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96화 (96/109)

〈 96화 〉 잿빛 수도원(2)

* * *

잿빛 수도원은 어째서 ‘잿빛’이라는 수식언을 가지게 되었는가.

누군가는 천 년 전의 ‘전화(戰火)’를 잊지 않기 위해 그렇게 붙였다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초대 수도원장의 어떤 신성한 뜻으로 지어졌을 거라고도 한다.

이렇듯 의견은 분분하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수도원의 전경을 보면, 왜 잿빛이라고 붙었는지 대강 알 것 같기도 하지만요.”

저 멀리, 험준한 바위산의 절벽에 세워진 웅장하고 고고한 수도원의 모습이 보인다.

그 이름처럼, 마치 화산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잿빛으로 보이는 건물.

“수도원 안에선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마차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도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로제리오가 중얼거렸다.

“다들 싫어하거든. 잿빛 수도원의 이름이, 겨우 건물 외형 때문에 지어졌다는 추측을 받으면.”

확실히 로제리오의 말대로다.

성국에서 역사와 전통이 가장 깊은 건물을 꼽으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로 ‘잿빛 수도원’을 꼽을 테니까.

그런 성국의, 수도사들의 자존심이 담긴 곳의 유래를 하찮게 단정 지어 버리는 건 그들의 취향은 아니겠지.

“그럼,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우리 수도원이 왜 ‘잿빛’ 수도원이라고 불리는지 말이야? 당연히 알지. 수도원장님이 가르쳐 주셨거든.”

“힌트라도 내놓으시죠.” “힌트라고 할 것까지야.”

잠시 뜸을 들이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로제리오가 조용히 속삭였다.

“초대 수도원장님이 회색을 좋아하셨거든.”

“…그게 답니까?”

“그게 다야.”

너무나 별 것 아닌 이유에 의구심이 들 정도다.

“누구한테 들은 겁니까.”

“우리 위대하신 현(?) 수도원장님께 직접 들은 내용이지.”

수도원장. 그 이름을 들먹이니, 나도 당장은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수도원장의 얼굴도 볼 수 있는 건가….’

성기사단의 기사단장, 리날도.

이단심문회의 국장, 키리에. 아니, 지금은 드레이크.

사제들을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세 명의 추기경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마지막 인물이 바로 수도원장. 그것도 잿빛 수도원의 수도원장이다.

“수도원장이라…, 생각해 보면 20년을 넘게 살았는데 얼굴 한 번 못 봤단 말이야.”

수녀복을 입은 채 총을 닦던 에델이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에델의 말대로다. 한때 이단심문회에 몸담아 성국의 어두운 일면을 낱낱이 본 우리조차도, 수도원장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야 그럴 만도 하지. 우리 수도원장님은 이단심문관들을 끔찍이 싫어하거든. 잿빛 수도원도 정식적으론 수도사만 출입 가능, 상황을 고려해도 이단심문관만큼은 출입 금지야.”

노골적인 차별 정책이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거슬리는 것은 없으려나.

난 신부로 전향한 지 오래고, 그리고 에델은….

“흐흥, 역시 내 혜안은 대단하네!”

입고 있는 수녀복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보이는 에델. 그녀도 ‘대외적으론’ 생크 수도원의 수녀에 속하니, 트집 잡힐 만한 사항은 없을 것이다.

‘애써 밝은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기쁜 건지.’

이단심문회의 쿠데타 건은 성국의 성민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적잖은 상처를 주었다.

이번 일로 가장 고생한 건 크리스와 더불어…, 에델이겠지.

부디 이번 임무가 그녀에게 있어 조금의 숨 고르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곧 수도원장님을 뵐 수 있겠네. 둘 다 운이 좋은 편이야. 수도원장님은 워낙 잿빛 수도원 밖으로는 잘 안 나가시는 분이라, 살면서 한 번도 못 보는 성직자들도 많거든.”

잿빛 수도원장. 성국의 5대 직업 중 하나인 수도사들의 우두머리.

다들 그 존재는 인식하고 있지만, 나이도, 성별도 모른다.

‘잿빛 수도원’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을 뿐.

“수도원장은 어떤 분입니까?”

“너희들의 생각하는 이미지랑은 조금 다른 분. 색다른 매력이 있는 사람.”

로제리오 특유의 화법.

‘흠, 그런가….’라거나, ‘네가 알고 싶은 것은 알려주지 않겠다.’라거나, ‘해답은 스스로 찾아봐라.’라고 말하는 것 같아 가끔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다.

“됐네요. 우리 보고 직접 찾아보라는 거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너 진짜!”

그나마 로제리오의 말을 해석할 수 있는 건 크리스 정돈데, 지금은 그녀도 없으니 원.

“아, 거의 도착했네. 곧 마차에서 내려야겠어. 산길은 험해서, 탈것은 이용하기 힘들거든.”

잿빛 수도원이 보이는 절벽 바로 아래. 마차가 점점 속도를 늦춰 멈출 준비를 한다.

“슬슬 도착한 것 같군요. 자, 그만 일어나세요, 신시아.”

이제 그만 잠자는 공주님을 깨울 시간이다.

“으응, 신부님…, 뽀…뽀.”

“…평소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딱히요. 아무것도.”

내 무릎을 베개 삼아 쿨쿨 자고 있던 신시아.

“으응, 핫!? 신부 오빠, 왜 절 깨우지 않은 거예요!?”

“자연스럽게 신시아를 따라 한 건 당신입니다, 아네모네. 일단 입가에 침부터 닦고 말하고요.”

“치, 침…! 성녀한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 남은 내 다리마저 자신의 침구로 욕심스럽게 탐한 아네모네.

이 두 사람의 칭얼거림을 보며, 에델과 로제리오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슬슬 내리자.”

로제리오가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바위산 아래는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고,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청량감을 전해 준다.

“환영해. 잿빛 수도원에 온 것을.”

* * *

“으음, 어쩐지 분위기가….”

내 뒤에 찰싹 달라붙은 아네모네가,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후드로 가리며 말했다.

“확실히, 예상했던 분위기랑은 조금 다르군요.”

수도원, 그것도 성국 최대 규모의 수도원답게 진중하고 고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특유의 분위기, 특히 우리 일행을 바라보는 수도사들의 시선에는….

“경계하고 있네. 우리들을 말이야.”

“그럴 수밖에. 잿빛 수도원에 외부인이, 그것도 수도사나 최고위층의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 기껏해야 1년에 두세 번쯤?”

“그래도 나 정도면 고위층이지 않아? 이래 봬도 한때 일등 이단심문관까지…!”

“글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니까요?”

이단심문관. 그 단어를 들은 건지, 수도사 몇몇이 우리를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비록 겉차림은 헤져 보일지 모르나, 저들은 하나하나가 일류 수도사. 우리 같은 성법을 이용하는 성직자들의 억제기 같은 존재니까.

“괜히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곤란합니다. 우리 임무가 뭔지 알고 있죠, 에델?”

“읍, 으브브븝! 으븝!”

“네, 맞습니다. 일곱 신에게 간택 받았다는, 차기 교황 후보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으브­!”

대충 `알겠으니까 빨리 놓아라. 놓으라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진중하고 믿음직스러웠던 이단심문관 폼의 에델과는 다르게, 모든 걸 내려놓은 수녀 에델은 입방정이 무서울 정도니까.

"으븟, 알겠어! 알겠다구!"

"잘 아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여긴 적지(??)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렇게 임해야 한다.

아직 이단심문회의 만행이 일어난 지 채 3주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만약 우리가 이단심문관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있다면, 그걸로 임무는 끝….

"어머, 이게 누구신가요~?"

그때, 한창 소란스러운 우리의 뒤에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님을 데려오신 모양이네요, 로제리오?"

"…란 님이시군요."

누군가를 향해 로제리오가 정중히 인사했다.

우리도 뒤따라 뒤를 돌아보자 보인 것은, 수도원하면 흔히 상상하는 지긋한 얼굴의 노승(?)이 아니었다.

"어머, 별일이람. 저희 수도원에 손님은 드문데."

아네모네랑 비슷, 아니, 체형으로만 따지면 더 어려보이는 소녀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신시아나 에델의 수녀복과 비슷하지만 좀 더 회색에 가까운 빛의 수녀복. 수녀 베일 아래로 보이는 회색빛의 긴 머리카락.

아마 이 수도원과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저 소녀를 꼽지 않을까.

"음…, 다들 아는 얼굴들이네요."

그리고 최대한 정체를 숨기자는 우리의 계획은, 히죽거리는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 몇 마디로 무산이 되었다.

"이단심문관 출신이 둘에, 마왕 후보자가 하나."

"…어떻게 그걸?"

"거기에…, 어머, 성녀님도 계셨네요."

분명 후드로 붉은 머리를 가렸을 텐데, 눈앞의 어린 수녀는 아네모네를 향해 다가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수녀 `란`이 성녀님을 뵈옵니다."

"……."

"어머. 이런 외진 곳의 수녀의 인사는 받아주지 않는 건가요, 성녀님?"

"아, 아, 아니에요!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후훗, 농담이에요. 소문으로 듣던 대로 귀여운 분이군요."

대체 이 수녀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당황을 금치 못한 나와 에델이 로제리오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바라봐도,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당신이 얘기한 게 아니면, 뭐 다른 수도사들이 정보 수집이라도 했답니까?"

들고 있던 빗자루를 벽에 기대고, `란`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어린 수녀는 팔짱을 낀 채 얘기를 계속했다.

"보아하니 단순 방문은 아닌 것 같고…, 제가 안내할게요. 안으로 들어오시죠."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를 방으로 이끄는 란.

마치 연배가 지긋한 것처럼 구는 란을 보고는, 우리 모두 로제리오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구야, 저 분?"

"란 님. 잿빛 수도원 소속의 수도사 겸 수녀이자…, 이곳의 베테랑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경력을 지니신 분이지."

"그럼 실제 나이는…?"

"쉿."

아, 또 나왔다. '네가 알고자 하는 것을 더는 알려주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듯한 언행.

"신부님. 저 사람, 왠지 불편해…."

내 옷깃을 꽉 잡고 놓지 않는 신시아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괜찮을 겁니다. 제 '직감'으로는, 분명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거예요." "정말로…? 정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든든한 아군은 거짓말이다.

내 직감이 외치고 있다. 저 수녀는 분명 심상치 않은 인물일 거라고.

분위기를 굳이 비교하자면…, 그래, 옛날에 만났던 그 사람의 분위기랑 비슷해.

'제국의 기사단장, 올리비에랑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다.'

그녀 특유의 미소. 사람을 시험해보겠다는, 그리고 그걸 통해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짓는 특이한 미소.

그리고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어떠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진짜 힘을 숨긴다는 것.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예요, 손님들? 어서 오지 않으면 바로 내쫓아 버릴 거예요?”

“여전히 짓궂은 구석이 있으시군.”

“…저걸 겨우 ‘짓궂다’라고 표현한다고?”

“어서 가자. 란 수녀님은 쓸데없는 기다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장님은 어디서 뵐 수 있는 거야?”

에델의 말에, 로제리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의외로 쉽게 만날 수 있는 관계일 지도 모르지.”

다시 말하지만, 저 화법은 정말이지 질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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