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87화 (87/109)

〈 87화 〉 에델바이스가 흩날리는 때(2)

* * *

교황청. 성국을 다스리는 교황이 머무르는 견고불변(??不?)의 장소. 최초의 용사가 성검을 뽑은 바로 그 장소에, 어떤 여인이 발을 들였다.

"하핫, 이런 식으로 오는 건 처음이네."

키리에 발랑틴. 한때나마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이단심문관­.

아니, 어쩌면 신에 대한 믿음이나 교황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을지 모른다.

전부 이 순간을 위한 가면, 키리에는 단 한순간의 복수를 위해 기나긴 세월을 웅크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호위는... 없어 보이네. 전부 교황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건가? 여왕개미를 지키는 병정들처럼?"

키리에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교황청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원래라면 지금쯤 어중이떠중이들이 교황청 주변을 감싸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뭐, 귀찮지 않고 잘 됐네.'

그래 봤자 전부 벽의 얼룩이 될 운명이었겠지만.

"자, 전부 쓸어버려. 신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이 썩어빠진 성국을 뿌리부터 뽑아버리렴."

""예!""

키리에의 손짓에 따라 휘하의 이단심문관들이 일사불란하게 교황청 내부로 들이닥쳤다.

본디 몇 겹의 보호막과 정신 교란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교황청이라 하더라도, 이단심문관의 앞에서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성국의 모든 비밀을 주무르는 이단심문관. 교황청의 보호 장치 또한 그 비밀 중 하나였으니.

"자, 자~. 여러분, 제가 왔습니다. 수면 밑에서 여러분을 지키던 이단심문회의 국장, 키리에 발랑틴이. 뭐 이제는... 더 이상 당신들의 편은 아니지만."

교황청에 입성(??)하며 키리에가 외쳤다. 마치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배우처럼.

하지만... 관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공포에 떨며 모습을 숨기고 있을 사제들의 기척도, 주제를 모르고 설펴야 할 성기사의 모습도.

키리에의 눈에 보인 것은 단 하나, 마치 이곳으로 들어오라는 듯 환히 열려 있는­, 예배실의 대문이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키리에 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여기서 대기. 지금부턴 나 혼자 들어가겠어."

뚜벅, 뚜벅.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맨 무언가에게로 가는 것처럼, 키리에가 예배실로 걸어 들어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토록 심장이 뛰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그날, 내 주변이 피로 물든 그 끔찍한 날이 있은 후로부터, 자신의 심장은 단 한 번도 지금처럼 뛰진 않았다. 삶을 이어가야 할 이유는 없었기에, 어떤 즐거움이나 기쁨도 없었기에.

'아니, 그건 아니겠네. 에델, 그 아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져 나오니까.'

자신과 같은 '발랑틴'의 낙인을 지닌 여린 꽃.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것만 같은 주제에, 본인 스스로 험난한 길을 걸어가려는 모순된 아이.

그 아이와 자신은 통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키리에는 에델의 앞에서만큼은 가면을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여기까지.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은 다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면 같은 건 쓸 필요 없이, 싸구려 연극을 할 필요도 없이.

"...여기 계셨네요, 교황님."

그래, 저 남자. 교황만 죽인다면 말이지.

"왔는가, 키리에."

마치 키리에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교황은 담담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기하네요, 교황님.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줄 알았는데."

"나 하나를 위해 잃기엔 너무나 값진 목숨들이지."

"이게 당신이 내세운 통치의 결과물인가요? 위급한 상황에서는 다들 나 몰라라 도망치는 지금의 상황이?"

교황은 성국의 기둥이다. 추기경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교황이 죽은 이상 성국에는 필연적으로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교황은 얼마나 우둔하길래 그 간단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인가. 키리에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리날도는, 성기사단장은 어디 있죠? 당신이 그토록 아끼던 방패는 어디에 두고 온 거죠?"

"성국의 미래로 보냈지."

여전히 공상적인 얘기만 하는 남자다. 대체 무슨 속셈이길래, 이토록 쉽게 목숨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인가.

"지금 잘 이해하지 못했나 본데, 당신, 곧 죽을 거라고요? 당신 같은 약한 사람, 총알 한 발이면 끝이야."

"그렇겠지."

"그런데 왜 당신은...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 누구도 모르는 미지(??)고, 어쩌면 사후 세계나 신의 세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어째서 공포를 느끼지 않는 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느낄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 건가.

"나도, 나조차도... 죽기 싫어서 발버둥 쳤는데."

죽기 싫어서, 이렇게 죽기는 억울해서. 키리에는 살아남았다. 그 끔찍한 지옥에서 버텨 내었다.

내가 저 남자보다 약한 존재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자신은 수많은 사선을 건넌 베테랑이니까.

"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지."

"...신? 풉, 푸흡, 아하하하하핫­!"

신, 그놈의 신. 내가 지옥 속에 있었을 때도, 단 한 번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은 신.

그런 신이 있기에 무섭지 않단다. 정말이지, 역시 교황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봐요, 정신 차려. 신 같은 건 없어. 설령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당신을 구해주진 않아."

"나는 신을 보았다. 신과 만났고, 이 세상의 진리를 알았다."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이 있다니. 설마 '일곱 신'을 정말로 믿기라도 하는 걸까.

곧 죽어 흩어질 어린양에게 마지막 선물로, 신들에 대한 비밀이라도 알려줘야겠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려줄까, 프란체스코? 당신이 믿는 일곱 신은 없지만... 당신이 본 일곱 신은 실제로 존재해."

"......"

이단심문회. 성국의 모든 비밀을 수집하는 단체. 그렇기에 키리에는, '이 세계의 원리'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엔릴, 엔키, 닌후르삭... 당신이 알고 있을 일곱 신의 이름은, 천 년 전에는 있지도 않았어. 일곱 신이 최초의 용사에게 성검을 내렸다고? 하, 웃기는 소리."

저 남자의 신앙심을, 삶의 이유를. 그 모든 것을 깨뜨리고자, 키리에는 과장된 몸짓을 섞어가며 그를 조롱했다.

"순서가 반대야. 일곱 신이 용사를 만든 게 아니라­, 최초의 용사 일행이 '일곱 신'이라는 가상의 신을 만들어 냈다. 이 대륙을 보다 효율적으로,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서."

미치광이의 망상이라고 해도 좋을 내용. 하지만 키리에 자신에게는 망상 같은 이야기라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위치였다.

"자신을 빛의 성녀라고 자칭하는 그 추악한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당신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 모양이네. 그 여자는­."

자신이 말하는 '진실'에 교황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키리에는 기대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절망할까? 그것도 아니면 화난 표정으로 부정할까? 뭐가 어찌 되었든, 지금까지의 삶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모형 정원에 살아온 아주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면, 그 누구라도 미쳐버릴 게 분명하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알고 있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일곱 신의 정체도. 내가 믿고 있었던 신들은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닌­, 이 지상에 있다는 사실도."

그런데, 어째서.

"허나 그럼에도... 내 신앙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네."

저 남자는 절망하지 않는 걸까.

"이미 내 마음속에는 '신'이 있기 때문이지."

"닥쳐­!"

철컥. 키리에가 교황의 이마를 향해 똑바로 총을 겨누었다.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키리에 발랑틴이 한낱 광신도보다 나약하다고?

"전부 거짓말이야! 당신의 인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낱 연극에 불과했다고! 당신이랑 나는 다르지 않아!"

"키리에. 대체 무엇이 너를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만들었는가."

"이미 그자들에게 들었어. 마왕 추종자들에게...!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혼자 남은 것도, 목숨을 희생하기로 선택한 것도 전부! '운명'의 뜻이라고...!"

심연을 들여다 본 자는 미쳐 버릴 수밖에 없다. 본래라면 복수로 끝났어야 할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전부 '운명'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나는, 키리에 발랑틴은 신들의 뜻대로 놀아나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라고 입증하기 위해서.

"그래서 수많은 목숨을 빼앗은 것인가, 키리에."

"한마디만 더 하면 그 이마에 바람 구멍을 내주겠어."

좀 더 유쾌할 줄 알았다. 좀 더 짜릿할 줄 알았다.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바쳐 일궈낸 결과물이, 마침내 찾아온 수확의 때가... 이렇게나 허무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키리에, 마지막으로 말하지."

"내가, 그만하라고...!"

노을빛이 스태인드 글라스 너머로 비친다.

일곱 신의 동상 사이로 들어온 빛이 교황에게 모여 후광을 만들어 내었다.

키리에의 눈에 지금의 교황은 마치 신과도 같아서, 지옥에서는 손 하나 내밀지 않은 그들이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러 온 것만 같아서­.

"모든 죄를 고백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회개하라. 그것만이 유일한 네 영혼의 구원..."

­타앙.

고요하고 거룩한 예배실에, 한 발의 총성만이 자욱이 울렸다.

* * *

'레고르에서 봤던 괴물?'

성문에 다다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피부가 벗겨진 괴물의 모습이었다.

잊혀진 도시 레고르에서 본 그 괴물이 성국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줄은.

'알겠군. 레고르 대성당을 수색했을 때의 자료로 만들어 낸 거야. 단단히 미쳤군, 키리에...!'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던 성문이, 성도(??) 닌우르타를 계속해서 지켜왔던 최후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저기 보이는 건.'

저 멀리, 머리를 한 데 묶은 흑발의 여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 제복, 저 여자를 지키려는 듯 빙 둘러싼 이단심문관들. 의심할 여지없는 에델이었다.

드디어... 찾았어.

"에델­!"

내 외침에 이단심문관들이 자세를 잡았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일등 심문관들이다.

총을 들고, 단검을 쥐고. 겨우 나 하나를 죽이기 위해, 십수 명에 달하는 이단심문관들이 달려드는 것이다.

"내 앞길을."

더는 발을 묶일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물어야만 한다. 에델에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부터.

등에 맨 검을 뽑았다. 같은 성직자에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가로막지 마."

세바스(안식일). 일곱 신이 자신의 권능을 불어넣은 성유물.

숫자에서 밀린다면, 다른 방식으로 저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까.

"단죄."

검을 휘두르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걸 가질 여유는 없었다.

수평으로 갈라지는 공간. 방금의 참격으로 적어도 둘은 죽었다.

아니, 둘밖에 죽지 않았다. 이미 내 공격은 간파했다는 듯이, 이단심문관들이 빠르게 나와 거리를 좁혀왔다.

"키리에 님을 위하여!"

나와 가장 가깝게 다가왔던 남자가 손에 무언가를 주사했다.

온몸에 검은 인장이 새겨지더니, 그대로 남자는 바닥에 쓰러졌다.

'자살? 아니, 죽은 게 아니야.'

남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늑대인간. 달의 기사 크루거가 그러했듯이, 남자는 달의 광기를 받아들여 비약적으로 힘을 끌어올린 것이다.

"크라라라라라아아­!"

"수호성인!"

낸 주위로 펼쳐진 빛의 벽이 남자의 발톱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위로 모여든 이단심문관의 총격에 조금씩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릴 수는 없다. 에델이, 저 멀리 바로 눈앞에 에델의 모습이 보이는데도.

'이대로는 안 돼. '성역'을 사용할까? 아니, 총을 못쓴다면 칼로 찔러올 놈들이야. 방법은... 없는 건가?'

눈을 감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조차 이들을 모두 죽이고 에델에게 향하는 방법이었다.

억울했다. 꽉 다문 이의 안쪽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아주 조금, 단 한 발자국이라도 에델에게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곤란해 보이네, 로렌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 이제는 '생소하다'라고 느껴질 법한 목소리였다.

"아직 늦지 않았지? 에델의 생일."

늑대인간의 목을 꺾어버리며, 전장 한복판으로 어떤 남자가 난입했다.

길게 내린 머리, 중성적인 외모의 백발의 청년.

그리고, 잿빛 수도원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수도복.

"...로제리오?"

"오랜만이야, 로렌스."

로제리오 그레고리. 그가 나타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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