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에델바이스가 피어나는 때
* * *
"여신 에레쉬키갈이시여, 부디 저의 기도를 들으시옵고."
레고르의 괴물이 날뛰고 있는 성벽 근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부수며 성도를 짓밟는 괴물의 발걸음을 멈춘 건... 아주 작은 소녀였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망자들에게 안식을, 꺄앗!"
아네모네. 성국의 세 번째 성녀.
그녀에게는 에레쉬키갈의 권능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저 괴물들을 막을 힘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발을 묶는 게 한계였다. 몇 번을 죽여도, 몇 번이고 피를 역류시켜도... 온몸이 피박된 거인들은 다시 몸을 부풀렸다.
"수가... 너무 많아... 이대로라면...!"
입에선 피가 흘렀다. 신시아 언니는 잘 해내고 있을까.
온몸에 힘이 빠져도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아직 피난민들의 대피가 끝나지 않았다. 만약 저 괴물들이 이 너머로 나아간다면... 성도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힘내지 않으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든든한 신부 오빠도, 언제나 싱긋 웃어주는 신시아 언니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을 도와줄 사람 따윈, 아무도.
"수고했습니다, 성녀님."
성녀. 분명히 자신을 가리키는 단어.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 중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아네모네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 구?"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복장이라도 익숙하면 좋았을 텐데, 저 남자는 성기사의 갑옷도, 이단심문관의 제복도 입지 않았다.
아니, 남자가 아닌 건가? 오빠가 아니라... 언니?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남자인데.
'피가, 묻어 있어...!'
낯선 이의 주먹에 흥건히 묻어 있는 피. 피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아는 아네모네였기에,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피는 동물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경계심을 늦춰선 안된다. 분명 위험한 사람이다. 여차하면, 이쪽에서 먼저 공격을...!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로렌스 프랑. 그가 보내서 온 거니까요."
"...신부 오빠가요?"
'아니, 아냐아냐. 정신 차려, 아네모네. 분명 함정이야. 나랑 신부 오빠의 관계를 알고 있는 나쁜 사람이 분명해...!'
"저, 절 속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전 그 정도에 넘어갈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아네모네의 발 밑에 있는 피 웅덩이에서 검이 떠올랐다. 피로 만들어진 혈검(血?)이 날을 세우며 남자를 위협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요."
딱.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소리가 아네모네의 귓가에 들리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철벅 소리를 내며 다시 핏자국으로 돌아간 혈검. 신의 권능조차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아네모네는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무례를 저질러 죄송합니다, 성녀님."
"히, 히익! 다가오지 마세요!"
품에 찬 검을 뽑으며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허리에 찬 무척이나 낡은 검. 남자가 하늘 높이 검을 들더니, 그대로...
"행동 정지. 모든 권능을 해제한다."
"지, 지금 무슨...?"
크르르르르르...
낡은 검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모든 거인들이 고막을 흔드는 거대한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레고르의 괴물을 통제하는 제어 장치. 그 낡은 검의 정체를 모르는 아네모네의 눈에는, 지금의 풍경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처럼 느껴졌으리라.
"어, 어, 어떻게 한 거예요? 대체 그 검이 뭐길래..."
"당신의 신부님이 보낸 겁니다. 아까 전에 말했다시피."
마치 그날, 그 잊혀진 도시의 광경처럼 빛 알갱이가 하늘 위에 흩뿌려졌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네모네는 하나만큼은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성국 역사상 가장 짧았던 전쟁이 지금. 종막을 고했노라고.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남자가 아네모네에게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로제리오 그레고리. 잿빛 수도원의 수도사이자, 추기경 오를란도 님의 제자 되는 사람입니다."
* * *
"리날도 님! 아직 피난민의 행렬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서쪽 방어선이 돌파당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성기사단장 리날도.
그의 방패 뒤에는 수천,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모든 건 교황의 명령에 따라. '성국의 미래를 지켜라'라는 간곡한 부탁에 의해. 리날도는 피난소가 마련되어 있는 성당에,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프란체스코. 이게 당신의 선택인가? 나라는 존재가 전황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한 건가.'
교황은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다. 교황 자신이 피난소로 온다면, 국장 키리에는 이곳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를 죽이겠지.
그녀와 싸운다면 어떻게 될지, 리날도도 확신할 수 없을 테니까. 마치 손 틈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놓치게 될 것이다.
'차라리 필사의 각오로 싸웠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리날도가 주위를 살펴봤다. 자신이 옴으로써 목숨을 구한 사람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은 성인(?人)이 아니었다. 자신은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다, 단장님! 보고입니다!"
"이번엔 또 뭐냐? 어디가 뚫렸다는 말인가?"
"아니, 그게 아닙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든, 혼자만의 힘으로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설령 그 자가 '용사'라 하더라도.
하지만, 만약 혼자가 아니라면.
"수도사가 왔습니다! 잿빛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지금 성도 각지에서...!"
"수도사? 그 은둔자(??者)들이 밖으로 나왔다고?"
상황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이 상황을 알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아직 이 성도에 희망은 남아있다는 것을.
"...모두 검을 들어라."
리날도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망설이지 않는 것이기에.
"성도를, 우리의 성지를... 되찾을 때다."
* * *
무너진 성벽 위. 밤하늘이 뒤덮은 성도의 모습을 바라본다.
'레고르의 괴물이 무너졌다. 로제리오 녀석, 잘 해냈나 보군.'
에델이 쓰러지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어떤 물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얼핏 들을 수 있었던 에델의 중얼거림.
로렌스, 이... 검을...
낡은 검을 쥐었을 때, 저 괴물이 일제히 행동을 정지했다. 그 검과 괴물은 모종의 연관이 있었던 거겠지. 가령 일종의통제 장치라거나.
주박에서 해방된 에델은 마지막까지 걱정했던 거다. 누군가 저 괴물을 막아달라고 말이지.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어. 이걸로 이단심문회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모든 게 끝났을 무렵, 로제리오가 뒤늦게 성벽으로 올라왔다.
난 이런 장치를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까, 낡은 검은 바로 로제리오에게 건넸다. 그러곤 부탁했다. 아네모네를, 지금쯤 거인을 막고 있을 그녀를 구해달라고.
"마침 오는군."
"신부 오빠!"
저 멀리,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아네모네가 내게 달려왔다. 로제리오도 함께.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신부 오빠! 아, 신시아 언니는..."
"쉿. 조용히 해주세요, 아네모네."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지금은 곤히 잠든 사람들을 깨울 수 없으니까.
신시아. 그리고 에델. 두 사람이 내 무릎에 기대 사이좋게 눈을 감고 있다. 조금 불편한 자세긴 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을 더러운 바닥에 눕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성공했군요, 로제리오."
"네가 해낸 거야, 로렌스. 내가 아니라 네가."
로제리오가 낡은 검을 꺼내더니,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다른 곳의 상황은?"
"다른 수도사들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있다. 다른 자들이라면 모를까, 같은 성직자라면 수도사를 이기기 쉽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군요."
이단심문회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다.
국장 키리에. 그녀의 모습을 봤다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니까.
"갈 건가, 로렌스?"
"...아니.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 검을 완성하지 못했어요."
세바스를 잡았다. 나의 마음에 공명하여, 새로운 권능을 내리는 성유물.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지금 이 상태로는, 키리에의 앞에 선다 하더라도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아직 검이 다 벼려지지 않았다. 좀 더 예리하게, 좀 더 날카롭게. 확실하게 키리에를, 악연을 끊을 수 있어야만 한다.
"키리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지금쯤 다시 어둠에 몸을 숨겼겠죠. 여태까지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당분간은 바빠지겠군. 이런 일을 할 이단심문관이 반은 죽었으니, 우리라도 나서지 않으면."
로제리오의 곁에서 쭈뼛거리던 아네모네가 조심스럽게 내 귀에 대고 물었다.
"저, 두 분은 무슨 사이예요? 이분은 신부 오빠를 친구라고 하던데."
"친구 맞습니다. 그것도 꽤나 통하는 친구. 둘 다 '평범'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 똑같잖아요?"
"음... 확실히 그건 부정 못하겠어요."
내 무릎 위에 있는 신시아와 에델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아네모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두 사람은 왜 여기 있는 건가요? 신시아 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갑자기 에델 언니가 여기 왜...!"
"...가끔은 당신이 부럽습니다, 아네모네."
아무것도 몰라도 포기하지 않고, 순수함을 잃지 않는 그 미소가.
"걱정거리 하나 없어 보이는 그 태도가 정말 부럽네요."
"뭐, 뭐예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 줄 아세요! 옷은 찢어지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피를 너무 써서 어지러울 정돈데!"
"네, 네. 수고 많았습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드릴까요?"
"그럼 고맙지만요오..."
아네모네가 고개를 숙여 내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래, 아네모네가 없었다면 분명 더 큰일이 생겼을 테니까.
"좋은 아이들을 만났구나, 로렌스."
"그런 편이죠. 제가 사람복은 좋잖습니까."
"확실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신시아와 아네모네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줬으면 합니다. 아네모네도 아네모네지만, 신시아의 기력이 너무 쇠약해졌거든요."
내 말에, 로제리오는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마치 우리 사이에 뭘 돌려 말하냐는 듯이.
"속마음은?"
"...에델과 단 둘이 있게 해줬으면 합니다. 아직 전해줘야 할 것이 있어서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로제리오가 신시아를 들쳐 업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둥거리는 아네모네를 짐짝처럼 한쪽 팔에 껴안은 건 덤으로.
"아, 안 돼! 신부 오빠! 에델 언니한테 이상한 짓 하면 안 돼요!"
"안합니다."
"하더라도 신시아 언니한테 먼저! 알겠죠? 꼭이에요!"
정말이지. 무슨 걱정이 저 모양이람.
로제리오와 다른 사람들이 떠나고, 마침내 에델과 나, 둘만 남았다.
불길이 잦아들고, 완전한 어둠이 깔린 시간. 오직 밤하늘의 별들만이 주위의 거리를 흐릿하게 비춘다.
'오늘 하루는 모두에게 기억될 거야.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의 날로.'
그리고 그건 에델에게도 마찬가지겠지. 비록 조종당했다 하더라도, 에델은 분명 키리에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놔야겠는걸.
"으응, 으으으..."
날씨가 추운 건지, 에델이 옅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덜덜 떨었다. 오늘은 특히나 기나긴 날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입고 있던 신부 코트를 벗어 에델에게 덮어주었다. 그러자 조금은 따뜻해진 건지, 에델이 귀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은 그냥... 눈을 감아 둬, 에델. 앞으로 많은 게 바뀔 거니까.'
이사도라나 베티 자매님께 전해야겠는걸. 생크 수도원에 에델이 돌아갈 거라고. 아, 그러고 보니 에델이 입던 수녀복은 어디다 뒀더라.
느긋하게 바라본 에델의 얼굴은 생소했다. 생각보다 긴 속눈썹이라던가, 고생한 흔적이 보이는 뺨이라던가. 여러 곳이 말이다.
"으응..."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에델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로, 렌스...?"
마치 악몽이라도 꾼 어린애처럼, 에델이 내 옷깃을 붙잡고 세게 끌어당겼다.
"너무 슬픈 꿈을 꿨어, 로렌스. 네가 죽는 꿈. 네가... 영원히 날 떠나는 그런 꿈."
"그렇군."
"지금 이것도 꿈이겠지만. 히힛."
아기처럼 응석을 부리는 에델.
바보 같은 말이나 하긴. 내가 널 떠날 리가 없는데.
"꿈 같은 게 아니야, 에델."
"...응? 방금 뭐라고...?"
이런, 아직도 잠이 덜 깬 걸까.
앞으로 세 시간 뒤면 어떤 날이 되는지도 모르고.
"아, 맞다."
그걸 전해줘야지.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이렇게 둘만 있을 때는 드무니까.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겨우 고른 '그걸'.
에델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더럽고 찢어진 머리띠를 끊어내고, 한 가닥 한 가닥 정성스럽게 빗어 머리카락을 한 데 모았다.
"로렌스? 지금... 뭐 하는 거야...?"
"자, 됐다."
완성. 생각보다... 무척이나 잘 어울리네.
"리본?"
하얗고 작은 꽃. 그녀의 이름을 본뜬 에델바이스가, 마치 꽃밭을 이룬 듯 수놓아진 아름다운 리본.
그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에게 계속 말하고 싶었던 말.
"생일 축하해, 에델."
너의 인생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 모두에게 축복받는 기쁨이 되기를.
에델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밤하늘 사이로, 한줄기의 별똥별이 은하수를 갈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