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잿빛 수도원(4)
* * *
“신시아에게 깃들어 있는 마왕의 힘을 분리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까?”
잿빛 수도원은 수많은 신비와 고문서가 잠들어 있는 장소다. 어쩌면 교황청이나 이단심문회보다도 더.
어쩌면 저 어린 수녀의 말이 마냥 거짓은 아닐 거라는 희망이,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방법을 알고 있다라….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아니에요. 그냥, ‘옛날에 그러한 예도 있었다’라는 것 정도의 이야기죠.”
“저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신시아를 되돌릴 수 있다.
신시아에게 평범한 삶을 선물해 줄 수 있다.
신시아를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 시켜 줄 수 있다.
‘만약,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삶 전부를 바쳐도 아깝지 않으리라.
“맨입으로 얘기해주실 수 있는 겁니까.”
“음, 일단은요. 우리가 공화국의 마법사나 북왕국의 장사치들도 아니고, 선조의 지식에 값을 매기는 짓은 하지 않으니까요.”
들고 있는 찻잔을 스푼으로 휘저으며, 수녀 란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왕 후보자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잡혀 있겠죠?”
“마왕이 될 가능성을 지닌 자들. 원래는 그랬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내부에 실제로 ‘마왕의 힘’을, ‘마기’를 가둔 자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건 그 여자가 잘 알려줬나 보네. 원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두가 마왕이 될 가능성을 지녔죠. 모두가 마왕 후보자라고 불러도 좋을 지경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죠.”
짝. 란이 손뼉을 쳤다. 그와 동시에 로제리오가 일어나, 지도를 펼쳐 벽에 걸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사람을 물린 건가?’
“빛의 성녀님이 말씀해주셨겠죠. 이번에 부활할 마왕은 모두 여덟. 그중 하나는 그 유명한 ‘운명’ 나으리니까 제외하고….”
지도에 그려져 있는 건 대륙의 전경(??). 일곱 개로 나누어진 나라의 모습이었다.
“북왕국에서 ‘갈망의 바알’이 재봉인, 마도 공화국에서는 새로운 마왕, ‘망집의 베론’이 나타났고…. 아, 당신도 여기 있었죠.”
“전 실제로 마왕의 모습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죠. 자, 두 번째 마왕도 제거. 거기에 이번 공국에서 세 번째 마왕, ‘환란의 루드밀라’도 제압되었고.”
지도에 한둘씩 X표시가 그어진다.
남은 국가는 네 곳. 서연방국. 남왕국. 제국. 그리고…, 성국.
“남은 마왕들은 이 네 나라에서 나타날 거예요.”
“…전혀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마왕들끼리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나라에 나타날 거라고 확신하다니. 신빙성이 없는 얘기다.
“아, 이건 그 고귀하신 성녀님께서 얘기하지 않으셨나 보죠?”
“고귀하신 성녀님?”
“분명 이렇게 나타날 거예요. 애초에, 그렇게 ‘나타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당신도 빛의 성녀와 비슷한 말을 하는군요.”
“마치 게임 같은 이야기죠.” “…게임이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수녀 란이 대답했다.
“맞아요, 게임. 보드판 위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게임 같은 이야기.”
대체 저 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그리고 당신은…, 말이죠. 빛의 성녀가 준비한, 가장 믿음직스러운 말.”
“신부님한테 이상한 바람은 넣지 마.”
수녀 란의 말을 끊은 건, 우리 생크 수도원의 견습 수녀였다.
“어머, 귀여워라. 주인을 지키려는 건가요?”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말만! 신부님, 그만 가자. 나, 저 사람 별로 좋아하지 못할 것 같아.”
“전 당신이 좋은데 말이죠. 후훗, 조그만 기다려 봐요. 이것도 다 설명해 필요한 내용이니까.”
란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자, 보호자 분은 빨리 숙녀를 진정시켜 주세요.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알겠습니다. 자, 신시아. 제 무릎 위에 앉아 볼래요?”
“신부님…! 후우, 알겠어.”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신시아가 내 무릎에 걸터앉았다.
옛날과는 다르게 이곳저곳이 무거워졌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인형같이 가벼운 신시아다.
“이야기를 계속하죠.”
“아까도 말했듯이, 마왕은 이전의 세 나라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남은 나라가 네 나라니까…. 아, 숫자가 하나 안 맞기는 하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죠.”
란이 목이 탄 기색을 보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로제리오가 옆에서 맑은 차를 잔에 따라 건넸다.
“고마워요, 로제. 꼴깍, 꼴깍, 푸후. 로렌스 씨. 만약 신시아가 마왕으로 각성한다고 치면, 그건 어디일 것 같나요?”
“성국이겠죠.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은 없으니까.”
“맞아요. 성국. 이게 첫 번째 조건이에요. ‘성국에서 다른 마왕이 각성할 것’.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신시아 자매님에게는 가능성이 생겨요. ‘마왕’이라는 틀이 조금 헐거워지는 거죠.”
“가능성? 겨우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겁니까?”
가능성에 국한한 얘기라면 이미 수도 없이 들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현실성이다. 확실하게 신시아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마왕을 없앨 수 있는가.
“두 번째 요소가 바로 그 검이에요.”
“…검? 이걸 말하는 겁니까?”
등 뒤에 있는 검을 꺼내 란에게 보여주었다.
비록 검날은 붕대에 감싸져 있지만, 그런 건 란에게 별 의미가 없는 듯했다.
한참을 유심히 살피던 그녀가 내게 말한다.
“마왕과 상극인 존재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아까부터 질문만 하는데, 그게 당신의 대화 방식입니까?”
“로렌스, 지금은 그냥 란 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게 네 쪽에서도 편할 거야.”
진짜로 대화 방식이 저런 모양이군.
“마왕과 상극인 존재면…, 용사?”
“맞아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믿는 일곱 신과도 일맥상통하죠. 다시 말하면…, 신의 힘을 이용한다면, 신시아 자매님의 안에 있는 마왕만 쓰러뜨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확실히 그건 일리가 있네요.”
‘신의 힘을 이용한다’. 한 번도 접근해 보지 못한 방법이다.
란의 어려운 말을 반쯤 흘려듣던 신시아도 눈을 깜빡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게 당신이 사용하는 성유물이네요.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성기사단장님께서 사용하시던 물건입니다. 지금은 제가 물려받았고요.” “아, 그래! 리날도가 쓰던 물건!”
“…리날도?”
“흡!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쵸, 리날도 님께서 쓰던 물건이죠.”
검의 형태를 한 성유물. 나는 이걸 ‘세바스(안식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행히 이 검이 날 주인으로 인정한 건지, 조금씩 힘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한참 멀었지.
“알고 있나요, 로렌스? 성유물에는 각각의 일곱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답니다. 가령, 제가 사용하는 십자가에는 대지의 여신 닌후르삭의 힘이 담겨 있는 식으로.”
“그 십자가도 성유물이었습니까?”
아까 전부터 신경 쓰였던, 란이 가지고 있던 십자가.
들고 다니는 것치곤 너무 컸고, 그렇다고 장식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런데 설마 성유물일 줄이야.
“뭐, 그렇죠. 자, 로렌스. 당신의 성유물은 무슨 신의 힘을 품고 있죠?”
“…….”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내게 중요한 건 성유물에 담긴 신 힘의 종류가 아니라, 얼마나 강한 힘을 담고 있느냐였기에 별 신경도 쓰지 않았으니.
“모릅니다.”
“대충 예상하고 있었어요. 설사 알아보려고 했더라도, 추측만 하는 게 고작이었을 거고요.”
“란 님은 이게 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말고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란이 내 검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우투. 담당하는 권역은 전쟁과 태양, 그리고… ‘시련’.”
시련. 그 단어를 들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이 성유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이 성유물이 검인 이유는, 단순히 적을 물리치기 위함이 아니라….”
“맞아요, 로렌스.”
이 성유물은, 내 앞의 장애물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검 끝은, 처음부터 당신을 향해 놓여 있었어요.”
나를, 베기 위함이었다.
“우투는 시련의 신이죠. 그는 처음부터 많은 혜택을 주는 걸 싫어해요. 자신이 내린 시련을 이기는 자에게만 상응하는 힘을 내려주죠. 그의 모든 성유물이 그러하듯.”
“그럼, 제가 이 검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도….”
“같은 이유죠. 보아하니, 아직 이 검에게 ‘진짜’ 시련도 받지 못한 것 같은 모양인데,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힘을 이끌어 낸 거예요? 제 쪽에서 묻고 싶을 정도인데.”
별로 깊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키고 싶었더니 지키는 힘이 주어졌고, 조용한 장소를 원했더니 조용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을 손에 넣었다.
그런 식으로 여태까지 어떻게 새로운 권능을 손에 넣었는지, 란에게 낱낱이 말해주었더니.
“…로제, 당신 친구, 어마어마하게 특이한 사람이네요.”
“제 자랑이죠. 알잖습니까, 란 님. 특이한 사람의 주위에는, 비슷한 사람이 모이는 법이라는 걸.”
본인 앞에서 그런 말까지 할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여튼.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랍니다. 당신이 신시아 자매님의 마왕의 힘을 끊어낼 성유물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이 바라는 미래도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거죠.”
끊어낸다, 끊어낸다라…. 마침 나에겐 비슷한 용도의 성유물이 하나 있다.
“마침 시련의 신의 성유물을 가지고 있고, 거기다 이미 그 성유물은 주인을 당신으로 인정했다라….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확실한 건, 운명은 아니죠. 전 그 말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이거 우연이네요. 저도 싫어요. 운명이라는 말.”
들고 있던 잔을 마저 비우며, 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맛있게 잘 먹었어요. 아, 교황 후보나 빛의 성녀에 관한 얘기 말인데….”
“아, 그건 괜찮습니다. 그건 저희 쪽에서 찾아보면 될 일이니까요. 그리고 빛의 성녀는…, 저도 그분이 비범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어쩌면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비범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자, 일어나죠, 신시아.” “…어쩌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네? 방금 무슨 말을….”
“아뇨, 아무것도. 부디 제 말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머리가 복잡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후련하다.
안개로 뒤덮인 막막한 뱃길에, 조그만 빛줄기가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란 님.”
“뭘요. 도움이 되었다면 저야 다행….”
“아니, 잿빛 수도원장님.”
“…….”
내 말을 들은 란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눈치채지 못할 거로 생각한 건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처음엔 단순한 추측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대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럴 거라고 생각이 되더군요. 아니, 오히려 당신이 수도원장이 아니면 이상할 정도고.”
“…분명 연기는 완벽했는데? 로, 로제! 당신이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준 거 아니에요?”
“억울합니다, 원장님. 누가 봐도 원장님의 실책인데.”
“원장님이 아니라 `란‘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대, 대체 뭐가요!”
잔뜩 붉어진 표정으로, 란이 로제리오의 복부를 마구 때리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저런 모습만 보였다면, 나도 함부로 의심하지 못했을 텐데.’
“세상에 어느 누가 기사단장을 이름으로 부르겠습니까. 일단 여기서 감점 3점.”
“그, 그건 확실히 실수가 맞지마는….”
“거기에 입이 너무 길었어요. 아무리 로렌스에게 정보를 주고 싶다고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정체를 숨기기란 무리가 있었죠.”
“으으, 으으으으…!”
아까까지의 신비한 모습은 어디로 내팽겨 친 건지, 란은 그 나이대 특유의 모습으로 돌아가 로제리오를 계속 때렸다.
“저한텐 아무 문제 없어요! 전부, 전부 로제가 잘못한 거라고요!”
“네, 네. 란 님, 그만 정리하는 것 좀 도와주세요. 아, 로렌스. 난 이따 나중에 따라갈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
신시아의 손을 잡고, 그대로 밖으로 남았다.
“신부님. 어쩌면 저 수녀님, 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전 이미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척을 해보고 싶었을 뿐, 저게 원래 성격에 가까운 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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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와 신시아가 돌아간 후, 로제리오를 때리다 지친 란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후우, 후우. 정말, 로제는 몹쓸 아이라니까.”
“그래도 잘하셨습니다, 란 님. 로렌스는 의심이 많은 친구라,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흥미조차 갖지 않으니까요.”
“후,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원.”
“수도원장님이시잖아요? 의무를 따라주세요.”
멀어져 가는 로렌스와 신시아를 보며, 로제리오가 말을 이었다.
“아마, 오늘 밤이겠죠?”
“그럴 거예요. 본인이 성유물에 담긴 신의 이름을 깨달았으니, 검 쪽에서도 먼저 접근해 오겠죠.”
세바스. 안식일이라는 뜻을 가진, 검의 형태를 한 성유물.
사실 란은 로렌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모든 성유물에는, 신의 분령(??)이 담겨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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