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에델바이스가 흩날리는 때(1)
* * *
한 소녀가 있었다.
29년 전은 성국의 혼란기였기에,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다. 그 소녀도 그중 하나였다.
소녀의 '운명'이 뒤틀리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아주 운이 없게도, 그녀가 '발랑틴'이라는 이름의 사제의 눈에 띄었다는 것 하나였다.
소녀의 몸 안에는 각인이 심어졌다. 언제라도 주인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인형'이 될 수 있는 각인이.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소녀가 인형으로 전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박을 건 타락 사제, '발랑틴'이 목숨을 잃었기에.
소녀는, 그리고 다른 '발랑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매들은 근처의 다른 고아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의 고아원은 '프랑'이라는 사제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발랑틴과는 다르게 속내 같은 건 거의 없는, 순수한 호의에 의해 세워진 시설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소녀는, 소년을 만났다.
'...누구였지.'
에델바이스 발랑틴. 이단심문관이자 국장 키리에의 동생 되는 자.
언니가 주고 간 낡은 검만을 꼭 쥔 채로, 에델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걸터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지켜봤다.
살려 줘! 누가, 누가 저 괴물을 없애 줘!
모두 당황하지 마라! 물러서지 말고 전선을... 끄아악!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자신을, 키리에 언니를, 모든 이단심문관을 단순한 무기로 본 이 성국을 뒤엎을 수 있는 날이었기에.
"신나, 즐거워, 재밌어! 아아, 매일매일 이런 날이 계속되면 좋을 텐데..."
어째서 계속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 조금만 더 빨리, 어른인 척하지 말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면 되는 일이었을 텐데.
사명이니 신의 뜻이니 하는 귀찮은 건 치워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그랬다면, 로렌스를 신시아에게 빼앗기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응? 누구? 로...렌스?"
내가 무슨 말을 한 걸까. 에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금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로렌스, 로렌...스, 로렌스 프랑. 그래, 맞아. 그런 남자가 있었지.
키리에 언니가 곁에 있는 지금은 아무런 상관없지만, 한때나마 그 남자에게 호감을 품었다.
고아원에 처음 왔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게 좋아서, 그때부터 어느 순간 시선이 끌리게 되었다.
그가 성직자 학교로 간다길래 자신도 성직자의 삶을 택하고,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오를란도 사제의 밑으로 들어갔다길래 자신도 학교를 나왔으며.
그가 이단심문관이 된다고 했을 때, 자신 역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단심문관의 자리를 선택했다.
"어, 어어? 뭔가 이상해. 마음이 쑤시고, 아프고 괴로워서... 얼굴에서, 자꾸 뭐가 나오려고..."
뚝, 뚝. 낡은 검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상하다. 너무나 이상했다. 분명 지금은 즐거운데, 여태까지 있었던 힘든 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어째서인지 '로렌스'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야. 정신 차려, 에델. 언니가 너한테 맡긴 중요한 일이 있잖아.'
자신의 뺨을 툭툭 치고, 다시 낡은 검을 쥐었다.
키리에는 말했다. 이 볼품없는 검이야말로 성국을 무너뜨릴 중요한 열쇠가 될 거라고.
그롸아아아아아!
지금도 천천히 성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기형의 거인들. 저걸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바로 이 낡은 검이라는 사실을.
이 검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그 사실만으로, 에델은 마음속 깊이 기쁨이 우러나왔다.
이 검은 언니와 나의 신뢰의 증표다. 그러니, 절대 아무한테도 넘겨줄 수 없어.
"언제쯤 올까, 키리에 언니. 빨리 보고 싶은데."
감히 자신을 막으러 올 자는 아무도 없다. 설령 성기사단장이나 수도원장이 오더라도,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쓰러트리면 그만일 뿐이다.
그래, 설령 누구라 하더라도. 비록 그게...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는, 소중한 친구라 하더라도.
"...드디어 찾았어, 에델 언니."
그리고, 그 친구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어떤 소녀라도 말이다.
"뭔가 느껴졌어. 여기에 오면 누군가 있을 것만 같다고. 어쩌면, 에델 언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봤을 때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어."
검은 날개와 붉은 눈을 가진 소녀가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자신을 안다는 듯, 친근하게 굴면서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에델이 한 대답은.
"...누구? 누구길래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
자신의 이름은 에델바이스 발랑틴이다. 그런 자신을 '에델'이라고 친근하게 부를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키리에 언니뿐인데.
"어, 언니? 나야, 신시아. 신시아 생크 프랑...!"
프랑.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에델의 마음속 깊은 곳부터 불쾌함이 밀려왔다. 분명 모르는 이름일 텐데, 어째서 저 이름을 들으면 이렇게나 화가 나는 걸까.
"같이 성도에서 놀고, 수도원에서 지내기도 했잖아! 왜 그러는 거야, 언..."
신시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향해 총탄이 날아왔다.
다행히 검은 날개가 무의식적으로 공격을 막아냈지만... 마음의 상처만큼은 막아낼 수 없었다.
명백히 살의가 담긴 공격. 에델이, 그 에델 언니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그 모든 상황을 신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언니...! 설마 내가 잘못해서 그래? 내가, 내가 에델 언니를 귀찮게 해서?"
에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다니, 이건 너무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그렇게 신시아는 멍하니 에델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 언니..."
"저기 말이야, 날 언니라고 하지 말아 줄래?"
에델의 저 표정, 저 차가운 말투. 평소에 보았던 그녀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난 말이지, 누군가의 언니가 된 기억은 없거든. 키리에 언니의 여동생. 나라는 사람은 그거면 된 거니까."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고? 푸훗, 당연하지. 편하게 에델 언니라고 불러. 나도 그쪽이 편하니까.
"...훌쩍."
눈물이 그렁거렸다. 언니가 변했어. 뭔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아니, 언제까지고 우는 아이로 남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자기보다 더 어린 아네모네는 저 괴물을 막기 위해 다른 곳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을 테니까.
"알겠어, 에델 언니.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언니가 이상해졌다면, 고쳐주면 될 일이다.
나중에 신부님이나 아네모네, 아니면 한스 사제님한테라도 가서 언니를 고쳐달라고 해보자.
그렇게 결심하고는, 신시아가 검은 날개를 펼쳤다.
"아파도 참아, 신시아 언니. 금방, 금방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힘쓸 테니까!"
눈물을 닦은 신시아의 눈에서 붉은 마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직도 헛소리를... 흑? 커흑. 커헉."
신시아의 눈에 감돈 '마기'. 눈은 인간의 심상을 나타내기 가장 쉬운 장소고, 자연스레 몸에 감도는 마력은 눈에 모여 어떤 신비한 특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것이 마안(??).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나오는, 극소수의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조금 숨이 막힐 거야.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난 언니를 아프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신시아의 마안은 '질식'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상에게서 호흡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는 끔찍한 힘. 의식해서 숨을 쉬려고 하더라도, 이미 신시아의 눈을 본 순간 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신부님은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미안해, 에델 언니. 난 언니가 나쁜 사람들의 편에 서는 걸 보고 싶지 않."
신시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델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급하게 검은 날개로 가로막았지만, 에델 쪽이 미묘하게 더 빨랐다.
"꺄앗!"
에델이 내지른 발에 신시아가 뒤로 물러났다.
어째서?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라면 움직이지 못할 텐데?
"너, 날 너무 얕잡아 봤어."
마안의 가장 큰 약점은, 한 번이라도 눈을 깜빡이면 다시 시전 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효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에델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국의 모든 비밀을 관리하는 이단심문관이기에.
"숨을 못 쉬는 고문 정돈, '우리'라면 어릴 적부터 꾸준히 받아 온 훈련이야."
에델이 품에서 또 한 자루의 총을 꺼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1대 1로 싸우는 에델의 모습을 본 적 없기에, 신시아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어디서 굴러온 쓰레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신시아가 상대해야 할 것은 평범한 적이 아니었다.
이단심문회의 일등 심문관, 에델바이스 발랑틴. 역대 최고라 불리는 로렌스와 나란히 설 수 있는, 그런 강자이기에.
"네 버릇을 고쳐줄게, 꼬마야.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네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거든."
* * *
성도로 향하는 길. 신부복을 입은 어느 한 사내가 그 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회색 머리에 호박색 눈, 등에는 거대한 대검을 멘 차가운 인상의 남자.
'...만약 에델이 돌아올 수 없는 상태라면.'
로렌스 프랑. 성국의 신부이자 전(?) 이단심문관, 그리고 지금은 마왕 후보자의 보호자 역할을 맡은 남자.
빛의 성녀가 점찍은, '성국의 운명을 어긋나게 할 자'.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싸워야 하나? ...에델이랑?'
그가 성도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멸망에 이를지도 모를 성도를 구하기 위해.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런 커다란 명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로렌스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주위 사람들을 위협에서 지키는 것 정도 밖에는 없었으니까.
위험에 쳐한 성민들을 구하고, 성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 다음이었다.
'에델이랑 만나면, 에델을 구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면, 나는.'
허나 그것조차도, '운명'은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온갖 사건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체질,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로렌스는 어떤 면에서는 '용사 일행'과 마찬가지였다. 본디 이 세계로부터 부여받아야 했을 역할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짜 올리는 자.
'에델을, 죽여야 하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다시 운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문이 보인다. 본래라면 성국에 '마왕'이 나타나기 전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말았어야 할 성벽.
저 너머에... 에델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 발을 멈추지 마. 계속 달려.]
나뭇잎의 그림자, 바위의 그림자, 계속해서 달리고 있는 자신의 그림자마저도... 알베르인 것만 같았다.
알베르가 계속 말한다. 달리라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자신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델을 죽이라고.
"...내가 알아서 할 거다. 그러니까 입 다물어, 알베르."
만약 에델이 정말로 키리에의 편이 되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해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은 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은... 에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녀와 마주하고,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에델은, 결코 너랑 같은 곳으로 가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림자가 흩어졌다. 로렌스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렸다.
해가 저물어 간다. 앞으로 몇 시간 뒤면.
에델의 생일이 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