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성도 붕괴(4)
* * *
#5. 어느 피난길.
"침착하시오! 순서를 지켜..." "로라! 어디 간 거니, 로라! 대답 좀 해보렴!"
"기도를, 모두 신께 기도 드리십시오!"
"엄마, 엄마! 으아아아앙!"
수백, 수천의 목소리가 섞인 피난길. 이단심문회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피해 성도의 성민들이 줄을 이뤄 성문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누군가는 신에게 기도하고, 누군가는 손을 놓친 가족을 찾기 위해 울부짖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남을 밟고 앞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떤 두 소녀는.
"정말 괜찮겠어, 아네모네?"
"네. 언니를 두고 어떻게 저만 빠져나가겠어요."
허름한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가린 아네모네. 그런 그녀를 보며, 신시아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말했다.
"하지만 넌 성녀야. 여기서 네가 정체를 밝히고 한 마디만 하면, 성기사들은 널 가장 먼저 피난시켜 줄 거야."
아네모네는 성녀다. 이미 수많은 성민들의 앞에서 교황에게 인정을 받은 전적도 있으니, 모습을 숨기지만 않는다면 모두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릴 것이다.
"언니가 말한 대로예요. 전 성녀죠. 모두를 이끌어야 할 성녀."
허나 아네모네는 두건을 벗지 않았다. 그 붉은 머리카락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저으며, 신시아의 손을 꼭 붙잡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이에요. 전 성녀니까, 성녀라는 이름을 받았으니까 여기에 있어야만 해요. 가장 뒤에 있는 자가 안심하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알겠어. 네 뜻이 그렇다면."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모네가 미소를 짓더니, 신시아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언니는 왜 떠나지 않는 거예요? 저 때문에?"
"응, 그것도 맞지만."
뭘 당연하냐는 걸 묻는 걸까. 그런 표정을 지으며 신시아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로렌스 오빠, 아니, 신부님이 오지 않았잖아. 신부님 없이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평소였다면 이미 신시아는 폭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시도 떨어져선 안 되는 두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신시아는 오히려 편안했다. 언젠가 로렌스가 준 머리핀. 제비꽃을 본떠 만든 그 머리핀에 담긴 로렌스의 신성력이,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신부님이 느껴져. 날 걱정해주고, 날 만나러 오고 있어..."
확신은 없지만 분명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머리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로렌스의 심장 박동이 들리는 듯 했으니까.
"그러니까 신부님이 올 때까지 떠날 수 없어. 떠나면 안 돼."
옛날에는 어째서 몰랐을까. 서로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를 생각하면 바로 옆에 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신시아가 마음속으로 로렌스의 모습을 그리던 도중, 멀리서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르르르르...
"신시아 언니, 저걸 봐요!"
아네모네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걸린다.
마치 사람의 피부를 뜯어내 장식해 놓은 박제 같은 모양새. 꿈틀거리는 혈관이 돋아난 거인. 신시아와 아네모네는 저것의 모습만큼은 잊을 수 없었다.
"레고르...?"
잊혀진 도시, 버려진 도시 레고르. 신시아와 아네모네가 처음 만난 그 도시 본 괴물. 한때 성인(?人)이라 불렸던 자의 끔찍한 말로.
비록 크기는 작지만, 저 거인은 틀림없이 그때 보았던 괴물의 모습과 흡사했다.
"한둘이 아니야... 어떻게 된 거지?"
"...신시아 언니. 아무래도 저, 할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아네모네가 두건을 벗어던졌다. 핏빛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이미 아네모네는 저것을 해치운 경험이 있다. 만약 저 괴물들이 그 괴물과 뿌리를 같이 한다면, '에레쉬키갈'의 권능을 사용하면 길이 보이리라.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보네, 아네모네."
마음을 다잡은 건 아네모네뿐만이 아니다.
신시아. 로렌스의 피후견인이자 마왕 후보자.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과 자격은 자신에게도 있었으니까.
"신부님이 깜짝 놀라지 않도록, 저것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신시아가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마왕의 원초적인 힘, '마기'를 통제하는 주박이 사라지자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마세요, 신시아.
언젠가 신부님이, 신시아가 사랑하는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힘은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귀여운 동생이, 언니 오빠들이 싸우고 있는데 자신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용서해 줘, 오빠. 오빠나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니까.'
신시아가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양손을 깍지 껴,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자신의 힘은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려야 하는 걸까.
'나, 힘낼게.'
너무나 간단했다. 지키고 싶은 사람. 사랑하고 싶은 사람.
로렌스 프랑. 그에게 기도를 올리며... 신시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준비하자, 아네모네."
휘이이잉. 날개가 피어났다.
두 사람의 주위에 검은 깃털이 흩날리고, 두 쌍의 검은 날개를 펼쳐낸 신시아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신부님이 걱정하지 않게, 우리 둘이서 해보는 거야."
신시아의 눈이, 안광이 서릴 정도로 붉어진 두 눈이 밝게 빛났다.
* * *
"키리에는... 내전을 벌일 생각이다."
드레이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야 키리에는, 국장만큼은 성국에 충성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지금쯤이면 성도에 도착했을 거야... 당장 가서 막지 않으면... 콜록."
드레이크가 검은 피를 토했다. 그가 받은 고문에는 독을 이용한 것도 있었다는 증거다.
자신의 오빠의 끔찍한 모습을 보자, 안색이 창백해진 디나가 눈물을 흘렸다.
"말하지 마세요, 오빠...! 어째서, 어째서 우리한테 이런 일이...!"
내전. 이단심문회. 교황. 쿠데타. 암살. 살인사건. 크리스. 이단심문관...
수많은 단어가 머릿속을 스친다. 그리고 그 끝에 걸린 하나의 단어.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어떤 인물의 이름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에델은."
"......"
"에델은, 에델바이스는 어디 있습니까...?"
드레이크를 따르는 무리는 대부분이 당해버렸다. 아마 몇몇은 도망쳤겠지.
에델의 성격상 키리에를 따랐을 리는 없으니, 어쩌면 다른 곳으로 피신을...
"...키리에를 따라갔다."
"따라가다뇨, 키리에를요?"
난 앞으로 나아갈 거야, 로렌스.
에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날, 우리의 오랜 친구였던 알베르의 묘 앞에서 에델이 내게 한 말이.
그러니까 너도... 네 길을 나아가.
너의 말은 이런 뜻이었나? 앞으로 나아간 결과가... 키리에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는 거라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설명해 보세요, 드레이크. 에델 성격에 키리에 같은 여자의 밑에 있을 리가..."
"...'낙인'에 대해 알고 있나, 로렌스?"
디나의 부축을 받으며, 드레이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낙인? 에델에게 무슨 낙인이 있단 말인가. 에델도 이단심문관. 그렇다면 어느 정도 수준의 저주는 모두 무효로 돌릴 수 있다.
"에델이 저주라도 당했다는 뜻입니까? 에델이랑 전 몇 년을 함께 지냈어요. 에델한테 그런 게 있었다면 내가 가장 먼저 알아챌..."
"그보다 더 전이다. 에델이 이단심문관이 되었을 때보다 더 전, '발랑틴'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야."
발랑틴. 에델에게 세례를 내려준 어떤 여사제의 이름이다. 에델과 키리에가 같은 사제에게 세례를 받은 건 알고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에델이 너에겐 얘기하지 않았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와 에델은 페어였다. 서로의 등에 의지하고,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숨기는 건 당연히 없을 거라고, 당연히 그렇게만 생각했다.
"발랑틴은, 발랑틴 사제는 어떤 고아원의 원장이었다. 남자아이는 받지 않고, 오직 여자아이만 모아 놓은 시설이었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가며, 드레이크는 내가 몰랐던 사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평범한 시설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어. 연구 시설. 고아원이라는 이름 아래, 최고의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발랑틴이 만든 실험 기관."
실험 기관. 그 말을 듣자 내가 떠올린 곳은 차가운 색으로 도배된 어떤 허름한 건물이었다.
어떤 비참한 표정을 지은 소녀가 철창 안에 갇혀 있던 그 건물. 그곳에 갇혀 있던 수많은 실험체들이... 신시아의 표정이,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그곳의 아이들은 모두 '발랑틴'이라는 성을 받았지. '자매'라고 불린 거야. 그리고 그 자매들에게는 어떤 각인(??)이 심어진다."
드레이크가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낙인. 사제 발랑틴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인형'을 만들 주술."
로렌스,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거야?
응? 방금 뭘 숨긴 거냐고? 후우... 너 변태야? 남이 옷 갈아입는 거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지끈.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델이 어째서 그렇게 자신의 몸을 숨겼는가. 어째서 저주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민감하게 받아들였는가.
"하지만 그 일은 이뤄지지 않았지. 자살했기 때문이다. 발랑틴 사제가. 그리고 어둠 속에 묻혔어야 할 그 저주를... 키리에가 깨웠다."
"하지만, 그런 저주가 있다면 해주(?)하면 될 일이지 않습..."
"이 저주는 내장에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자칫 건드리면 영영 못 쓰는 몸이 될지도 몰라."
모든 상황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에델이 우리 고아원에 오게 된 것도. 막 이단심문관이 되고 난 뒤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것도.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까, 키리에한테."
"단순히 말하면."
에델이 '발랑틴'이라는 성을 지녔을 때부터, 키리에의 눈에 띄었을 때부터, 그리고 나를 따라 이단심문관의 길에 들어갔을 때부터.
모든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에델이 키리에의 충실한 인형이 된다는 결말은.
"로렌스 오빠, 왜 그러세요? 표정이... 너무 무서워요..."
표정?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
에델은 어째서 나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까. 왜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 짐은 내가 짊어질게.
...아니, 어쩌면 이미 얘기했던 걸지도 모른다. 비록 입으로 말한 건 아니라도, 내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줬던 걸지도 모른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로렌스.]
벽에 비친 내 그림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림자에 입이 생겼다. 날 비웃는 입이.
[나랑 약속했잖아.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이 목소리는, 알베르?
[총을 들어. 검을 쥐어. 지금 네가 죽여야 할 상대가 누군지,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아?]
그림자가 나를 향해 비웃으며 말했다.
[에델. 에델바이스 발랑틴. 네 친구 말이야.]
이단심문회를 막아야 한다. 목숨을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저울의 반대편에 걸린 건 성도의 성민이, 성국의 국민 모두의 목숨이다.
[간단한 일이야. 나한테 했던 것처럼, 검으로 베어버려.]
웃음소리가 점점 사그라든다. 그림자가 점차 흩어졌다.
"...오빠, 로렌스 오빠!"
디나가 나를 부른다. 방금까지 내가 봤던 것 뭐였지? 망령?
아니, 아닐 것이다. 알베르의 영혼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으니까.
"...가봐야겠습니다, 디나. 드레이크를 잘 부탁합니다."
"로렌스 오빠, 돌아가려는 건가요? 성도로?"
"...네."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의심할 여지없는 나 자신의 그림자다.
그래, 약속했지.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저한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지금 갈게, 에델.
모든 일을... 끝맺을 때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