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100화 (100/109)

〈 100화 〉 시련의 신

* * *

[잘 찾아왔다.]

찾아왔다니? 내가 말인가?

지나칠 정도로 눈부신 후광 때문에, 내게 말을 건네는 사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태양은 없는데, 그런데도 이 공간은 눈부실 만큼 푸른색을 띠고 있다.

“나를 말하는 겁니까?”

다행스럽게도 목소리는 나온다. 대체 이 공간은 뭐지?

‘…분명 들은 적이 있어. 심상 풍경. 각자의 마음속을 구현한 가상의 세계. 하지만 이곳이?’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의 심상 풍경이 이렇게 생겨 먹었을 리가 없다.

불타는 거리라던가, 시체로 가득한 어두운 뒷골목이라면 모를까.

이단심문관 시절 질리도록 봐왔던 환각이니, 분명 그곳이 내 심상 풍경이라고 확신한다.

…아니면 신시아로 가득 찬 꿈같은 공간이라던가.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이 공간은 대체….”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전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목소리도 처음 듣고요. 아니, 그전에 일단 모습이 보여야 뭘 구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역광 때문에 여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은 알아보기 힘들다.

‘잠깐, 건장한 체격의 남성?’

[아아, 이것 때문인가. 미안하게 됐군. 이건 일종의… 권능 같은 거라서 말이야.]

권능.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저 남자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투십니까?”

이 공간에 태양은 없다. 아니, 있을 필요가 없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나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우투. 그렇게도 불리지. 너의 말이 맞다, 청년.]

태양의 신. 전쟁의 신. 투쟁의 신이자… 시련의 신.

그리고, 신시아를 구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신이기도 하다.

“어두운 길을 걷는 어린양이 일곱 신을 뵙습니다.”

[경배를 취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어.]

점차 역광이 사그라들었다. 내가 그의 정체를 인지했기 때문일까.

“무슨 뜻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너희들이 간절히 바라는 신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원본’이 아니야. 분령(??)이지. 원본에서 떨어져 나온 부산물.]

분령. 이제야 알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세바스에 담긴 우투의 의식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내 의식이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니. 네 의식과는 상관없다.]

“…제 생각을 읽으신 겁니까?”

[넌 나의 검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이미 몇 번이고 공명하고, 동조한 사이일 텐데. 그 정도도 못 하면 함부로 성유물을 자칭할 수 있겠는가.]

역광이 사라진 남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사’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검게 그을린 피부. 언뜻 봐도 오랜 세월 동안 단련되었음을 알 수 있는 강인한 육체.

일곱 신 중 하나인 우투는 서연방국의 사람과 흡사하게 생겼다고 들었는데, 이제야 그 이야기를 이해할 것 같다.

“…한 번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이미 계속 함께 하지 않았나.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검이고, 너는 검을 휘두르는 위대한 전사다.]

“저는 전사가 아닙니다. 성국의 일개 성직자에 불과할….”

[아니. 그렇지 않아.]

턱. 남자가, 전쟁의 신 우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지키고 싶은 게 있지.]

마음속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신시아의 모습. 그리고 나와 함께 지내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맞습니다.”

[그걸 위해 검을 들었고. 약탈이 아니라… 수호를 위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넌 이미 훌륭한 전사다.]

신에게 인정 받는다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절할지도 모르는 얘기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의 나도 마찬가지고.

“감사합니다, 우투시여.”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무래도 너와의 만남이 오래 지속될 것 같지는 않아.]

우투가 손가락으로 수평선의 끝을 가리켰다.

무언가 불안정한 건지, 저 멀리서 파도가 일렁이며 밀려오고 있었다.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이 공간에 오래 있을 수는 없겠어.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얘기를 시작했다. 신시아라는 한 소녀의 이야기부터.

다행히 우투께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다음.’이라는 말을 몇 번 해주었기에, 이야기는 순조롭게 마지막까지 도달했다.

“…하여, 그녀에게서 마왕을 분리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이해했다. 어린 전사여.]

내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그가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한 일이다.]

“……! 정말, 정말로 그렇습니까?”

혹시 이 상황이 꿈은 아닐까. 나의 망상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이 공간은, 이 충만한 신성력은 결코 나만의 착각이 아닐 테니까.

[다른 신이라면 힘들겠지만, 나와 엔릴, 그리고 인인나 정도라면 가능하지.]

우투가 검을 집어 들었다. 세바스와 똑같이 생긴 검을.

[전사여. 네가 들고 휘두르는 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의 힘이 깃든 성유물입니다.”

[성유물. 그렇지. 우리 신들의 힘이 남겨져 있는, 순리를 비트는 힘이 담긴 위대한 유산.]

하늘을 향해 검을 높이 쳐들며, 우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그래, 네가 ‘세바스’라고 이름 붙인 검은 그중에서도 특별하지. 너도 이미 그걸 느꼈을 테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전쟁과 투쟁의 신인 우투가 세바스를 들자 든 생각은, ‘정말 잘 어울린다’였다.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검인 것처럼, 세바스는 그 위용을 과시했다.

[세바스는, 그 검은 내가 사용하던 검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 원본이 사용하던 물건이었지.]

내가 지닌 성유물에는 위대한 역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비록 엔릴의 검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으나, 그럼에도 그 검은 훌륭한 편이지. 마지막 순간까지 내 곁에 함께 있던 몇 안 되는 검 중 하나였으니.]

“당신의… 마지막 순간….”

[검에 내가, 원본의 분령이 존재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난 이미 이 검에 영혼을 불어넣은 거야.]

검에 대한 감상을 말하는 우투는 범접할 수 없는 신의 모습이라기보단,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전사에 가까워 보였다.

[바깥이 그립군…. 아마 내 원본도 그리 생각할 테지.]

“당신의 원본은, 지금도 하늘 위에서 저희 어린양들을 바라보고 있겠죠.”

[…아무래도 많은 걸 알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어린 전사여.]

우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전사여. 그대는 분명 성국 출신이었지. 그렇지?]

“맞습니다.”

[성국이라. 그렇다면 닌후르삭이 머무르는 곳이겠군. 그래, 대지의 여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외람되옵니다만,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닌후르삭은 그런 길을 택했나. 아니, 다른 일곱 신 모두가 그런 선택을 했겠군. 내 원본조차도.]

영문 모를 말만을 중얼거리며, 우투는 팔짱을 끼고 잠시 사색에 잠겼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말하길.

[소녀의 몸에 담긴 마왕을 베고 싶다고 했나?]

그가 드디어 내가 원하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신시아의 몸속에 있는 마왕을 제거하는 방법. 내 인생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렇습니다, 우투시여.”

[어린 전사여, 그대는 내가 왜 시련의 신이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겠지.]

우투가 시련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우투의 신화. 그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여덟 개의 시련을 통과하여, 끝내는 본인 스스로 투쟁의 권능을 손에 넣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전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만난 사람들이 이루어낸 전설.

“당신께서는 우리 어린양에게 시련을 내리십니다.”

[그렇지. 살아간다는 건, 곧 시련을 견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 시련을 극복한다면…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힘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다. 우투의 시련을 받은 자들, 특히 서연방국의 사람들이 써 내려 간 전설이 그를 시련의 신으로 만들었다.

시련을 극복하면, 우투는 그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나누어 준다.

때로는 힘을. 때로는 정신력을. 때로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지금 이 세계, 그러니까 네가 사용하는 ‘세바스’도 마찬가지다.]

세바스의 잠재력. 그것이 시련의 신의 권능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너에겐 시련이 내려와 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 관점에서는 충분한 시련이지.]

저벅저벅. 우투가 맑고 투명한 수면 위를 밟더니, 그대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익숙한 풍경이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너의 여정을 보아라, 어린 전사여.]

여태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너는 이 검을 든 그 순간부터, 수없이 많은 자를 베어 넘겼다. 신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너는 지독한 운명을 지닌 소녀를 외면하지 않았으며.]

[너는 수많은 길을 잃은 자들을 따뜻한 신의 품으로 이끌었고.]

[너는 믿을 수 있는 동료와 협력하여 광기에 빠진 전사를 구원했으며.]

[너는 에레쉬키갈의 집착과도 같은 은총을 받은 소녀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너는, 마왕을 쓰러뜨리는 데 협력했지. 이것만큼은 나도 크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너의 친구를 저버리지 않았다. 너의 친구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우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전사여. 너는 이 모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의 물음. 일곱 신 중 한 명의 물음이다.

정답은 이미 알고 있다. 너무나 쉬워서, 머리를 굴릴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시련입니다.”

[정답이다. 어린 전사여.]

수면이 흔들리더니, 거대한 물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아주 먼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파도는, 어느새 바로 근처까지 밀려들어 와 있었고.

[아직은 마왕을 벨 수 없다. 하지만 먼 훗날, 이 세계가 비로소 완성된다면 가능하겠지.]

“우투시여, 그 말은…!”

[앞으로도 시련이 계속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스스로를 시련의 구덩이로 밀고 있지 않느냐.]

우투의 몸이 다시 역광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 세계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대로는 확실한 수단을 알 수 없어, 나는 다급히 외쳤다.

“대체 언제면, 언제쯤이면 가능하겠습니까?”

나의 물음에, 우투는 메아리치는 목소리로 내게 답을 건넸다.

[여덟이다.]

여덟. 우투가 헤쳤다는 시련의 개수와 같다.

[너는 이미 네 개의 시련의 증표를 얻었다. 앞으로 네 번의 시련을 더 뛰어넘어라. 그때라면… 너와 마주 앉아, 술 한 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 말을 끝으로, 우투의 모습은 아지랑이가 되어 흩어졌다.

파도가 밀려온다. 피하지 않고 그 파도를 맞으며, 나는 눈을 감고 다짐했다.

‘앞으로 넷. 조금만 있으면 신시아를­.’

구할 수 있어.

* * *

눈을 뜨자 처음으로 본 것은, 바닥에 똑바로 세워져 있는 세바스였다.

손을 쥐었다 펴본다. …아무래도 꿈은 아니었겠지.

“헤헤, 신부니임. 더는 못 먹어….”

여전히 잠에 빠진 신시아의 모습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난 겨우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여태까지 달려 온 거다.

매일매일,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신시아를 곁에서 지켜보고 싶어서.

“맹세하겠습니다, 우투.”

세바스의 손잡이를 잡고, 맹세하듯이 중얼거렸다.

“당신이 내린 시련이 무엇이든지.”

아마도 당신은 듣고 있겠지. 수평선이 보이던 그 세계에서.

“나는, 극복해 보이겠습니다.”

모든 건, 나의 신시아를 위해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