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잿빛 수도원(3)
* * *
성국과 북왕국의 경계에 있는 고즈넉한 언덕.
그 중턱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버려진 고성(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가끔 비를 피하고자 나그네나 야생동물 정도만이 잠시 머무를 뿐,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인 이 성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다.
“아, 드디어 오셨네요.”
‘운명’의 뜻을 따르는 뒤편의 세력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기다리게 했네요, 마리엣타. 또 시답지 않은 인형 놀이나 하고 있었던 건가요?”
“인형 놀이라니. 뭐, 당신에게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죠. 머리에 달린 그 쓸모없는 옹이구멍으로 보면, 뭔들 하찮게 안 보일까.”
대륙의 뒤편, 신의 뜻과 법의 심판이 닿지 않는 어둠의 거리.
그곳에서 ‘마왕 추종자’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그들만의 계획을 착실히 세워오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 마왕 추종자 레서와 마리엣타도 마찬가지고.
“굳이 말하자면, 복수를 위한 준비를 하는 거랄까요.”
“복수? 아, 그 성국의 ‘변수’에게 말입니까?”
변수. 예정된 일을 뒤틀리게 하는 원인.
하지만 마왕 추종자들인 두 사람에게는 다른 의미를 내포했다.
자신들이 섬기는 마왕. ‘운명’의 권능을 지닌 그분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자들을 통틀어 ‘변수’라고 불렀다.
세간에 ‘용사 일행’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전원 변수였으며, 그 외에도 변수는 7개국에 드문드문 퍼져 있었다.
가령, 지나치게 일찍 각성해 버린 공국의 마왕 후보자라던가. 혹은 현자의 기억과 영혼을 지닌 채 잠적한 백발의 소녀라던가.
그중에서도, 성국을 담당하는 두 사람에게 ‘변수’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한 명 말고는 없었다.
“로렌스 프랑. 그자에게 복수를 할 생각인가요?”
“사사로운 감정도 물론 있어요. 하지만 이 모든 건 ‘운명’을 위해. 그분을 위해서라면, 전 이 목숨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자신이 준비한 인형을 꺼내 보이며, 마리엣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보였다.
“이번에는 재미있는 소재가 많이 들어왔더군요. 성기사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쉽게 구하기 힘든 이단심문관의 시체가 많이 들어왔어요! 가뜩이나 수가 많지 않아 희소성이 있었는데,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니까요?”
마리엣타의 손끝에서 뿜어 나온 실. 그 실에 매달려, 각기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끼기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결벽증이 있는 레서에게는 혐오감만 느끼게 했지만 말이다.
“흥, 그 소재들을 이곳으로 모은 게 누군데.”
“네, 네. 고맙습니다, 레서. 당신 같은 쓰레기도, 잘만 닦으면 쓸모가 있는데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마리엣타를 뒤로 한 채, 레서는 발걸음을 돌려 복도로 향했다.
복도의 끝. 한때 이 성을 다스리던 성주(??)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옥좌.
이미 닳을 대로 닳아버린 그 옥좌에는, 묘령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어디 보자, 상태는…. 나쁘지 않군요.”
마치 전시장에 진열된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정면만을 쳐다보았다.
한때 이단심문회의 국장으로서, 성국의 꼭대기에 올랐던 자.
그리고 지금은…, 차기 마왕으로서 ‘개조’되고 있는 자.
“키리에 발랑틴. 당신의 우화(?化)가 기대되네요.”
키리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날, 모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키리에는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했으니.
삶을 통째로 바쳐 불태운 기력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무력감과 탈력감만이 흩날리는 재처럼 남을 뿐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됐습니다. 어차피 진정한 ‘마왕’은,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마왕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감정의 격동에 따라, 오직 본인만이 스스로 그 가능성을 일깨워야만 한다.
그러한 사실을, 레서는 마도 공화국에서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새로운 교황이 선출된다고 했지.”
그가 따르는 ‘운명’은 아무 말이 없었으나, 레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귀찮은 싹은 미리 제거하는 편이 낫다고. 마침…, ‘변수’도 같은 장소에 있으니.
“로리안.”
레서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 불렀어?”
그와 동시에, 기둥의 그림자에서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미있는 정보가 있습니다.”
“뭔데뭔데? 사냥감? 아니면, 손맛이 좋은 장난감?”
“둘 다입니다. 생각해 보니 당신은 한 번도 마주친 적도 없겠네요.”
당장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언가를 가른 것마냥, 피를 질질 흘리는 단검을 빙빙 돌리면서. 레서가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변수. 그것을 제거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 * *
“…이건 뭔가요.”
잿빛 수도원의 수녀, 란을 따라 들어간 곳은 평범한 건물이었다.
식당으로 보였지만,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는 수도사답게 그 규모는 매우 작았고 말이다.
“응? 뭐냐니요? 만찬인 게 당연하잖아요?”
그리고 내 앞에 놓여 있는 건…, 정체불명의 요리였다. 아니, 요리가 아닐지도 몰라.
수프로 추정되는 무언가에는 포크가 놓여 있었고, 지옥불로 조리된 듯한 어떤 고깃덩이에는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뭐냐, 이 청록색 빛깔은. 이게 요리의 결과물에서 나올 수 있는 색인 건가?
“이게… 만찬?”
“푸훗, 갑자기 무슨 말을. 손님에게 아낌없이 재료를 투자해 만찬을 대접한다. 그건 ‘상식’이잖아요?”
아무래도 눈앞의 저 여자 아이는, 진심으로 이걸 만찬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시, 신부님? 이거 먹는 거였어?”
만찬이라는 말을 듣고 뒤늦게 접시 위에 올라간 것의 정체를 눈치챈 신시아가, 울먹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슥. 몰래 눈을 흘겨,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우걱우걱우걱우걱.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 폐기물에 한없이 가까운 무언가를 맛있다는 듯이, 그것도 소리를 내어 먹는 한 사람.
“…맛있습니까?”
내 대답에, 로제리오는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로제리오가 이런 괴식 취향이었나? 아니, 수도사들은 전부 이런 걸 먹는 거야?“
식당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도사들은 모두 평범해 보이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로렌스. 저거, 로제리오가 아닐지도 몰라.”
“저도 방금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에델.”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로제리오의 행동에는 거짓이 묻어 있다. 평소 조용하고 평온한 식사를 하기로 유명한 로제리오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저렇게 밥을 허겁지겁 먹겠는가.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행동…. 저 수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디, 잘 만들었는지 볼까요? 으음~!”
이 음?식은 분명 수녀 란이 만든 것일 테고.
일단은 저 수녀는 로제리오의 상관이니까, 함부로 맛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신부님…, 나, 속이 메스꺼워….”
그래도 이런 음식을 삼켜 위로 넘긴다니, 대체 평소에 무슨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냐, 로제리오….
“오늘은 특히나 맛있게 잘됐네요~. 여러분도 사양하지 말고 어서 드세요!”
일종의 사형 선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옆에 있던 에델과 은밀한 눈빛 신호를 주고 받았다.
[먹으라는 뜻이야? 이걸?]
[어쩔 수 없습니다. 호의를 거절했다간, 앞으로의 임무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라요.]
[너 미쳤어? 못해! 난 절대 못 해!]
[독을 먹는 훈련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에델. 이미 옛날에 많이 해보지 않았습니까.]
[독이랑 이건 다르지! 그리고 훈련 때도 맹독은 안 먹었잖아!]
우리의 의견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수저를 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시도한다고?]
[대체 어떤 무모한 사람이 갑자기…!]
“와, 감사히 잘 먹을게요, 란 자매님!”
해맑은 목소리의 주인은…, 아네모네였다.
혹시 최근에 자살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드는 순간이다.
“아, 아네모네? 정말로 이걸 먹을 생각이야?”
“왜 그래요, 신시아 언니? 겉은 이래도, 저 두 분은 맛있게 먹고 있잖아요! 후후, 외형만 보고 함부로 평가하면 좋지 않아요? 그러다 지옥 간답니다?”
음, 확실히. 아네모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물론 인간에게 눈과 코가 달린 이유는, 이런 뻔히 예상되는 위험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함이지만 말이지.
“그럼 잘 먹을게요! 아앙!”
텁. 접시에 담긴 무언가가 아네모네의 입에 들어갔다.
“…웃고 있는데?”
아네모네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처음 모습 그대로, 활짝 웃는 밝은 모습.
확실히, 야산에서 살며 이것저것 먹어온 아네모네에게는 이 정돈 가벼울….
“부르륵.”
숟가락을 채 입에서 떼지도 못하고, 아네모네의 입이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머, 제 음식이 너무 감동적이라 말도 못 하는 건가요?”
글쎄, 저건 ‘쇼크’라고 불러야 옳지 않을까.
“괜찮습니까? 아네모….”
“쿠흑, 언, 붸륵, 커헉, 끄으으.”
아네모네의 머리카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붉게 빛났다.
주인이 의식을 잃자, 성녀의 권능이 응급조치를 시행했다.
위장에 강제로 충격을 준 건지, 이물질과 함께 피를 토하는 아네모네.
“아네모네, 아네모네! 정신 차려 봐!”
“으으, 언…니?”
“맞아. 신시아 언니 맞으니까, 빨리 정신 좀 차려!”
“아네트 언니…? 절…, 마중하러 나오신 건가요…?”
…아무래도 상태가 위급해 보였다.
“아무래도 아네모네의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기선 제가….”
“아니, 내가 갈게.”
에델이 아네모네를 그대로 들쳐 매더니, 수녀 란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쏜살같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에델, 당신만 살려는 속셈입니까!]
[미안해, 로렌스. 하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잖아?]
“어머. 아무래도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방금까지만 해도 살인자가 될 뻔했던 란이,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군다.
“뭐, 그래도…. 덕분에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 됐네요.”
“…비밀스러운 얘기 말입니까?”
설마 이런 폐기물을 음식이라 속이고 먹은 것도, 나와 신시아만을 남겨두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다는 뜻인가?
“이 음식도…, 시험의 일환이었다는 뜻입니까?” “엥? 음식이 시험이요? 농담도. 이 음식에는 어떤 뜻도 안 담겨 있어요.”
인간의 순수한 악의라는 말은, 아무래도 이럴 때 써야 하나 보다.
“…저도 빠져 있어야 하겠습니까, 란 님?”
“아니요. 로제리오는 계속 남아 있어도 좋아요. 잘 됐다. 이 음식, 좀 더 먹을래요?”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수도사에게 지나친 식탐은 금물이니까요.”
“어머, 별 말도.”
강렬히 거부의 의사를 표한 로제리오가,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뭐부터 이야기해볼까나…. 역시 교황 후보? 혹은 빛의 성녀의 얘기부터? 아니면, 당신이 지닌 그 성유물?”
본색을 드러낸 듯, 수녀 란은 탁자에 요염한 자세로 턱을 괴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아니면…, 그 귀여운 아가씨가, 어떻게 하면 ‘마왕’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이 잿빛 수도원에 오기를 잘한 것 같다.
천 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록과 비밀을 쌓아놓은 잿빛 수도원.
그 재투성이 속을 파헤치고 다니는 수도사들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얘기를 시작할까요?”
“…감사할 따름이죠.”
“아, 식사는 편히 해도 좋아요. 난 관대하니까.”
“아니, 그건 역시 됐습니다.”
정말이지, 한 치도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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