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외전 히아신스, 에델바이스, 아네모네(1)
* * *
성도에서의 사태가 마무리되고 일주일. 참고 조사라는 명목으로, 아직 로렌스를 비롯한 일행들은 생크로 돌아가지 않고 성도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로렌스, 이것도 좀 먹어 봐! 자, 아 해볼래?"
"...제가 아기인 줄 아는 겁니까?"
"그냥 말하는 대로 해!"
에델의 강압에 못 이겨, 로렌스는 입을 열고 그녀가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로렌스의 입을 향해 들어가는 숟가락을, 신시아는 죽일 기세로 쳐다보고 있었고.
"신부 오빠! 오늘은 어디로 놀러 갈래요?"
"오늘도 놀러 갈 생각입니까, 아네모네?"
"성도에는 자주 올 수 없잖아요! 그리고... 신부 오빠랑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소중한 지도 알았고..."
요즘 들어, 아네모네가 로렌스의 곁에 붙어 있는 시간이 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분명 늘었다고 신시아는 확신했다.
저 얼굴 좀 보라지. 자기 머리카락 색 마냥,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음, 마침 오늘은 시간이 비기도 하고... 그럼 그렇게 할까요?"
"와아! 고마워요, 신부 오빠!"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제리오?" "음? 나 말야?"
신시아의 시선이 책장으로 이동했다.
벽에 기대 책을 읽고 있던 로제리오의 모습. 남자 주제에 쓸 데 없이 여리여리하게 생겨선, 신시아의 속에 온갖 망상을 불러일으킨다.
'신부님이랑 제일 친한 친구... 소꿉친구...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자로 착각할지도 모르는 예쁜 외모... 윽, 머리가.'
차라리 빨리 생크로 돌아가자고 떼라도 쓸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제 자신 정도면 훌륭한 어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 마음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
'신부님 옆자리는 원래 내 건데...!'
에델의 자리가 부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회복 단계니까, 자신이 양보하자고 신시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아네모네... 신부님 품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아네모네는... 어쩔 수 있는가. 언니인 자신이 양보해야지.
그렇게 하나 둘 양보하다 보니, 어느새 로렌스의 곁에는 다른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만의 신부님. 나만의 로렌스 오빠.
자신이 너무 가만히 있었던 걸까. 어차피 로렌스는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마음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원인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신시아의 마음속에는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로렌스에 대한 실망감이 자리 잡았다.
"까득..."
"...신시아?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어? 으, 응! 아니야, 신부님!"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버릇. 손톱을 물어뜯는 건 하지 말라고 신부님이 말해줬는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손가락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신시아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쪽을 봐줬어... 히힛, 이히힛.'
이상한 짓을 하면 신부님이 이쪽을 바라보는구나.
신시아가 내놓은 해답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신시아의 성인식이네요."
"...맞아! 기억해주고 있었구나, 신부님!"
드디어 로렌스의 입에서 자신에 대한 화제가 나왔다.
역시 로렌스는 자신만을 바라본다고 생각한 신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성인식이라... 후훗, 옛날 생각이 나네."
"그러고 보니 에델의 성인식도 이맘 때쯤이었죠."
"그야 당연하지. 내 생일이니까. 그거 기억 나, 로렌스? 우리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에델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에, 에델 언니...!'
특유의 언변을 살려, 물 흐르듯 옛날의 추억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에델.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과거의 로렌스를 아는 건 셋 중에서 에델뿐이니까.
둘만이 공유하는 추억은 큰 이점이자 무기. 소꿉친구만이 발휘할 수 있는 필살기에 가까웠다.
"성인식 때, 그만 옷이 찢어져서 다시 구하느라 로렌스 네가 엄청 뛰어다녔잖아."
"푸훗, 그런 일도 있었죠. 그때로부터 벌써 5년... 시간이 빠르긴 하군요."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게 있잖아?"
안 돼, 저것만큼은 막아야 해!
신시아와 아네모네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에델은 모든 준비를 맞췄다.
사뭇 진지한 분위기와 표정으로, '소꿉친구'라는 이름의 탄환을 장전해 로렌스에게 겨눴다. 그리고.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것. 우리 둘이 함께 있다는 것."
"...확실히, 그렇네요."
아, 로렌스가 고개를 돌렸다. 에델의 말에 어느 정도 마음이 흔들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일했다. 에델 언니는 자신의 편일 거라 생각하고, 어떠한 견제도 하지 않았다.
저 둔탱이 신부 오빠의 표정을 봐라. 로렌스는 분명히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에델이 속으로는 '됐어. 성공이야'라고 외치는 것도.
'안 되겠어. 여기선 부끄러움을 감수하더라도...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한 신시아의 시선에 걸린 것은 홍차가 든 잔이었다.
실수를 가장해 저걸 옷에 부으면, 옷이 몸에 착 달라붙을 것이다.
신시아의 무르익기 시작한 몸에. 로렌스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비록 지금은 검은 수녀복을 입고 있어 속살을 드러낼 수 없겠지만, 몸의 곡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로렌스의 심장은 요동칠 것이다.
'좋아, 작전 개시...!'
음습한 생각을 품은 신시아는 홍차가 든 잔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잔을 먼저 든 건... 신시아가 아니었다.
"꺄앗!"
"아네모네, 괜찮습니까?"
아네모네. 먼저 홍차를 가로챈 건 그녀였다. 그것도 신시아와 똑같이, 홍차를 자신의 몸에 쏟는 작전으로.
"으으, 젖어버렸어... 죄송해요, 신부 오빠. 그만 손이 미끄러져서..."
누가 봐도 노린 거다. 명백한 거짓이자 사기 행각이다!
하지만 상대는 로렌스. 당연하게도 그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차가 가득 든 잔을...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네모네. 닦을 걸..."
"으... 추워... 신부 오빠, 잠깐만 다가가도 될까요?"
마치 빗속에서 떠는 아기 고양이처럼, 아네모네가 온갖 연약한 척을 하며 로렌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흐, 흥! 그래봤자야, 아네모네... 네 빈약한 몸으론 신부님은 조금도 눈길을...'
'과연 그럴까요?'
시선으로 은밀히 대화를 주고받는 신시아와 아네모네.
아네모네의 도발적인 눈빛에, 신시아는 다시금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이건...!'
"저, 흠흠, 아네모네, 그, 옷이..."
"옷... 말인가요? 미안해요, 신부 오빠. 추워서 말이 잘 들리지 않아요..."
검은 수녀복을 입은 신시아나 에델과는 다르게, 아네모네가 입은 성녀복은 하얀색이었다.
성녀의 덕목은 순수. 즉,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성품. 그렇기에 성녀복도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옷감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옷에 저렇게 물을 부어버리면 당연히...
"그, 살결이 비쳐 보입니다."
"으응, 잘 모르겠어요오..."
에델이나 신시아에 비해 빈약한 몸을 다른 방식으로 메꿀 줄이야.
다른 둘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네모네는 아기 고양이가 아니라 능글맞은 새끼 여우라는 사실을.
'꼬맹이 주제에, 대체 누굴 넘보는 거야...!'
'실망이야, 아네모네! 너는, 너만큼은 믿었는데...!'
'둘 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 지켜줘야 할 어린 성녀님이니까요.'
세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날카로운 신경전. 시선이 서로 맞부딪혀 불꽃이 튀길 정도였다.
이 사태의 중심에 있는 로렌스는...
"홍차가 뜨겁지 않아서 다행이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멀리서 이 광경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단 한 명, 로제리오는 이렇게 생각했다.
'죄 많은 남자군. 로렌스 녀석은.'
이 수라장에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봐, 로제리오는 서둘러 읽고 있는 책을 덮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어딜 가는 거야, 로제리오?"
물론 에델의 만류에 그만 잡혀버리고 말았지만.
"우리, 되게 오랜만에 만난 사이잖아? 자꾸 그렇게 혼자만 사라져 버리면, 섭섭할지도 모른다?"
물론 에델의 속뜻은 달랐다.
친구 되는 자로서, 내가 이길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과 협조를 바란다. 거절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섭섭해질 수 있음.
로제리오는 로렌스와 다르게 눈치가 없지는 않았기에, 에델의 말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음... 그렇지. 내가 생각이 짧았어, 에델."
섬뜩한 기운을 느끼며, 로제리오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아니, 식은땀을 흘리며 읽는 시늉만 했다.
'위험해. 이대로 가다간 내 입지가...!'
에델에게는 소꿉친구라는 무시 못할 위치가 있다. 거기에 더불어 로제리오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의 지원까지.
그리고 아네모네는... 무서운 아이다. 남자를 끄시는데 천부적인 재능. 거기에 '어리다'라는 특성이 가지는 온갖 이점을 200% 이용하고 있으니.
'저게 뭐가 성녀야! 성국 역사를 찾아봐도, 저런 성녀는 없을 거야...!'
심호흡을 한 신시아는 자신을 돌아보기로 했다.
자신에게는 뭐가 있지? 로렌스를 헤롱헤롱하게 하기 위해, 어떤 무기를 쓸 수 있지?
'우리 둘의 동화 같은 첫만남을... 아냐, 신부님의 트라우마를 되살리기는 싫어...'
실험체 소녀와 마음을 잃은 이단심문관. 그 둘의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점을 이용하기는 싫었다. 둘만의 소중한 비밀이랑 마음을, 겨우 치정 싸움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럼... 이걸 사용해서...!'
신시아가 자신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유전자 덕인지, 아니면 매일 밤마다 로렌스를 생각하며 만졌기 때문인지. 신시아의 가슴은 '훌륭하다'라고 평해도 좋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 전투력은, 에델과 아네모네를 합쳐도 이길 수 있을 정도. 아니, 아네모네 다섯 명이서 힘을 합쳐도 가뿐히 이길 정도였다.
'하, 하지만... 역시 부끄러운걸...'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으니 몸으로 밀어붙이자니, 그건 이미 피배를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로렌스는 분명 가벼운 여자를 싫어할 것이다. 이 방법은 정말 중요한 순간에 사용하자고, 신시아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 예를 들면 성인식 때라던가...
'그럼... 남은 게 없잖아...!'
신시아는 억울했다.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러다간, 저 두 사람에게 로렌스를 빼앗기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신시아, 잠깐만요."
"응, 신부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로렌스가 신시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신시아의 뺨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시, 신부님... 간지러워..."
"실례했네요. 뺨에 크림이 묻어 있어서요."
"아, 뭐야. 그런 거구나. 응, 고마워..."
로렌스가 자리에 앉자, 신시아는 다시 상념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로렌스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고민을.
'신부님이 먼 곳으로 가버릴지도 몰라. 어떻게든 나한테 시선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다른 두 사람의 경악한 표정을, 신시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이 로렌스에게 바라는 종착역. 그 모든 것들을 이미 신시아는 지나친 지 오래라는 사실도 말이다.
'험난한 싸움이구나, 에델.'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본 로제리오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내가 더 힘내야 돼! 신부님을, 로렌스 오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말이다. 로렌스의 시선은, 언제나 신시아를 향해 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오늘도, 로렌스와 세 사람의 유난스러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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