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84화 (84/109)

〈 84화 〉 성도 붕괴(3)

* * *

#3. 어느 낡은 집.

"한스... 바깥이 소란스럽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성도의 변방에 자리 잡은 어느 작은 집. 아직 용의자의 신분을 벗지 못한 크리스가 구금되어 있는 곳.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검은 연기를 눈치챈 크리스가 한스에게 물었다.

"...아니야, 크리스. 아무것도."

성도에 퍼진 소식은 이미 한스도 대강 알고 있었다.

이단심문회가 일으킨 쿠데타. 불과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성국의 절반이 함락되었으며, 자신들의 스승인 오를란도를 비롯한 추기경도 이미 대피를 마쳤다는 이야기를.

정작 그 소식을 전해준 성기사는 급하게 다른 곳으로 가버렸지만.

"지금은 눈을 감고 푹 쉬어, 크리스. 넌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으니까."

한스가 크리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크리스는 오를란도의 첫 번째 제자다. 그리고 자신은 다섯 번째, 마지막 제자고.

그렇기에 로렌스나 에델, 로제리오보다는 함께한 시간이 짧지만... 지금의 그녀를 가장 걱정하는 건 자신임이 분명하리라.

"한스, 뭔가 이상합니다. 공기가 어지럽고... 자꾸 불안해져서..."

"착각이야, 크리스. 어제부터 별로 뭔가를 먹지 못했잖아? 그것 때문일 거야. 현기증이라고."

거짓말이다. 곧 이곳에도 전화(戰火)가 몰아닥칠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에겐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었다. 감옥에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크리스는 제 몸도 가누지 못했으니까. 대피는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한다면, 크리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가며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 것이다.

'널 그렇게 둘 순 없어, 크리스. 넌 항상 무리하는 성격이니까 말이야.'

크리스가 나서지 않게 한다. 그것이 한스의 유일한 목표였다. 따라서 지금의 그녀를 지킬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덜커덕.

문이 열리는 소리다. 그것도 단단히 잠가놓은 문을 억지로 여는 소리.

이런 상황에서 굳이 이곳을 찾아올 만한 사람은, 크리스가 걱정되어 달려온 로렌스. 그게 아니면­.

"...잠시 밖에 다녀올게, 크리스."

"한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괜찮아, 크리스. 금방 돌아올게. 그러니까 편히 쉬고 있어."

아니었다. 크리스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스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한스가 크리스를 보아온 시간만큼, 크리스 역시 한스와 함께 걸코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기에.

"가지 마십시오, 한스. 차라리 제가...!"

크리스가 한스의 팔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 손은.

'떨고 있어. 그 크리스가.'

크리스는 성기사다. 당연하게도 다섯 제자 중 가장 힘이 강했다.

힘 쓰는 일이 있으면 일단 크리스부터 찾았다. 다른 평범한 여인들이라면 싫어했을 팔근육을, 크리스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보였다.

순수하고, 언제나 싱글벙글. 꾸밈없이 솔직하고,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담백한 성격.

그 하나하나가 좋았다. 크리스와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한스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지금은? 성기사라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크리스의 팔 힘은 약해져 있었다.

"...많이 약해져 있구나, 크리스. 지금 팔씨름하면 내가 이길지도 모르겠는데?"

"한스. 제발, 제발 가지 말아 주십시오."

크리스의 간곡한 부탁. 저 애달픈 표정. 저걸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한스는 천천히 크리스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가락을 짚고는, 그대로 침대로 밀어 넘겼다.

"아픈 사람은 쉬고 있어. 명색이 사제인데, 친구 하나 회복시키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크리스는 눈을 감았다. 아니,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방금 전의 손가락? 이마에 손가락을 대면서 몰래 성법을 심은 건가?

"한스... 치사... 합니다..."

몰려오는 졸음.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짓는 한스를 바라보며 크리스는 잠에 빠졌다.

"그래, 난 치사한 사람이야. 네 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는 비겁한 남자지."

곤히 잠든 크리스의 얼굴을 보며 한스가 중얼거렸다.

왜 이럴까. 나는 이렇게 용감한 남자가 아닌데. 로렌스에게 옮은 걸까?

아니, 아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게 크리스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한스는 지금만큼의 용기는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친구라서?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 감정은 모르는 여자에게 추근댈 때의 감정과는 확실히 달랐다.

좀 더 소중한, 좀 더 무겁고 진중하게 다루고 싶은.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표현하고 싶은 느낌.

'아니, 지금은 신경 쓰지 마, 한스 크라운. 지금 해야 할 일은.'

한스가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혹시나 로렌스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검은 제복을 입은 이단심문관. 아마도 추기경 오를란도의 제자로 유명한 자신들이 목적일 것이다.

"목표 대상이다. 한스 크라운. 사제. 추기경의 제자."

"어떻게 할까? 일단은 생포가 우선인데."

"목표가 저항한다면 사살해도 괜찮다."

한스가 눈을 굴려 주위를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이단심문관의 숫자는 둘뿐. 셋이었다면 절망적이었을 텐데, 둘이라면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

"크리스티나 포르베아는 이 위에 있나, 한스?"

"글쎄요? 절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저는 당신들이 뭐 때문에 여기로 온 건지도 잘..."

철컥. 이단심문관 중 한 명이 한스에게 총을 겨누었다.

"농담할 시간은 없다.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성도에 치솟은 불꽃이 뭘 의미하는지 말이야."

"......"

한스는 생각했다. 이단심문관이라는 자들도 꽤나 성격이 급하구나. 다들 로렌스처럼 냉정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잘 됐어.

"...한 마디만 더 해도 될까요?"

"허튼짓을 하면 바로 쏴 버리겠다."

"네네, 물론이죠."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한스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그대로 입을 놀렸다.

자신이 미리 설치해 둔 성법진을 가동할 주문을, 영창을­.

"빛은 너희의 원죄를 드러낸다!"

"이런 젠...!"

손가락에 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밝게 빛나는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얇은 벽을 만들어냈다.

탕, 타당. 뒤늦게 총을 쏴 보지만, 평범한 신성력으로 만든 탄환은 빛의 벽을 뚫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이걸로 거리는 벌렸고. 그다음은...!'

딸깍. 뒷주머니에 손을 넣은 한스가 성수 뚜껑을 열어 그대로 바닥에 굴렸다.

사제는 전투력이 낮다. 성기사나 이단심문관, 수도사에 비하면 싸울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제는 보통 두 가지 수단을 취한다. 동료를 믿고 우직하게 뒤에서 치유와 보조에만 전념하거나, 혹은.

'발버둥치는 거지.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어떻게든 살 길을 찾으려고.'

바닥에 흩뿌려진 성수. 이걸로 준비는 갖춰졌다.

전투 사제술. 설마 자신의 스승인 오를란도가 혹시나 해서 가르친 기술이 이렇게나 도움이 될 줄이야.

"성화(?火)는 곧 신의 불을 상징한다!"

한스의 영창에 맞춰, 바닥에 떨어진 성수로부터 거대한 불길이 일어난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피하면 그만이었겠지만, 이곳은 밀폐된 공간. 꼼짝없이 타 죽기 싫다면, 저들은 들어왔던 입구로 다시 나가야 할 것이다.

"젠장, 일단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그게 한스의 계획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검은 곧 그분의 증명이요, 죄인을 처벌하기 위한 칼날이리라!"

문 위에 그려진 성법진이 빛나더니, 빛 알갱이로 이루어진 검 십수 자루가 나타나 그대로 아래로 향했다.

"끄아아아악­!"

"빌어먹을, 겨우 사제 따위가...!"

한 명은 무사했지만, 다른 한 명은 어깨와 다리가 검으로 꿰뚫렸다.

이단심문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으니까.

자신들은 언제나 사냥꾼이었다. 연약한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 가끔 목표가 저항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래 봤자 사냥감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저 사제는 대체 뭐냐. 아까부터 우릴 몰아붙이고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저 남자도 결국에는 사제일 뿐이다. 이 건물에 도착할 때까지 만난 사제처럼, 겁을 먹고 벌벌 떨거나 무의미한 저항 끝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젠장, 젠장젠장젠장­!"

­탕, 타당, 탕.

남자는 이미 죽은 동료의 총을 들고, 빛의 벽을 향해 계속해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반복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 금이 간 빛의 벽. 이대로 가다간 뚫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신자의 피는..."

한스가 자신의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엷게 배어 나온 피가 한스의 흰 사제복에 붉은 얼룩을 만들었다.

"아직도, 아직도 뭔가 남아 있나?"

아니, 아무리 자신이라도 계획이 끊임없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할 행동은... 모두 내 마음 가는 데로 하는 거야.

"신이 내려준 신성한 술이요."

어차피 남은 건 저 자뿐. 그렇다면, 한스에게는 뒤를 생각할 이유 따윈 없었기에.

"천사를 부르는 붉은 표적이로다."

한스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붉은 선이 몸 이곳저곳으로 퍼진다.

마치 혈관을 그려낸 것처럼 몸 위로 드러난 붉은 문양. 그 선들이 등 뒤로 모이더니, 이내 날개를 펼쳐낸다.

성서 속에 나오는, 신의 사자(?者). 천사와도 같은 날개를.

"천사의 날개? 저런 성법은 들은 적이..."

"없겠지. 최근에야 고안한 거거든."

이단심문관의 판단은 틈을 만들고, 그 잠깐의 틈은 방심이 되어 단 한 수를 만들어낸다.

사제는 이단심문관을 이길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사실이다. 아주 작은, 찰나의 기적이 없는 한은.

"이게...!"

"늦었어."

푸욱. 한스의 날개가 날카로운 창의 형태를 하더니, 단 한순간만에 이단심문관의 복부를 꿰뚫었다.

신음 하나 흘리지 못하고, 입에서 피를 뿜은 남자는 그대로 절명했다.

"후우, 후우, 우웨엑­!"

이게 문제다. 사제의 전투력을 일시적으로 크게 올려주는 성법이지만, 아직 시험 단계라 여러 부작용이 따른다.

신시아의 '마왕의 형태'. 그리고 아네모네의 '피의 성법'. 오를란도 추기경은 이 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성법을 고안해 냈다.

'속이 메스꺼워. 내장을 게워내는 것 같아. 그래도...'

이겼다. 지켜냈다. 처음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감각은 불쾌했지만, 그보다도 크리스를 지켜냈다는 기쁨이 더 컸기에.

조금만 몸을 추스르자.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면 다시 크리스에게...

­타앙.

난 데 없이 들린 총소리와 함께, 한스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

어깨가 꿰뚫렸다. 성법의 부작용 때문인가. 그다지 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설마 그런 수를 숨기고 있을 줄이야. 역시 둘을 먼저 들여보내는 게 정답이었어."

한 명이, 더 있었다. 상대가 모습을 은폐할 가능성도 고려했어야 했는데.

실책이다. 전투 경험이 없었던 탓이다. 나 같은 사제도 할 수 있었다는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시야가 좁아졌다.

"흥미로운 사제로군. 살릴 가치가 있겠어. 아아, 키리에 님이 보시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이단심문관이, 검은 제복을 입은 여성이 총을 빙글 돌리며 한스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한스의 얼굴을 발로 짓밟으며 말했다.

"주제를 아렴, 사제 씨. 우린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야. 겨우 특이한 성법 하나 가지고 우릴 이길 생각을 한 거니?"

"...당장."

"응? 뭐라고 한 거니?"

"당장 더러운 발 치워, 쌍년아...!"

"...흐응, 그래. 그렇게 나오는 거구나?"

철컥. 여인이 총을 들어 한스의 손을 겨누었다. 이단심문관의 고문법은 익히 알고 있다. 아마 손끝부터 망가뜨릴 생각인 거겠지.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시간을 끌어보는 건데.

지금이라도 로렌스가 오면... 아니, 그러긴 힘들 것이다. 언제나 사건을 몰고 다니는 그라면, 분명 지금도 그 녀석만의 싸움을 하고 있을 테니까.

'미안해... 크리스...'

"울어보렴, 사제 씨. 크리스티나 포르베아는 네가 끝나면 바로­."

한스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이단심문관의 말이 끊겼다. 슬쩍 바라보니, 무언가를 보고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너희들이 어떻게 벌써...! 키리에 님은 분명...!"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단심문관은 총구의 방향을 돌려 정면을 쏴댔다.

총성이 사그라들자 들린 건... 비명 소리였다.

"끄윽, 꺄아아아아악­!"

우두둑, 뚜둑. 한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목뼈가 부러져 혀를 내민 채 시체가 되어버린 이단심문관의 시체만이 보일 뿐이었다.

'대체 누구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한스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그리운, 언젠가는 다시 듣고 싶었던 목소리를.

"오랜만이구나, 한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백색의 장발 머리. 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수도복.

로제리오 그레고리. 잿빛 수도원의 수도사이자, 추기경 오를란도의 제자.

그리고­, 한스와 크리스의 소중한 친구인 그가 성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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