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외전 여신의 뜻으로
* * *
성도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숲 속. 위험을 감수하는 상인들만이 지나다니는 험난한 장소.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어야 할 그곳에, 한 명의 여인이 호숫가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철벅, 철벅.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여인의 몸은 매혹적이었다. 뒤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곡선을 그리는 가슴과, 늘씬하게 빠진 팔과 다리.
옛날 전설에 나오는 숲의 요정이 있다면 그녀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근처에서 번져 나오는 피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째서... 뭐 때문에...?'
키리에 발랑틴. 한때 이단심문관의 국장이었던 자이자... 성국에 쿠데타를 일으킨 자. 그리고 교황 살해자.
'아직도... 기분이 나쁜 거지?'
키리에는 교황을 죽였다. 그의 이마에 한 발을, 자신의 모든 인생이 담긴 한 발을 날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키리에는 후련하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교황을 죽인다면, 분명 후련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다른 이단심문관이 모두 죽어서?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한번 쓰고 치워버릴 버림패였다.
굳이 미련이 있다면... 그래, 에델. 에델바이스 발랑틴.
'발랑틴'의 성을 지닌 자신의 소중한 동생. 혹은, 장난감. 그녀를 챙겨 오지 못했다.
"으흣, 아하하핫..."
자신의 지난 세월에는 언제나 '목표'가 있었다.
복수. 신들에 대한 복수. 자신을 구하지 않은 이 나라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복수.
하지만 정작 결과를 이루어낸 뒤엔? 교황을 죽이고 난 뒤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불태우고 난 뒤에 남은 것은, 거름이 되지도 못할 한 줌의 재 뿐이었기에.
"우선은... 이곳을 떠나야겠어. 남왕국, 그래, 남왕국이라면..."
아직 자신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키리에는 곧바로 다음 계획을 세웠다.
우선은 남왕국으로 가자. 공권력이 마비되고, 나라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남왕국이라면 망명하기도 쉬울 것이다.
호수에서 피를 씻고 나온 키리에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보름달. 너무나 밝은 달이 마치 자신만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꼭 달의 여신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만 같아서.
아니, 그건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 저건 달일 뿐, 달의 여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곱 신 같은 건, 전부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왕국으로 갈 생각인가요?"
나무에 걸터 앉아 능글맞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남자만 빼면 말이다.
"숙녀가 목욕 중인데, 그걸 쳐다보는 건 매너가 너무 부족한 거 아닐까?"
"숙녀라. 뭐,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겠죠."
안경을 닦으며 무심하게 대답하는 남자.
무심결에 교황을 죽이고 허탈감에 빠진 자신을 데려온 자가, 바로 저 남자였다.
"그래도 섭섭하네요. 당신을 성도에서 무사히 빼낸 게 누군지 벌써 잊은 겁니까?"
"흥. 너희가 없었어도 그깟 성도쯤, 눈 감고도 빠져나올 수 있었어."
"너희, 너희라... 우리가 누군지 알아차렸나 봐요?"
옷을 다 입은 키리에가 머리의 물기를 짜내며 대답했다.
"당연히 알지. 너희 같은 놈들의 면상에 총알을 박아주는 게 내 일이었거든."
검은 로브. 남자의 몸 전체에 짙게 깔린 마기(??)의 흔적.
평범한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성국의 마왕 후보자 중 하나였던 '달의 기사, 크루거'를 이용해 성국에 테러를 일으킨 범인.
마왕 추종자, 레서. 키리에가 보고받은 인상착의와 일치했으니, 키리에는 단박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마음이 동하면 지금이라도 총을 들어도 좋습니다. 물론 순순히 당하지는 않겠지만."
"하, 이제 와서 그런 귀찮은 일은 안 해. 난 이제 이단심문관도 뭣도 아니거든."
몸을 짓누르는 탈력감에, 키리에의 시야가 잠시 흐려졌다.
아, 더 이상 내 삶에 의미는 남아있지 않구나. 그렇게 생각한 키리에는 레서를 지나쳐 그대로 떠나려 했다.
"남왕국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
"다음 용사의 행선지는 남왕국이 될 겁니다. 그럴 '운명'이죠. 뭐, 지금은 공국에 있긴 한데... 그곳의 마왕이 쓰러지는 것도 순식간일 테니까요."
허나 레서의 말은 키리에에겐 그다지 들리지 않았다.
남왕국이 안되면 뭐 어쩌겠는가. 북왕국, 서연방국, 북왕국. 키리에가 갈 수 있는 곳은 많았다.
어디로 가도 되었다. 어디에 가도 키리에는 추격을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어디에 가도...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용사, 용사라... 아니, 오히려 재밌을 것 같아. 갑자기 용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날 버린 신들이, 이 세상이... 끔찍한 절망에 빠지지 않겠어?"
진심 따윈 조금도 담기지 않았다. 그야 당연히...
"푸훕, 푸하핫! 설마 겨우 '당신 정도로' 용사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배를 잡고 웃었다. 정말이지, 이래서 목표를 잃은 사람들이 재미있다니까.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아핫.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렸나 봐?"
"정말 그랬다면, 우리가 당신과 접촉할 일은 없었겠지. '마왕 추종자'라는 집단이 생길 리도 없고. 용사가 생기는 족족 죽이면 그만이니까."
저 남자의 이마에 총을 갈기면 조금은 편해질까.
키리에의 손이 품 속에 있는 총에 닿은 순간, 레서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멈칫. 키리에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15년 전 그날, 왜 당신만이 그 참혹한 지옥에서 살아남았는지... 궁금하지 않은 겁니까?"
그날. 그 끔찍한 날. 지금의 '키리에 발랑틴'을 있게 한, 그 참혹한 날의 진상.
저 남자는 키리에에게 있어서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역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허튼 말을 한다면, 바로 죽여버리겠어."
"그러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며, 레서가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인간의 그릇으로는 담을 수 없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어떤 운명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했다.
어째서일까. 저 남자의 말 따위 신뢰할 이유가 없는데도.
키리에의 심장이, 다시 박동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키리에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마왕이 되십시오, 키리에 발랑틴. 성국의 마왕이, '배격'의 자리가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국을 멸망으로 몰고 갈 마왕. 그 후보 중 하나가 키리에라는 사실을 아는 건 오직 신들과 '운명' 뿐이었다.
* * *
"성국 내에 변절자가 있습니다."
교황이 죽고 얼마 후, 교황 대리로 성국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있던 추기경 오를란도가 어느 성당으로 초대받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출이었다. 빛의 성녀에 의한 호출.
"... 그 말은, 키리에 전 국장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 아니요. 그녀는 변절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성국의 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추기경 오를란도는 성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성녀님. 변절자가 있다고 하심은...?"
"말 그대로입니다. 성국 고위층 중 한 명이 마왕 추종자와 결탁하고 있다. 아니, 결탁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왕 추종자가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키리에를 데리고 사라졌다는 의문의 남자. 그가 마왕 추종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성녀는 자신의 호위 기사를 통해 알아냈다.
하지만 어떻게? 이곳은 성국의 심장, 성도(??)다. 외부의 침입이라면 자신이 모를 수가 없다는 얘기다.
"차원문의 사용 흔적이 있었다는군요. 그것도 고위층만이 알고 있는, 교황청의 비밀 차원문이."
성벽을 넘지 않고 성도에 올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교황청에 있는 비밀 차원문을 사용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걸 사용할 수 있는 건 성국의 고위층 뿐. 그 존재를 아는 건 교황 본인과... 세 명의 추기경. 성기사단장. 그리고 잿빛 수도원장과 키리에 국장 정도가 다였다.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쪽에서 당겨줄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쌍방의 협력이 차원문의 기본 조건이니까요." "당겨준 사람... 그 자가 배신자라고, 성녀님은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전부터 의혹은 있었다. 마왕 후보자 크루거의 폭주 사태 때도, 이상할 만큼 쉽게 추종자들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고위층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다면 저도 후보가 될 수 있겠군요."
"...덤덤하군요, 오를란도."
"이치에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녀님, 이 얘기를 어째서 저에게...?"
자신 또한 변절자의 조건에 부합했다. 그런데도 어째서 성녀는 자신에게 이런 말을 꺼낸 걸까.
"당신만큼은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를란도."
"저를...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당신은 지금까지 제가 내린 모든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로렌스, 당신의 제자에 대한 행적을 충실히 보고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로렌스.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오를란도의 가슴은 바늘로 꿰뚫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만든 괴물. 충실히 신의 뜻만을 따르는 비정한 기계.
이단심문관이 되면서 점차 마음을 잃어가는 로렌스를 볼 때마다, 오를란도는 죄책감과 후회에 사로잡혔다.
"당신은 훌륭히 신의 뜻을 이루어 냈습니다, 오를란도."
빛의 성녀가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운명을 일그러뜨릴 변수를, '로렌스'라는 예리한 검을."
모든 것이 성녀의 지시였다. 로렌스에 대한 교육 방식도, 그가 맡은 임무 하나하나가 모두.
로렌스가 자신을 '스승'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알면,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너무나 두려웠기에.
"그러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드릴게요?"
성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 웃음. 순백의 뒤편에 꼬이고 꼬인 온갖 감정이 담겨 있는 저 웃음.
10년 전에도 그랬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성녀는 자신에게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지금과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알겠습니다, 성녀님. 변절자에 대한 조금의 단서라도 보인다면, 바로..."
"아니,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에요."
뭘 말하는 거냐는 듯,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렌스.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내리라는 뜻입니다. 다음은... 그래, 이게 좋겠네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오를란도가 성녀의 쪽지를 받아들었다.
편지의 뒷면에는 어떤 글씨가 조그멓게 적혀 있었다.
[난나로부터.]
"예언이 왔습니다. 다음 교황이 될 자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하는군요."
"...이 난나라는 분은."
"어머, 그것도 모르는 건가요, 오를란도?"
성녀가 웃었다. 어떻게 칠교(七)의 추기경 되는 자가 '난나'라는 이름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달과 마법, 예언의 여신, 난나. 그녀인 게 당연하잖아요?"
"하, 흐하, 하하하하핫."
오를란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을 신이라고 칭하는 자와 이런 쪽지를 주고받는단 말인가.
자신에게 이 쪽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한 의미를, 오를란도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녀님.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까."
그 말에, 성녀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차갑고 무거운 눈빛으로.
"여신의 뜻입니다."
오를란도는 눈을 감았다. 신의 뜻이라면, 겨우 일개 인간에 불과한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성녀님. 아니..."
대지의 여신. 일곱 신 중 이 성국과 가장 가까운 신.
"여신 닌후르삭이시여."
오를란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빛의 성녀는 부정이나 웃음 대신,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소리 내었다.
"쉿."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