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95화 (95/109)

〈 95화 〉 잿빛 수도원(1)

* * *

이단심문회의 국장, 키리에 발랑틴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로부터 약 3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와 신시아는 생크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 일이 다 마무리되지 않았을 뿐더러…

“아직 성녀님께는 아무런 명령이 없으신 겁니까?”

누군가에게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교황이 서거한 지금, 이 성국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빛의 성녀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빛의 성녀. 성국에 단 세 명만 존재하는 성녀 중 한 명이자, 성도에 머무르고 있는 여인.

오를란도 추기경님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으셨다.

“대체 성녀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지….”

빛의 성녀를 언급하는 추기경님의, 스승님의 얼굴에는 묘하게 부자연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그 속 모를 여자가 스승님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

“전 괜찮습니다, 스승님. 휴양이라고 생각하죠, 뭐. 이사도라 자매님이나 베티 자매님에게는…, 케이크라도 사다 주면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요? 좀 비싼 걸로.”

“녀석, 농이나 치고는.”

솔직히 말하면, 생크 수도원이 그리운 건 사실이다.

이곳 성도는 수많은 사람이 머무르는 곳. 이런 시끌벅적한 곳은 신시아에게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지난 수개월 동안, 마왕의 각성 조건에 대한 여러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 마왕의 힘은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

신시아가 마왕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에는, 공통적으로 ‘감정의 격양’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나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시아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녀의 감정이 고양되었을 때, 신시아는 비로소 마왕의 힘을 끌어낼 수 있었으니.

‘폭주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대체 빛의 성녀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니 그보다 애초에…, 대체 정체가 뭔지.

‘생각해보면, 항상 그녀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어.’

마왕 후보자 크루거의 사태 때도, 잊혀진 도시 레고르에서도.

분명 빛의 성녀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성국은 그녀의 정원. 도처가 그녀의 ‘눈’으로 깔려 있을 테니까.

­이 성국이라는 웅덩이에 파문(??)을 일으킬, 그런 존재가 되어주세요.

언젠가 빛의 성녀가 내게 한 말이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성녀란 무릇 성국의 안정을 도모하는 존재다. 하지만 성녀가 내게 요구한 것은 평화나 충성이 아닌, ‘파문’이었다.

물의 흔들림. 언뜻 보면 평온해 보이는 성국에 변화를 가져올….

‘성녀의 의도…. 그녀가 내게 바라는 건 대체….’

“로렌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깨운 것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에델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늙은이는 이만 빠져야겠구나.”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쯧쯧, 미련한 것. 사람의 마음을 몰라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

들고 있던 경전으로 내 머리를 한 대 치시더니, 오를란도 스승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향했다.

“덧붙여 말해두자면, 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해할 거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린 소녀를 보듬든, 과거의 인연을 잇든, 혹은… 전혀 다른 길을 나아가든지 말이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 할 말만 하시더니,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가셨다.

‘선택?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역시 잘 모르겠다.

“…스승님이랑 무슨 얘기한 거야?” “별 얘기 아니었습니다. 흔하디흔한 교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호, 혹시 내 얘기는 아니었어? 가령, 나, 나를 응원한다던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 건, 에델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수녀복이군.’

요즘 들어, 에델은 평소 입던 이단심문관의 옷은 거의 입지 않는다.

하기야, 그런 일을 당했으니 심문관 복장이 질릴 만도 하지.

에델이 지금 입고 있는 건 성국의 수녀복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베이스에, 목과 팔 부근에 하얀 천 장식이 달린 그런 의상.

“…뭘 그렇게 빤히 바라보는 거야?”

“에델을 보고 있었습니다.”

에델의 검은 머리카락에 대비되는 수녀복의 형태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요.” “……!”

아, 또다시 에델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건지, 내 눈에 띌 때마다 항상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나중에 한스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어.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그렇게 급하게 저를 찾은 겁니까?”

“아, 맞다! 네 앞으로 온 편지. 성기사 한 명이 너한테 바로 전달해 달래서.”

에델이 편지를 건넸다.

또 편지다. 성도에서도 그렇고, 레고르나 마도 공화국에서도 그렇고. 항상 편지를 받을 때마다 무슨 사건이 일어졌단 말이야.

“…열어보기 싫군요.”

“응? 무슨 말이야?”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게 생각하자. 적어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려주기는 하지 않나.

굳게 마음을 다잡고, 편지의 봉인을 뜯어 내용을 살펴봤다.

“…….”

“무슨 편지야? 심각한 편지?” “굳이 분류하자면 그쪽 부류긴 합니다.”

편지의 첫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성녀의 이름으로’.

* * *

“밀명(??)?”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신시아.”

신시아, 아네모네. 그리고 모두가 모인 탁자.

편지의 내용을 들은 모두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녀가 보낸, 그것도 빛의 성녀가 직접 보낸 편지잖아! 성녀가 쓴 글에는 성령(??)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 못 들어봤어?”

“그렇게 놀랄 건 없습니다, 한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아네모네가 쓴 편지도 성유물로 취급되겠군요.”

“어? 그거 진짜예요?”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빛의 성녀가 직접 내린 명령. 교황이 서거한 지금, 성국에서 공식적인 효력을 갖는 최고 수준의 계약.

그 내용은…, ‘교황 후보’를 찾을 것.

“교황이 서거한 지 벌써 3주 째야. 지금은 세 명의 추기경님이, 그리고 빛의 성녀님이 권한 대행으로 국정을 보고 계시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교황님의 성해(??)는 약 두 달간 교황청에서 종교적 의식을 치른 뒤, 변경에 있는 ‘카타콤’으로 이동될 겁니다. 중요한 건, 이 의식에 누군가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건데….”

크리스의 말대로다. 교황의 유해를 카타콤에 안치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의식이 필요하다.

“차기 교황.”

교황은 신이 내린 사자(?者). 이 대륙에 퍼져 있는 일곱 신과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은 결코 끊겨선 안 된다. 교황은 그 증거이므로, 언제나 교황은 존재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차기 교황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본래라면 교황이 물러나기 전, 다음 교황 후보를 미리 선정한다.

허나 당대 교황, 다시 말해 프란체스코 2세는 후보를 안배해 놓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교황님은 눈도 편히 감지 못하시겠군.”

“그래서 성녀님이 제게 맡긴 것이 바로 ‘후보 찾기’입니다.”

빛의 성녀의 부탁. 그것은 차기 교황이 될 후보자를 ‘안전히’, 그리고 ‘신속하게’ 모셔오는 것이었다.

“신부님한테 말이야? 그, 그럼 신부님이 차기 교황이 될 사람을 뽑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무나 후보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교황 후보가 될 자격은 단 하나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물론 지금에 와선 정말로 신의 목소리가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교황의 권위와 신성함은 유지할 수 있는 괜찮은 방법이다.

“그리고, 신의 목소리를 들은 후보자를 성녀님이 점지해주셨습니다.”

물론 반쯤은 거짓말이겠지만. 차기 교황으로 어울리는 인재를, 빛의 성녀가 미리 점찍어 둔 것이겠지.

“그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안타깝게도, 요한이라는 이름 말고는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어요.”

단 한 가지 정보. 그의 거주지를 제외하면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목적지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장소입니다.”

"거기가 어딘데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턱을 괴고 묻는 에델을 향해, 편지의 맨 아래에 있는 글귀를 가리켜 보였다.

“…여긴.”

“살면서 언젠가는 들르리라 예상했잖아요?”

[잿빛 수도원]

성국 내의 최대 규모의 수도원. 아니, 다른 수도원이 잿빛 수도원의 산하 조직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수많은 은둔자들이 이곳에 모여 신의 뜻을 해석하고, 자기 수양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마침 우리 주위에도 수도사가 한 명 있더군요.”

사제 한스. 성기사 크리스. 이단심문관 에델. 신부인 나. 그리고 또 한 명.

“아, 마침 왔군요.”

긴 백색 머리카락의 남자. 신비주의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마른 남자가 우리 앞에 섰다.

“마침 잘 왔습니다, 로제리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로제리오는 이미 짐 정리를 마친 듯하다. 어깨에는 작은 보따리가 하나 걸쳐 있고, 이미 여행 채비를 갖춘 나그네의 복장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었나 보군요.”

“대충 눈치 채고 있었잖아, 로렌스.”

“그렇죠. 툭 하면 사라지는 당신이, 무슨 일로 3주 동안 잿빛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했습니다.”

로제리오 그레고리. 잿빛 수도원의 수도사(몽크)인 그라면, 이번 임무의 든든한 협력자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이랑 여행을 하는 게 얼마 만인 건지.”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들이 성인이 되고 나선 거의 처음이지?”

추기경 오를란도의 다섯 제자. 비록 각자의 길에 접어든 후로는 큰 접점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친분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준비하자, 로렌스. 차기 교황님이 우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로제리오는 탁자를 둘러보았다.

“같이 가고 싶은 사람? 잿빛 수도원의 수도사가 직접 안내해주는 건, 어디 가서 찾아볼 수도 없는 영광일 텐데.”

“마음 같아선 저도 따라가고 싶지만, 이번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 모든 성기사들에게 성도 소집 명령이 떨어져서, 아무래도 무리가….”

“나도 마찬가지야. 비상이 걸렸다고. 나도 당장 한 시간 뒷면 다시 교황청으로 돌아가 봐야 해.”

한스와 크리스는 거절을 표했다. 사제와 성기사인 두 사람의 입장으로썬, 함부로 성도를 떠나기는 힘들 것이다.

“에델은?”

“…나? 나 말이야? 하지만, 난 아직 근신 처분이기도 하고….”

“괜찮지 않겠습니까.”

에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랬더니 에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당신의 감시를 맡은 건 저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동행한다면, 위에서도 뭐라 못할 거고요. 아니, 오히려 저랑 꼭 같이 가야겠네요.”

“그, 그래…? 그렇게나 나, 나랑 같이 가고 싶은 거야? 헤, 헤헤헤. 어쩔 수 없네에~.”

그렇게나 같이 가는 게 기쁜 걸까. 잔뜩 녹아버린 표정의 에델이 같이 가기로 뜻을 정했다.

“그리고 신시아와 아네모네는….”

“그걸 굳이 말로 해야 알겠나요, 신부 오빠!”

아네모네는 굳이 그런 걸 말하냐는 듯이 웃고, 신시아는 해맑은 미소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정해진 것 같네요.”

교황 후보를 인계할 것. 목적지는 잿빛 수도원.

이번에는 부디 아무 일도 없이 순탄하게 해결되길 바라며, 나는 편지를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출발하죠. 잿빛 수도원으로.”

이 성국에서 가장 신비로운 비밀을 품고 있는 장소를 향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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