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99화 (99/109)

〈 99화 〉 잿빛 수도원(5)

* * *

“아네모네, 몸은 좀 어때?”

“으으, 으어으…. 언니이?”

“네, 맞아요. 에델 언니입니다. 정신이 들어?”

“아네트 언니이…. 같이 가요오….”

“후우, 말을 말아야지.”

어느 한 수도사가 안내해 준 방. 그곳에 에델이 아네모네를 눕혔다.

대체 음식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대부분의 저주와 독성 성분은 불식시키는 성녀의 육체조차 견디지 못하는 것인가.

‘아마 당분간은 계속 이 상태일 것 같고…. 그래도 헛것을 보는 걸 빼면 따로 이상 증세는 안 보이니까, 잠시 쉬도록 내버려 두면 되겠지.’

한시름은 놓았다. 그렇게 생각한 에델은 잠시 바깥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이곳은… 고요하네.’

수도원 곳곳에 심어진 나무에서는 향긋한 초목의 향기가 풍겨왔고, 단색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눈을 편하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사람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다들 느긋하네. 아니, 우리가 지나치게 바쁜 거였던 걸지도.’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삶은 언제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임무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단자를 죽여야만 한다.

삶은 너무나도 짧고, 대륙에 잠식한 이단자의 숫자는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걸까, 대체.’

하지만 심문관의 자리를 내려놓은 지금, 에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시간에 쫓겨 하지 않는다. 깨달음에 늦고 빠름은 없으니.

그저 목숨이 다해 신의 곁으로 돌아가기 전, 조금이라도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편안한 곳이죠, 잿빛 수도원은?” “…그러네요.”

“자요, 여기 차라도 한 잔 받으세요.”

“후후, 감사합니…가 아니라, 누구세요?”

어느 틈엔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능청스럽게 차를 건네는 남자.

아니, 남자라고 하기에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네모네의 또래로 보이는 이 아이는, ‘소년’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아 보였다.

“전 이곳의 종자예요. 이름은… 굳이 언급할 가치도 없고요.”

“종자? 그럼 수도사가 아니란 말인가요?”

“그렇죠. 아,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누나. 전 그쪽이 더 편하거든요.”

“그런가요. 아니, 그래? 그럼… 그럴까?”

이것도 이곳 사람들의 분위기인 건가. 종자가 건넨 차를 받으며 에델은 생각했다.

처음 보는 낯선 이와 아무런 거부감 없이 함께 차를 마신다. 이단심문관으로 반평생을 살았던 에델에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후으, 녹는다, 녹아.” “좀 더 시원한 음료로 준비해드릴 걸 그랬나요.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오던데.”

“아냐, 아냐. 이걸로 괜찮아. 여긴 엄청 높은 곳이라, 아까부터 쌀쌀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거든.”

“그럼 다행이네요, 누나.”

누나, 누나.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얼굴이 빨개진다.

신시아나 아네모네에게 언니란 말을 들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사실 자신은 동생을 가지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누나, 보아하니 누나도 수도사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오지까지는 왜 오신 거예요?”

신의 점지를 받았다는 교황 후보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면 의심을 살 게 뻔하니, 에델은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음, 성국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중요한 일? 어떤 일인데요?” “그게, 사람을 찾고 있어. 성국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멋진 사람을 찾는…, 고용주? 같은 일이야.”

“흐음, 그렇구나.”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그렇게 합리화하며, 에델은 서둘러 찻잔을 비웠다.

“음, 잘 마셨어! 그럼 나도 슬슬 일하러….”

“제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것도 어른의 사정이겠죠?”

종자의 말에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놈의 꼬맹이 좀 보게, 설마 자신이 간파당했다는 건가?

“…너 말이야, 혹시 날 떠본 거야?” “설마요. 저 같은 어린애가 뭘 알겠어요?”

“흐음….”

“기껏해야 누나가 이단심문회의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에 불과하니까요.”

“역시 알고 있었잖아!”

이 아이, 범상치 않다. 아네모네를 처음 봤을 때의 그 느낌이, 눈앞의 이 소년에게도 비슷하게 느껴지고 있다.

아, 이게 바로 로렌스가 항상 얘기했던 ‘이단심문관의 감’인가?

“후우, 그래, 맞아. 이단심문회의 사람이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옷 벗은 지 꽤 됐다?”

“그래 보여요. 지금 입고 있는 옷, 정성스럽게 관리한 흔적이 있잖아요. 누나가 신분을 숨기려고 빌린 옷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겠죠.”

고도의 눈썰미다.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는 거지, 이 꼬맹이는?

물론 엄밀히 말하면, 수녀복을 깨끗이 관리한 이유는 빗나갔다.

로렌스가 준 옷이니까. 로렌스가 준 선물이니까. 하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 생각보다 되게 똑똑하구나? 그런데 왜 종자 같은 걸 하는 거야?”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잖아요, 누나.”

“그건 그렇지만…. 너 같이 똑똑한 아이들은 다른 걸 하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법이거든. 사제라든지, 아니면 수도사라든지.”

에델의 반문에, 소년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누나도 그쪽 사람이구나.”

“그쪽 사람?”

“열심히 일하고, 이 한 몸 바치는 데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요. 저는 그런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맞은 노인이라도 되어보였다.

본인이 산 인생의 반을 겨우 넘긴 애송이가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니, 에델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풋, 정말이지. 못하는 소리가 없네.” “누나는 이해 못할 거예요. 세상에는 조용히 살다 조용히 신의 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그러게. 내 눈앞에도 한 명 있네.”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간다라…. 제법 괜찮은 울림이다.

에델도 한때 그런 삶을 꿈꾼 적이 있다. 이단심문관 같은 성직자가 되는 게 아니라, 어디 한적한 시골이라도 들어가 꽃집을 운영하며 사는 꿈.

…물론 ‘발랑틴’이라는 성을 가진 순간부터, 그 꿈을 이루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는 사실도 깨달아 버렸지만 말이다.

“마르첼로! 이봐, 어디로 간 거야?”

대화를 끊은 건, 한 수도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였다.

‘마르첼로, 마르첼로. 아, 혹시 이 아이의 이름이 혹시?’

순전히 감에 의존해, 에델이 넌지시 소년을 떠봤다.

“혹시 저 마르첼로라는 사람, 너야?”

“용케도 아셨네요. 맞아요. 제 이름은 마르첼로입니다.”

소년을 찾는 수도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닌지,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마르첼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찻잔을 마저 비웠다.

“절 계속 부르네요. 시간이 다 된 것 같아요.”

수도사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비로소 떠날 채비를 하는 소년.

잘은 모르지만, 이 소년이 따르는 수도사가 바로 저 중년이겠지. 에델은 그렇게 생각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누나. 별로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으응, 나도 차 잘 마셨어.”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능청스럽다. 나이에 안 맞게 너무나도 능청스러운 소년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델은 자신의 이름을 소년에게 말해주었다.

“에델바이스 발랑틴. 그냥 에델이라고 불러.”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은 거의 없겠지만.

“네. 고마워요, 에델 누나. 제 이름은 마르첼로예요. 성은 따로 없고, 그냥 마르첼로. 종자 마르첼로.”

그렇게 말하고서 소년은, 마르첼로는 등을 돌렸다.

그러더니 자신을 찾던 수도사의 앞으로 가,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찾았군. 어디 갔었던 게냐, 마르첼로.”

“헤헤, 죄송합니다, 어르신.”

“후우, 어쩌다 너 같은 녀석을 내가 맡게 됐는지. 자, 어서 가자. 높으신 분이 널 호출하셨다.” “넵, 알겠습니다­!”

에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게 정말 방금까지 능청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그 소년이 맞는가.

혹시 마귀에 홀린 건 아닐까, 에델이 자기 뺨을 꼬집어 보았다.

‘아니, 저건 가짜 모습일 거야. 일종의 처세술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르첼로를 바라보던 에델에게, 그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음에 봐요, 누나.”

여전히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니까.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따분해질 정도야.’

곧 여름이다.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에델이 기지개를 켰다.

* * *

“신부님, 아까부터 뭐하는 거야?”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

“그래…? 그럼, 나 먼저… 잘….”

코오.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신시아가 잠에 빠져들었다.

여전히 귀엽고, 볼 때마다 힘이 나는 얼굴이다. 요즘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다.

‘이제 현실의 악몽만 치우면 끝나는 문제란 말이지.’

내 앞에는 검이 놓여져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검의 형태를 한 성유물이.

수녀 란이 말했다. 이 검에는 함부로 가늠하지도 못할 잠재력이 담겨 있다고.

‘시련의 신 ’우투‘. 이 검은 그의 성유물이라고 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잿빛 수도원장의 말씀이니 믿어야지.

이 성유물의 힘을 쓰면, ‘시련’의 권능을 사용하면 신시아의 몸속에 있는 마왕을 없애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했다.

그럼… 해봐야지. 난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달려들 테니까.

“으응, 신부니임…. 헤헤.”

그래, 신시아를 위해서라도.

“그런데… 뭘 해야 하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제법 많다. 성유물의 종류와 방향성을 알았으니, 이제 그 힘을 깨우기만 하면 될 텐데.

가장 중요한 ‘방법’을 모른다. 지금까지 너무 무모하게 써왔나.

‘그동안 어떻게 힘을 꺼냈었나. 그걸 되뇌면 방법이 떠오를지도 몰라.’

나는 ‘형(?)’이라는 방식으로 성유물에서 힘을 끌어다 사용했다.

1형, 단죄. 2형, 수호성인. 3형, 성역. 4형, 정화의 불길.

내 나름대로 이름을 지어 사용했지만, ‘단죄’를 제외하곤 정식으로 불리는 이름조차 아니다.

‘새로운 계단을 밟을 때는…, 언제나 ’갈망‘이 필요했어.’

갈망. 소망. 아무것도 아닌 바람.

주변의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고, 쓸데없는 오해로 인한 싸움은 피하고 싶었으며… 에델을 구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검은 내게 새로운 가능성을 건넸다.

굳이 따지면, 나도 모르게 검과 공명한다고 해야 하나.

‘공명, 공명이라….’

…어쩌면, 괜찮은 방법이 떠오른 걸지도 모른다.

‘성법진을 그리고, 검을 가운데에다 둬서….’

성도에 머무르던 동안 읽었던 여러 책 중, 내 이목을 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검에 영혼을 담는 법’. 다시 말하면, ‘에고 소드’라 부르는 검에 대한 설명서였다.

‘됐다. 솔직히 말하면, 성법진보다는 마법진에 가깝지만.’

성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남왕국이나 서연방국에는 ‘정령’이라 불리는 기이한 생명이 있다고 한다.

에고 소드도 이와 비슷하다. 검에 정령이나 혼령이 깃들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마치 검이 살아 있는 생명처럼 반응한다고 한다.

성유물도 신의 권능이 담겨 있으니, 비슷하지 않을까…?

“날카로운 그릇에 담긴 혼의 아지랑이여, 그대와의 대화를 청한다.”

지금 이 모습을 이단심문관이 본다면, 분명 날 잡아가겠지.

성직자가 마법 주문을, 그것도 요사스러운 마법진까지 그리고서 외운다니. 성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단 행위다.

‘드레이크가 본다면 까무러치겠군.’

그래도 이걸 통해 조금이라도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이미 성직자의 길은 포기한지 오래다. 신시아만 있다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갈 수 있겠지.

“…….”

한참이 지나도, 검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실패인가. 하기야, 책에서 본 내용을 실천에 옮긴다고 바로 성공할 리는 없지.

‘…나도 참,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위대한 신의 힘을 겨우 정령이랑 동일시하다니. 내가 잠시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

눈앞의 성유물에게 미안해질 정도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곤혹이나 치르고.

“…오늘은 이만 자자. 일단 검은 치워두고, 그리고 또….”

내일을 기약하며 검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

점차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그대로 픽 하고 눈이 감겼다.

마력 반동인가? 젠장. 이 무슨… 추태를….

‘…저건.’

어두워져 가는 시야 속에서, 저 멀리 무언가가 보였다.

수평선. 푸른 바다와, 그보다 더 푸른 하늘.

그 둘이 만나 이루는 끝이 없는 무한한 공간.

그 선 끝에, 누군가가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누…구.”

손을 뻗었다. 왜 손을 뻗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곳이, 수평선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누군가가 희미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신경을 집중해 귀를 기울이자 들린 것은­.

[잘 찾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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