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88화 (88/109)

〈 88화 〉 에델바이스가 흩날리는 때(3)

* * *

"로제리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에델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로제리오 그레고리. 추기경 오를란도의 다섯 제자이자... 나의 친구이기도 한 남자.

그가 잿빛 수도원에 들어간 날 이후로는 로제리오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정도일까.

오랜 친구의 얼굴을 보는 건 기쁜 일이지만­.

"하, 하핫. 좀 더 괜찮은 장소에서 여유롭게 얘기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사각에서 자신의 급소를 노린 이단심문관의 팔을 뽑아버리며, 로제리오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 오를란도 추기경님이 나를 보냈어. 너를, 다른 제자들을 도우라면서 말이야."

"스승님? 추기경님을 뵈었습니까?"

"성도의 바깥에 있는, 방치된 낡은 성당. 그곳의 비밀 지하고에 다른 사람들이 있어. 한스와 크리스티나도 그곳으로 옮겼고. 리날도 성기사단장이 그들을 지키고 있으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전장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수련장에 있는 것처럼, 로제리오는 묵묵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의 공격을 쳐냈다.

"그럼 교황님도 그곳에 계신 겁니까?"

"...아니.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로렌스. 지금은 일단­."

로제리오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 멀리,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여인이 서 있는 곳.

"에델을, 만나러 가야지. 그러려고 이곳까지 온 거잖아?"

"...고맙습니다, 로제리오."

저잣거리에 나도는 삼류 소설처럼, 로제리오가 내 등을 떠밀며 말했다.

"여긴 나한테 맡겨, 로렌스. 예전부터 에델이 엇나갈 때 바로잡는 건 네 역할이었잖아."

여전히 연극 대사에나 나올 법한 오글거리는 말이나 하긴. 정말이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니까.

하지만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 에델과 얼굴을 맞댈 기회가.

"저 자다! 키리에 님이 말씀하셨던 특별 대상이라고!"

"에델바이스 님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

여전히 수많은 심문관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내 등 뒤는 더 이상 비어있지 않았다.

"로렌스를 내버려 둬.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로제리오가 자세를 잡았다. 주먹을 쥐고, 무릎을 굽혀 허리를 낮게 낮추며.

그러곤 읊조렸다.

"너희 상대는... 바로 나야."

그 순간, 로제리오의 발 밑을 중심으로 거대한 성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봐 온 그 어떤 것보다도 거대한 크기의 성법진이.

로제리오의 특기는 성법진의 작성이다. 교황청에서 탐낼 정도의 재능이 녀석에게는 있었으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지.

"신의 창이 되길 맹세했음에도, 창날을 무고한 성민들에게 향한 죄. 너희들에게 가장 먼저 내려야 할 심판은, '구속'이다."

성법진에 물든 대지에서 사슬이 뿜어져 나왔다. 심판을 받아 마땅할 죄인을 묵는 데 쓰는 포승(??)의 사슬이.

사슬이 심문관들의 몸을 강하게 조인다. 온몸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나도, 온몸의 관절이 서로 어긋나 뒤틀려도 사슬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이게...!"

철컥. 이단심문관 중 하나가 로제리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걸 본 로제리오의 반응은...

"아, 넌 초보구나."

쏠 테면 쏴보라는 듯, 오히려 그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가 양팔을 뻗었다.

"죽어라...!"

심문관의 방아쇠를 당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총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방아쇠는 당겨졌으나 그 안에 있는 총알이 사라진 걸 테지.

그도 그럴게, 이단심문관이 사용하는 탄환은 모두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총은 사용할 수 없을 거야. 적어도 내 근처에선."

벌레를 보는 듯한 차갑고 일그러진 얼굴로, 로제리오가 천천히 심문관에게 다가갔다.

수도사의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신의 뜻을 암기하고, 경전을 재해석해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내기도 한다. 수도원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집단'으로서의 수도사가 가지는 역할은 하나다. 성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른 집단, 교황청이나 성기사단, 이단심문회 등을 견제하는 것.

"그래, 모를 만도 하지. 우리 수도사가 다른 집단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에 나선 건 20년 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외딴 곳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수도사가 어떻게 견제를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수도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수도사는, 신의 뜻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무력. 다른 집단을 압도하는 무력.

그것도 오직 같은 '성직자'에게 특효를 발휘하는 성법을 다루는 자들이 바로 수도사다.

수도사가 심판해야 할 대상은 마물이나 마왕이 아니다. 신의 은혜를 입고도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배교자들. 우매한 변절자들. 수도사들이 상대하는 건 그들이다.

"신의 뜻을 역으로 거스르는 너희를 심판하기 위해서."

뚜두둑. 로제리오는 남자의 목을 잡고 그대로 꺾어버렸다. 일말의 손속도 두지 않고, 가장 확실하게 목숨을 빼앗는 방법으로.

수도사는 각 지방마다 제각각의 특색이 있지만, 로제리오의 '잿빛 수도원'은 특히나 그 이름이 널리 퍼져 있다.

'신성력의 봉인'. 성직자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잿빛 수도원이니까.

나조차도 로제리오와 겨뤄서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로제리오의 성법진에 조금이라도 발을 디딘다면, 그 순간 승패는 크게 기울기 때문에.

"이미 이곳에 발을 들이민 그 순간부터, 너희의 운명은 결정 난 거야."

로제리오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까보다 훨씬 정교하고 거대한 규모의 성법진이 주위를 빛냈다.

"나를 이곳에 보낸 신의 뜻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군.'

길이 열렸다. 로제리오가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떨거지들의 발을 묶어 준 덕분에 길이 열렸다. 에델에게로 향하는 길이.

"이만 가보겠습니다, 로제리오."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로제리오가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약속을 맺을 때 했던 그 자세 그대로.

"에델을, 저 녀석을 반드시 데려 와, 로렌스. 에델은 옛날부터 못 미더운 구석이 있었으니까."

"에델에게 안 들린다고 흉을 보는 겁니까? 나중에 에델에게 일러줘야겠군요."

내 나름대로의 각오를 담아, 로제리오의 주먹에 내 주먹을 맞부딪혔다.

* * *

"어머, 벌써 끝?"

싸움의 흔적으로 산산이 부서진 길 위에서, 에델이 누군가의 목을 붙잡고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신시아. 성국의 마왕 후보자. 비록 그녀가 마왕의 힘을 어느 정도 억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커, 커흑, 에, 에델 언니...!"

결과는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신시아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반면, 에델의 몸에는 이렇다 할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되도 않는 싸움은 거는 게 아니라고."

"언니... 정신, 차려..."

이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지금의 에델에게는 더 이상 알 바가 아니었다.

소중한 기억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아랫배에 욱신거리는 이 각인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이 상아색 머리의 소녀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목을 부러뜨려 줄까? 아니, 아니야. 넌 그런 걸로 죽진 않을 것 같으니까. 이게 이단심문관의 '감'이라는 걸까...?"

아. 분명 누군가에게 들은 말인데. 언제나 '육감'을 들먹이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하는 어떤 철부지의 말.

아니, 생각하면 안된다. 쓸 데 없이 많은 생각은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만 할 뿐이니까.

"에델 언니... 신부님이, 슬퍼할 거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소녀가 내뱉은 말이, 에델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아까부터 신부님, 신부님. 대체 그 신부님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길래, 죽을지도 모르는 이 순간까지도 그 사람의 이름을 연호하는 걸까.

"짜증 나. 대체 그 '신부님'이라는 게 누군데? 그렇게 잘난 사람이면, 좀 더 큰소리로 불러 봐. 구해달라고 소리 질러 보란 말이야!"

에델의 말에는 악의와 적의 밖에는 없었다. 소중한 사람의 있을 수 없는 모습을 보고, 신시아는 고개를 떨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흐윽, 으흐윽..."

이대로 끝인 걸까. 나로서는 에델 언니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는 걸까.

그런 절망감이, 신시아의 속에 있는 무언가를 조금씩 깨우기 시작했다. 언젠가 '마왕'이라 불릴 무언가를.

하지만... 그 '무언가'는 이내 다시 사그라들었다. 신시아의 눈동자에, 저 멀리 시선의 끝에, 누군가의 모습이 걸쳤기 때문이다.

"아, 아으, 신... 부님..."

정돈되지 않은 회색 머리카락. 무슨 생각인지 모를 딱딱한 얼굴. 하지만... 언제나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눈빛.

로렌스 프랑. 자신의 후견인이자 사랑하는 단 한 사람.

"신시아!"

"로렌스... 오빠..."

로렌스의 외침에, 에델이 뒤를 돌아보았다.

"...로렌스?"

로렌스, 로렌스, 로렌스. 어째서일까. 그 이름을 들으니, 그 이름을 가진 남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에델. 신시아를 놔주십시오."

"아하, 네가 이 꼬맹이의 '신부님'인가 하는 그거구나?"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에델이 로렌스를 도발했다.

그리고 그런 에델의 모습을 보며, 옛 모습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로렌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에델. 당신의 과거도. 제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아니, 그렇다고 착각한 '발랑틴'의 모습도."

발랑틴. 그 단어를 언급하자, 에델은 흥미로운 듯이 로렌스를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저 남자는 대체 뭐길래 발랑틴을, 나와 언니의 연결고리를 마음대로 언급하는 걸까.

"다시 생각해도 제가 바보였습니다. 에델이라면, 당신의 성격이라면 나한테 모든 걸 털어놓진 않았을 텐데. 내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라도, 자신의 마음속에만 아픔을 고이 묻었을 텐데."

로렌스가 무릎을 접었다. 발을 땅에 디디고, 시선은 곧게 정면으로.

"지금 무슨 짓이야? 목숨 구걸이라도 할 셈?"

"에델. 이건 제 잘못입니다. 당신의 파트너로서, 당신이 겪은 모든 일을 알고 공감해야 했습니다."

저 남자는 갑자기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아까부터 친하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나한테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하는 걸까.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군요. 그렇다면 에델,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니, 아니었다. 저 남자의 눈빛은 패배를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

"에델, 난 너를 혼내 줄 거다."

"......!"

일순, 아주 작은 찰나의 순간, 에델의 손에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온몸의 근육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그런 감정이 들었기에.

눈이 깜빡였다. 눈꺼풀이 덮이고, 다시 열리는 그 사이, 이미 로렌스가 신시아를 품에 안고 반대편으로 몸을 날린 후였다.

"그러니까 일단, 신시아는 돌려받겠어."

"너, 넌 대체...!"

바로 공격을, 아니, 그러지 못했다.

현기증, 두통.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에델의 움직임을 막았기 때문이다.

"괜찮습니까, 신시아?"

"응... 신부님... 미안해. 나, 나는... 에델 언니를 구하지 못했어..."

이 순간에도, 이미 몸과 마음이 엉망진창이 된 상태에서도, 신시아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또 기특해서, 로렌스는 미소를 지으며 신시아에게 속삭였다.

"수고했습니다, 신시아. 이제 남은 건 저한테 맡기세요."

신시아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으며, 로렌스가 장갑을 고쳐 썼다.

"친구의 잘못은... 친구가 해결해야 하는 법이니까."

"...응. 믿을게, 로렌스 오빠..."

그 말과 함께 신시아는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날 땐, 에델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봐주길 꿈꾸면서.

"...이제 우리뿐이네."

다른 사람은 없다. 이곳에 있는 건 신부와 이단심문관도, 추기경의 제자들도 아니라­.

로렌스와 에델. 막역한 친구 사이인 둘 밖에 없으니까. 그렇기에, 더 이상의 경어는 불필요했다.

"아플지도 몰라, 에델. 널 상대로 가볍게 할 수는 없으니까."

"너, 함부로 날 부르지 마...! 네가 대체 뭔데 날..."

"친구다."

친구. 에델의 동공을 크게 만든 말은 다른 게 아니었다.

"우리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처음 만나... 거의 20년 가까이 곁에서 지낸 친구 사이. 그래, 소꿉친구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저 남자의 태도가 화나서, 로렌스의 저 눈빛이 너무나도 짜증나고, 또 그리워서­.

"그러니까 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나만이."

에델의 몸이 떨려왔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무언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속이 역겹고,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기분. 이 불쾌함을 조금이라도 빨리 해소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잔말 말고 덤벼. 네 머리에 총알이라도 쳐박지 않으면, 오늘은 편히 못 잘 것 같으니까."

"...역시 너답네. 좋아, 에델. 그럼 시작하자."

로렌스가 검을 들었다. 에델은, 일등 이단심문관 에델바이스 발랑틴은 진심을 다해야 할 자이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써야만 하기에.

그리고 말하길­.

"그때 그 시절처럼, 우리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되새기며."

두 사람의 발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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