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성도 붕괴(2)
* * *
#1. 교황청.
내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가장 빠르게 전달된 곳은 교황청이었다.
성국의 기둥이자 중심인 교황 프란체스코 2세가 거주하는 곳. 동시에 교황을 보좌하는 세 명의 추기경이 집무를 보는 곳이기도 했다.
사제들이 모두 혼란에 빠진 가운데, 갑옷을 입은 어떤 성기사 한 명이 다른 이들을 지휘하고 있다.
성기사단장 리날도. 아마도 지금의 성국에서 국장 키리에와 1대 1로 맞붙을 수 있는 무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자.
"현재 상태는 어떤가?"
"오를란도 추기경님과 레오르 추기경님은 대피를 완료했습니다."
세 명의 추기경. 실질적으로 성국을 조율하는 자들.
로렌스를 포함한 다섯 명의 제자를 둔 추기경 오를란도. 교황의 오른팔로 불리며 성국 전체를 총괄하는 추기경, 레오르.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오셀로 추기경님은? 그분은 어떻게 되었지?"
추기경 오셀로. 마지막 세 번째 추기경. 성국의 오랜 전통과 비밀을 담당하고 있는 자이기도 한 그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오셀로 님은 3일 전 성도를 떠나시고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이곳과는 먼 변방을 시찰하러 가셨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거면 됐다."
리날도가 교황청의 천장을 올려 보았다. 스태인드 그라스 너머로 보이는 칙칙한 연기가 자신의 눈을 따갑게 한다.
'이곳을 지키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나 많다. 상대는 이단심문회. 이곳의 구조를 잘 아는 그들의 침입을 막는 건.''
무리였다. 불가능했다. 성기사단장인 자신조차 모르는 통로를, 그들이라면 알고 있을지 몰랐다.
그렇기에 그는 단 하나의 방법밖에는 선택할 수 없었다. 교황청을 버리는 것.
교황이, 추기경이 살아있다면 그들이 있는 곳이 곧 새로운 교황청이 될 터였으니.
"교황님, 들어가겠습니다."
이제 남은 건 교황뿐. 저들을 상대로 두 명의 추기경과 교황을 모두 지켜낼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으나, 리날도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간 리날도가 본 것은... 여전히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있는 교황의 모습이었다.
"...교황님. 이제 떠나셔야 합니다."
리날도는 성기사였지만, 동시에 실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신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신속한 대피다. 그건 교황 또한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어째서 이 급박한 순간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인가.
"교황님.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지금 당장 떠나셔야...!"
"리날도."
재촉하는 그의 말을, 교황은 담담한 표정으로 끊어냈다.
"자네도 들었겠지. 내 예언에 대해서 말이야."
"교황님이 오늘 서거하신다는 말씀 말입니까? 지금은 예언을 따를 때가 아닙니다."
"신을 믿는 자로서, 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 또한 우습지."
교황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리날도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리날도. 자네도 참 많이 컸어. 처음 만났을 때의 우린 가난한 청년과 별 볼 일 없는 꼬맹이였는데."
"...이미 대피처는 마련했습니다. 그때까지 몸을 숨기시는 것이."
"아니, 아닐세. 자네가 말해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니야."
교황이 몸을 돌렸다. 리날도의 손을 뿌리치고 말이다.
"저들은 성국의 전복을 바라고 있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노릴 상대는 누구일까? 바로 나일세."
교황은 신상(??)을 둘러보았다. 칠교(七)의 일곱 신을 본떠 만든 웅장한 동상의 모습을.
"꿈을 꾸었네. 성직자들이 가끔씩 경험한다는 예지몽이지. 많은 사람이 죽었어. 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자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지. 그중에는 자네도 있었네, 리날도."
"이 나라에는 당신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라네."
프란체스코여, 너는 오늘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한다.
빛의 성녀가 자신에게 전한 예언이었다. 고귀해야 할 성녀가 어찌 자신에게 그러한 예언을 전할 걸까? 내게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는 건 아닐까?
오랜 고민 끝에, 교황은 선택했다.
"나는 이곳에 남겠네. 교황청의 마지막을... 내 눈으로 보겠어."
일개 성직자인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말미암아 살아남을 수많은 자들의 목숨을.
"내가 없다면, 자네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겠지? 이 상황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건 자네뿐이군."
얼토당토 않다. 교황의 생각은 그릇되어 있다.
당신의 목숨은 수많은 성직자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끝까지 저항하자고 말하려 한 리날도지만... 교황의 눈빛을 보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답해주겠나, 리날도?"
"...교황님, 저는."
* * *
#2. 빛의 수도원.
내전의 불길은 빛의 성녀가 거주하는 수도원에도 번졌다.
본디 몇몇 선택받은 자만이 입장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인 이곳은, 신의 허락도 받지 않은 이단심문관들에 의해 짓밟히고 더럽혀졌다.
검은 제복을 입고 수도원에 쳐들어오는 그들을 지켜보는 자가 두 명.
성국에 단 세 명 있는 성녀 중 한 명인 빛의 성녀와, 언제나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키는 기사, 테오도어였다.
"저들이 오는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녀님?"
이미 수도원의 모든 수녀는 대피를 한 뒤였다. 예언의 여신의 말씀을 들은 빛의 성녀는, 이미 모든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기에.
평범한 자라면 겁을 먹었을 테지만, 성녀는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고 여유롭게 차를 홀짝거렸다.
"당신에게 맡길게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수가 너무 많네요. 전 아직 당신을 죽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성녀가 테오도어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동안의 호위 기사 중 그처럼 오랫동안 자신의 곁을 지킨 기사는 없었기에, 그녀 역시 함부로 테오도어를 버림말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저희를 구출하러 온 성기사는..."
"모두 당했습니다. 이곳에 남은 건 저와 성녀님뿐입니다."
절망적이라고 보여지는 상황을 듣고도, 성녀는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기라도 한 양 '그런가요'라고 대답하며 다시 잔을 홀짝였다.
"당신은 제법 맘에 든 기사예요. 되도록이면 긴 시간 동안 제 곁에 있어주셨으면 합니다."
"성녀님의 뜻이라면, 분부대로."
태오도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성녀에게 맹세를 올렸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저들의 위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보여 이질감을 준다.
"뭐, 그런고로 이번에는... 제 손에 물을 묻히도록 하겠습니다."
성녀가 기지개를 켰다. 순백의 옷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피부에는 신비로움이 깃들었다.
자신이 '성녀'라고 칭해져 있지만, 자신은 신의 권능을 받은 적이 없다. 받을 필요도 없다.
신과 소통하고,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신이라 불린 자들과 발을 나란히 하며. 그게 빛의 성녀다. 성국을 수호할 의무를 지닌... '빛의 성녀'의 이름이다.
"성녀를 찾았다."
그때, 문을 박차고 불청객이 찾아왔다. 예의도 없이 흙투성이 발로 이곳에 들어온 불한당들.
"어머, 결국 와버렸네요."
"거짓된 성녀여. 키리에 님의 뜻에 따라 우리와 함께 와주어야겠다."
거짓된, 거짓된이라. 푸흡,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웃긴 건, 저들의 태도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성녀님, 성녀님'하며 자신을 추켜 세운 자들이, 지금은 총을 들고 위협하는 꼴이라니.
"푸흡, 푸흐흐흐흡."
"실성이라도 한 건가?"
한참을 배를 잡고 깔깔 웃더니, 뚝하고 웃음을 멈춘 성녀가 고개를 들었다.
자애로웠던 성녀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신들은 신의 존재를 믿나요?"
"시간을 끌어 볼 속셈인가? 구속해라."
대장으로 보이는 이단심문관이 턱을 끌어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말을 들은 이단심문관이 성녀에게 손을 대려고 하자.
딱.
성녀가 손가락을 튕긴 그 순간, 콰직 소리와 함께 눈앞의 남자가 그대로 납작 뭉개져 으깨졌다.
거대한 손으로 몸을 짓누른 것처럼,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죽음이었다.
"저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답니다."
피가 튀어 더러워진 성녀복을 문지르며, 성녀는 다시 한번 불청객들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차가운 표정이 아니라, 밝게 웃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당신들은 신의 존재를 믿나요?"
"다, 다, 당신은 대체...!"
"땡. 그건 대답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딱.
성녀가 또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콰직. 방금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던 부하가, 짓눌린 고깃 덩어리가 되어 바닥의 얼룩으로 변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또각, 또각. 성녀가 천천히 대장이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현명하진 않았으나 어리석지도 않았던 이단심문관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의 목숨은 저 성녀의 손에 올라가 있다고.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나요?"
"미, 미, 믿습니다...!"
성녀가 미소를 지었다. 저건 무슨 표정일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온 것에 대한 만족? 그것도 아니면, 무지한 자에게 보내는 비웃음?
성녀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테오도어가 찻잔에 새로운 차를 따랐다.
"흐음, 그런가요. 그렇겠죠. 신실한 믿음이 있는 자는 좋아해요."
"으... 으아..."
"그러면 두 번째 질문. 천 년 전, 최초의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던 시절... 그때에도 신이 있었을까요?"
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자신을 어떻게 하고 싶기에, 빛의 성녀란 자는 악마의 웃음을 지으며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까.
"있었을, 꿀꺽,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유는?"
"서, 성검 스펜타. 신들께서 성검을 내려 용사를 고르시고..."
"아아, 그렇게 나오는 거구나."
성검 스펜타. 천 년 전, 성도가 세워진 이곳에 내려진 악을 물리칠 횃불.
용사란 성검을 드는 자고, 성검은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성검은 곧 신의 존재 증명이요, 용사의 자격이기도 했으니.
물론, 성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맞아요. 그런 게 있었죠. 하핫, 정말 웃겨."
성녀가 발코니로 가 난간에 턱을 괴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남자가 슬쩍 밖을 쳐다보니... 수도원의 정원은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인간의 발에 밟힌 개미처럼, 여기저기 찌부러져 널려 있는 이단심문과들의 시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줄까요? 최초의 용사는 신이고 뭐고 믿지 않았어요. 신을 본 적도 없고, 신에게서 사명을 내려받지도 않았죠."
성녀의 말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천 년 전의 이야기를, 지금으로썬 전설로밖에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를 마치 직접 봤다는 듯이 얘기하고.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남자는 이내 포기했다. 성녀의 눈빛이 그를 얼어붙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마지막 질문이에요."
성녀가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 가냘픈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초의 용사는, 그리고 그를 따르던 용사 일행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최초의 용사 일행? 그런 내용이 성서에 나오던가?
분명 용사를 돕는 자들은 있었다. 하지만 전설에서는 용사의 마지막만을 다룰 뿐이었다.
용사는 성검을 땅에 돌려놓고 북왕국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책에서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마왕은 죽거나 봉인되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을...
"행복하게 살았다... 라고요? 푸흡, 아하하핫!"
지금까지 본 것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성녀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크게 웃었다.
"이래서 동화가 해롭다니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니. 우리에게도 그 이후의 이야기가 존재했는데."
"...우리?"
"마지막 답을 알려드릴게요."
딱.
남자가 생애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성녀가 무신경하게 튕긴 손가락에서 난 소리였다.
콰직. 뭉개진 시체를 향해 성녀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정답은, 아직 그들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에요. 심지어는 초대 용사마저도."
마치 진흙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꺄르륵거리는 성녀를 향해, 테오도어가 차를 건네며 말했다.
"성녀님. 죽은 자는 말을 듣지 못합니다."
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녀가 찻잔을 건네받았다.
"아, 캐모마일 티네. 고마워요, 테오도어. 역시 당신은 우수하다니까."
성녀가 테라스에 앉았다. 찬란한 햇빛이 내리쬐는 한적한 오후.
차를 홀짝이며, 성녀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역사상 가장 짧을 전쟁의 결과를 지켜보기 위하여, 그리고.
'로렌스. 그자가 과연 어디까지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운명이라는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켜 줄 자에게 기대를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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