'그래, 그때도 이랬지. 그날도 지금처럼 붉고 어두운 하늘이­.'

어째서일까. 자신에게는 이미 '감수성'이란 게 없어진 줄만 알았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려는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키리에가 막 이단심문관이 되었을 때.

그녀와 이단심문회의 상당수는 전대 교황의 명령으로 어떤 임무를 받았다.

어떤 마을로 향해, 그곳의 모든 것을 파괴할 것.

첫 임무였다. 이단심문관으로서 내딛는 첫 발이었다.

들든 마음으로 시작한 첫 임무의 결과는... 놀랍도록 끔찍했다.

­저게, 저게 뭐야...! 우리 보고 저걸 상대하라고?

단순한 마을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연구하던 시설. 이미 파괴된 건물들 사이로 괴물들이 끊임없이 빠져나왔다.

­우린 속은 거야, 속은 거라고! 교황이 말했잖아, 우린 모두 눈엣가시라고. 우린 버려진 거야...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이런 지옥에 있어야만 했는가.

­후퇴, 후퇴를!

­이미 늦었어! 같이 온 사제 놈들이 자기들끼리 도망쳤다고!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렇기에 총을 들었다.

쏘고, 쏘고, 또 쏘고. 이윽고 탄환을 만들 신성력 조차 바닥났을 때, 키리에는 총 대신 주위에 떨어져 있던 검을 들었다.

­키리에, 내 동생... 너라도, 도망...

발랑틴이, 친자매처럼 지냈던 소중한 언니가 죽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더 이상 괴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키리에 발랑틴. 그녀를 제외하곤 말이다.

­설마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교황님께 보고 드려야겠어.

떨어지는 빗물, 피가 섞인 흙탕물로 연명하던 그때, 성법으로 만든 결계를 뚫고 성기사들이 찾아왔다.

마치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시체 더미를 뒤져본 성기사들은, 이내 키리에를 찾아내고는 그녀를 데리고 성도로 데려갔다.

­...하여, 이번 사건을 통해 죽은 수많은 성직자들을 기리고, 그들이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전대 교황의 연설... 따위,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듣기론, 그 시설은 '마왕'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실험 장소라고 했다.

그것도 교황이 직접 지시한. 뭐라 했더라, '인공적으로 마왕을 만들면 용사도 함께 탄생할 것이다'라고 했나.

­축하한다, 키리에. 다음 이단심문회의 국장은 너다.

당연하게도, 키리에는 이단심문회의 국장이 되었다. 알고 보니 전대 국장은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죽였다. 총이 아니라 검으로.

전대 국장의 목을 그어버렸을 때 처음 든 감정은 '후련함'이 아니라... '쾌감'이었다.

목숨을 빼앗는 것에 희열을 느끼지 마라, 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하,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자신이 '망가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지옥에서 버텼던 3일? 아니면 처음 이단심문관이 되었을 때?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일지도 모르겠다.

교황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분명 자신도 죽겠지.

때를 기다렸다. 숨을 죽이고, 겉으로는 충성을 연기하며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숨을 죽이고 웅크렸다.

어느 날, 어떤 소식이 전해졌다. 교황이 죽었단다. 분노한 성직자들의 손에.

주동자는 성기사단의 단장이 되었고, 새로운 교황으로 지금의 교황이 추대되었다.

...그럼 나는?

갈 곳 잃은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 한단 말인가? 손끝을 간지럽히는 살인 충동은 어디서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이래선 안 됐다. 교황을 죽여야만 하는 건 나여야만 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모든 걸 망각했다.

자신이 죽이고 싶었던 게 전대 교황인지, 아니면 교황이라는 직책 자체인지도 잊어버렸다.

이윽고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신, 용사, 교리, 성녀, 천국. 그 모든 허상을 깨부숴 줄게.'

모든 일은 결국 '성국'이라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자신이 겪은 비극도, 남들이 겪은 비극도. 결국 '신'이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기에 벌어진 결과였다.

신이 정말로 있다면, 어째서 난 그 모든 참극을 마냥 지켜봤어야만 했는가.

키리에는 그 결론에 도달해버렸고 마침내 결심했다. 성국을, 무너뜨리겠다고.

그리고 이 결론은, 어쩌면 로렌스 프랑이 도달했을 결론일지도 몰랐다.

만약 신시아를 만나지 않고, 그가 정신을 깎으면서 1년을 더 버텼더라면­.

"이거 받으렴, 에델."

키리에가 에델에게 어떤 검을 건넸다. 군데군데 녹이 슬고 이끼가 낀 낡은 검.

"언니, 이건 대체..."

"재미있는 걸 보여줄게."

키리에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수신호에 따라, 이단심문관들이 품에서 액체가 든 병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으윽, 으으, 끄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이단심문관의 몸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타난 건...

[그르르르, 그그그그...]

괴물이었다. 거인의 모습을 한 괴물.

버려진 도시, 레고르. 그 도시의 이름을 딴 성인이 최후에 도달한 모습. 역병을 퍼뜨리는 괴물.

비록 크기는 작았으나, 그 수는 성도를 멸망시키기 충분할 만큼 많았다.

"아름답지 않아, 에델? 날 칭찬해 줘. 레고르에서 얻은 샘플을 이용해서 만들어 봤는데, 제법 잘 만들어지지 않았어?"

미쳐 있었다. 키리에는 이미 광기(??)에 빠져 있었다.

허나 아무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키리에의 정신 지배에 가까운 카리스마와 언변에 모두 감화되었기 때문에. 광기에 물들었기 때문에.

"역시 언니는 최고예요. 너무 멋져요...!"

그리고 에델조차도. 어린 시절 키리에가 걸어 둔 '각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낡은 검은 일종의 통제 장치야. 내가 교황을 죽이고 나면 너한테 신호를 줄게. 성국을 무너뜨릴 영광은... 너에게 줄게, 에델."

"고마워요, 언니.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낡은 검을 선물 받은 장난감처럼 꼭 쥐며, 에델이 얼굴을 붉혔다.

그럼 다녀올게, 에델.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조심하세요, 언니. 전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에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키리에는 발걸음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교황청. 자신의 평생의 목표이자 사냥감이 있는 장소인 그곳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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