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외전 히아신스, 에델바이스, 아네모네(2)
* * *
모두가 잠에 빠진 깊은 밤. 잠자리에 든 건 로렌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단심문회의 쿠데타. 그 뒷과정을 처리하는 데 있어 쌓인 피로는 상당했기 때문이다.
"음냐... 신부님..."
그리고 그건, 로렌스의 품에서 자고 있는 아이보리색 머리의 소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시아 생크 프랑. 로렌스가 후견인으로 있는 어린 소녀.
아니, 이제는 어떻게 봐도 어리다고는 못할 소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로렌스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신부님... 더는 못 먹어..."
꿈에서 항상 로렌스가 나오기라도 한 건지, 잠꼬대로 '신부님'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 심지어 몸만큼은 훌륭히 어른이 된 소녀가 성인 남성과 한 침대에 있는 건 별로 좋게 보이지는 않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주위의 사람들이 이런 행위를 묵과하는 건, 그 둘이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악몽'. 두 사람이 각각의 트라우마 때문에 시달리던 그 악몽이, 서로를 버팀목 삼아 잠들 땐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다.
명목 상 신시아는 여러 이유로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자도 율법 상으로는 문제가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겠지. 신시아도... 어른이 되어야 하니까.'
마치 사탕이라도 빨 듯, 장난 삼아 입술에 갖다 댄 손가락을 쪽쪽 빠는 신시아의 얼굴을 보며 로렌스는 웃음을 지었다.
"으응... 미안해요... 입 안이 가득 차서... 뱉어 버렸어..."
"정말이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언제 봐도 신시아는, 품속에 들어온 천사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이 관계도 언젠가는 끝나야 할 것이다. 모든 유년기에는 '끝'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도 슬슬 자야지. 오늘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너무 피곤...'
"......!"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척이.
로렌스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누구냐."
신시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로렌스는 있을지 모를 침입자에게 위압감을 내뿜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라진 기척, 그럼에도 남아 있는 찝찝한 기분.
'대체 누가...?'
* * *
최근 들어, 밤마다 이상한 시선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한 침대에서 자는 신시아의 눈빛이 아닌가 했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내 이단심문관으로서의 '감'이 그렇게 말하니까. 다른 침입자가 나와 신시아를 바라보고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걸 나한테 상담하러 온 거고?"
한스 크라운. 같은 스승을 둔 동기이자, 로제리오와 더불어 막역한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
이번 일의 공로로 고위 사제 후보까지 올라간 그라면, 내 고민도 들어줄 만한 여유가 있겠지.
"이래 봬도 전 진지합니다, 한스."
"...진지하고 자시고, 원래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다른 사람을 같이 데리고 오나?"
한스가 시선을 돌려 내 옆을 보았다.
신시아. 그녀가 의자에 앉아 그네처럼 다리를 흔들거리며,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내 팔짱을 껴안았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한스. 한밤중에 느껴지는 시선... 신시아를 노리는 게 당연하잖아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신시아는 귀여우니까요."
내 주관적인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신시아는 무척이나 귀엽다.
더군다나 옛날에는 아기새 같이 귀여운 느낌이었다면, 요즘은 활짝 피어난 히아신스와도 같다.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좋은 향기가 풍겨서, 조금이라도 이성의 끈을 놓으면 그대로 꺾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혹시라도 신시아가 해를 당한다면... 저는..."
"걱정 마, 신부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부님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되네요, 신시아."
"...후우."
한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만도 하지. 신시아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대충 알 것 같은데."
"의심 가는 인물이라도 있는 겁니까, 한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나 빨리..."
"음, 감이지. 아니, 엄밀히 말하면 감은 아닌데."
"하긴. 사제를 하다 보면 고해성사도 많이 들을 테니, 그런 감이 생길 만도 하겠군요."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한스에게 상담을 요청한 것이 정답이었다.
"그래서, 그 정체는 누굴 것 같습니까?"
* * *
"그래서, 그 정체는 누굴 것 같습니까?"
순수한 표정으로 묻는 로렌스의 물음에, 한스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정말로 모른다고?'
로렌스나 에델에 비하면 자신은 감이 낮은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벽 모퉁이 뒤에서 뚫어지게 로렌스를 노려보고 있는 두 얼굴.
에델바이스 발랑틴과 아네모네. 그 두 사람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에델은 기회를 노리는 사냥꾼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아네모네는 장난감을 가로 차인 어린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믿는 신들은 꽤나 공평한 것 같단 말이야.'
로렌스에게 천부적인 전투의 재능과 야생의 육감을 준 대신, 신들은 그에게서 '눈치'를 빼앗아 갔음이 틀림 없다.
그것도 괴멸적인 수준으로.
"내 생각엔... 주변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지 않을까..."
하지만 차마 로렌스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순 없었다.
에델이나 아네모네의 보복도 두려울 뿐더러, 굳이 자신의 입으로 그런 걸 말하긴 싫었으니까.
또 사태 파악 못하고 되묻는 로렌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았고.
"제 주변... 아, 혹시."
"그래, 아마도 네 생각이 맞을 거야."
한스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무리 롤렌스가 상당한 수준의 둔감탱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눈치를 주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제리오. 혹시 그 녀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로제가 왜 널 쳐다보는데. 그것도 밤중에."
"아니, 제가 아니라 신시아 말입니다. 로제리오 그 녀석도 남자이니, 신시아에게서 눈을 못 떼는 건 당연한 '상식' 아니겠습니까."
책상 밑에서 한스가 주먹을 쥐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일에 낭비되는 자신의 소중한 시간은 둘째 치고, 저 기만에 가까운 염장질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시아는 한스가 봐도 '예쁘다'라고 생각할 법한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콩깍지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로렌스의 눈에 씌인 저것은...
'콩깍지 수준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스는 떨리는 동공으로 신시아를 쳐다봤다.
혹시 신시아가 어떤 술수를 쓴 건 아닐까. 로렌스의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어 놓아서, 자기 말고는 쳐다볼 수도 없게.
'옛날의 신시아라면... 충분히 그럴듯해.'
신시아는 마왕 후보자다. 마왕의 힘은 무궁무진하다고 하니, 그런 것쯤은 간단한 게 아닐까.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아무것도."
생글거리는 얼굴로 신시아가 물었다.
한스는 생각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신시아가 로렌스를 건드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히힛."
...아니여야만 한다.
"한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신시아를 쳐다보는 겁니까."
"아니, 뭐. 네가 자꾸 '우리 사랑스러운 신시아'거리길래, 정말로 그래 보이나 한 번 봤지."
"...기분 나쁘군요, 한스. 신시아에게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도망칠까. 한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시 시선의 정체는."
"만약 나라고 말하면, 당분간 절교할 거다."
"나름 괜찮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알면 됐다."
의미 없는 시간 죽이기였다. 이대로 로렌스의 페이스에 넘어가면, 한스는 기진맥진한 채로 바닥에 쓰러질 것이다.
차라리 이 시간에, 크리스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한 한스가 생각한 방법은 '폭탄 넘기기'였다.
"에델한테 상담해보지 그래? 아, 마침 뒤에 있네."
결자해지(?者?之). 본인이 밟은 지뢰는 본인이 해치워야 하는 법.
한스는 아까 전부터 자리에 있었던 에델을 가리키며, 그대로 문 밖으로 도망쳤다.
"자, 잠깐...! 한스!"
당황한 에델이 한스의 이름을 외쳤지만, 이미 그는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정면으로 로렌스와 얘기를 하는 것뿐.
"마침 잘 됐습니다, 에델. 최근 들어 이상한 시선을 느끼고 있는데..."
"......"
"굳이 표현하자면, 끈적한 시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저한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려봐도, 그곳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직접 나와서 하면 그만일 텐데 말이에요."
로렌스의 계속되는 말. 하지만 에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방금 로렌스가 말한 수상한 시선. 그 정체가 누군지, 에델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바보, 둔탱이, 얼간이! 신시아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신시아 증후군 말기 환자!'
빨갛게 변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에델은 마음속으로 로렌스를 향해 온갖 험담을 쏟아내었다.
물론 그래 봤자, 자신의 답답한 마음이 담긴 귀여운 욕들이 전부였지만.
"혹시 의심 가는 곳이라도 있습니까, 에델?"
"...라."
"라? 혹시 알고 있는 거라도..."
"몰라! 모른다고! 이 바보야!"
눈을 질끈 감고 외마디 악을 지르더니, 에델은 그대로 도망치듯 떠났다.
"흐음, 에델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신시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신부님. 이미 다들 신부님한테 익숙해져 있을 거니까."
"네? 그게 대체 무슨..."
떠나는 에델의 뒷모습을 보며, 신시아는 로렌스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바라봐 주는 건 좋지만, 가끔은 에델 언니나 아네모네에게 잘해줘도 괜찮을 텐데.
그리고 또 한 명, 그런 에델의 모습을 보는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으으, 죄송해요, 에델 언니!'
아네모네. 음습한, 아니 착실한 성녀.
로렌스가 느낀 수상한 시선 모두 자신이라고 생각한 에델이었지만, 실은 4할 정도는 아네모네였다.
요즘 들어 신부 오빠의 얼굴을 보는 게 재미있길래 본 것이,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이 커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중에 꼭 사실대로 말할 테니까요... 음, 좀 많이 나중에.'
기약 없는 약속을 마음속으로 품으며, 아네모네는 열심히 신께 기도드렸다.
수상한 시선. 5할은 에델의 질투심 섞인 눈빛, 그리고 4할은 아네모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그리고 남은 1할은...
* * *
"또 그의 모습을 들여다보시는 겁니까, 성녀님."
빛의 성녀의 곁을 지키는 호위 기사가,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럼요. 제가 고른 '검'이잖아요? 계속 확인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너무 자주 감시하시면 그자가 눈치챌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전직 이단심문관, 뛰어난 직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괜찮아요. 이런 건 제 특기니까. 기껏해야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만 들 뿐, 그게 저라는 사실은 절대 모를 겁니다."
성녀가 다시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로렌스. 그자는 여전히 성녀에게 재미를 줄 만한 여러 행위를 하고 있었다.
'아, 안 되는데. 이러다간 이상한 취미가 생겨 버리겠어.'
이미 로렌스를 몰래 관음, 아니 감시하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는 사실을, 빛의 성녀 본인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 테오도어. 차를 타 오세요. 이왕이면 달콤한 간식도 같이."
"...알겠습니다."
곁에서 그녀를 지키는 호위 기사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