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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102화 (102/109)

〈 102화 〉 숨은 후보 찾기(2)

* * *

우리 앞에 나타난 소년은 앳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식 수도사는 아닌지, 잿빛 수도원 특유의 복장도 하고 있지 않았고.

“마르첼로? 마르첼로 맞지?”

그를 안다는 듯, 에델이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소년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르첼로. 그게 소년의 이름인가 보다.

“기억해주셨네요, 누나. 하긴, 그만큼 성국에서는 흔한 이름 중 하나니까요.”

마르첼로는 성국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 중 하나다.

전대 교황의 이름 중 하나를 고르면 아이에게 복이 온다는 관념이 있는지라, 같은 마을에 ‘마르첼로’나 ‘비오르’ 같은 이름이 몇 개나 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아는 사람입니까, 에델?”

“응. 자주 보는 건 아니고, 몇 번 신세를 졌던 아이. 마르첼로가 아니었으면 수도원 조사고 뭐고 힘들었을 거야.”

이단심문관 출신인 에델이 어떻게 수도원 곳곳을 돌아다녔나 했더니, 이런 조력자가 있었나.

“반갑습니다, 마르첼로. 생크 수도원의 신부, 로렌스 프랑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전 마르첼로예요. 성은 없고, 그냥 마르첼로. 수도원에 널리고 널린 종자 아이들 중 한 명이니까 기억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 나이의 소년치고는 꽤나 독특한 인사말이다.

이런 애들도 있었지. 실제 나이에 비해 어른 느낌이 나는 아이.

“신부님, 생크 수도원에는 신부님 혼자이신 건가요?”

“신부는 저뿐이지만, 수녀님들도 몇 분 계십니다. 이사도라 수녀님이나 베티 수녀님, 그리고… 여기 이 자매님도.”

나는 에델을 가리켰다. 이제 에델은 엄연히 우리 수도원의 수녀니까.

“그럼 신부님도 수도원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건….”

어? 그렇게 되나? 확실히 생크 수도원의 관리 및 총괄은 내가 하고 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아니야, 마르첼로.”

마르첼로의 말을 대신 받은 건, 여태까지 계속 조용히 있었던 로제리오였다.

“생크 수도원은 포교를 위해 성당의 역할을 겸해. 우리 잿빛 수도원이 관리하는 곳이 아니란 뜻이지. 무엇보다도, 그곳엔 수도사가 없잖아.”

“알고 있었어요, 로제 형.”

‘로제 형’이라니. 저 소년은 로제리오와도 친분이 있는 사이인가 보다.

“조크죠, 조크. 처음 볼 만난 분께는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는 게 낫잖아요?”

“음, 다음에는 제대로 된 인사법을 알려줄게, 마르첼로. 내 친구들은 특이하니까 괜찮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화법이야.”

로제리오의 저런 엄격한 표정은 처음 본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신경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 로제리오가 저렇게 반응할 정도면… 꽤나 마르첼로라는 저 소년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로제 형이 그렇게 말하면 들어야죠. 자, 누나. 이게 누나가 찾던 책이죠?”

마르첼로가 에델에게 책을 건넨다.

‘초대 교황에 대한 기록’. 우리가 찾던 책의 제목이다.

“으응, 맞아. 고마워, 마르첼로.”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지만, 마르첼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자, 로렌스. 네가 말했던 거. 이거면 된 거지?”

“잘됐군요. 이걸로 어느 정도는 정리를 할 수 있겠어요.”

교황의 계보. 교황은 어떻게 선출되었으며, 또 어떻게 자리에서 물러났는가.

이곳 잿빛 수도원의 기록실에 있는 자료라면, 우리의 의문에 충분히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

“어딜 가려는 거지, 마르첼로?”

조심스레 뒷걸음질 치던 마르첼로를 붙잡은 것은 로제리오였다.

“…또 왜 그러는 건데요, 형.”

“몰래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아직 오후 세 시잖아. 종자인 너에게 있어 지금은 근무 시간 아닌가?”

“역시 들켰네요. 맞아요. 땡땡이 좀 피우고 있었죠. 그래도 기록실에 들어와 책을 읽는 건 좋은 땡땡이에 속하지 않을까요?”

한낮의 일탈을 걸렸음에도, 마르첼로는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

양팔을 머리 뒤편에 갖다 대고 휘파람을 불면서.

“다른 것보다, 전 로제 형의 종자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제게 뭐라 할 권리는 없….”

“그럴 줄 알고 이런 걸 준비해 뒀지.”

로제리오가 허리춤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든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름 옆에는 하나 같이 서명이 적혀 있었다.

“응? 대체 이게 뭔…. 이런.”

종이를 본 마르첼로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이 소년을 만나고 처음으로 본 표정 변화다.

“네가 종자로 속해 있는 다른 형제들께 허락을 구했어. 널 임시로 내 종자로 편입하게 할 수 있도록 조치했지.”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요, 형.”

“이러고 싶지 않았다면, 좀 더 성실하게 행동했어야지. 자, 종자에게 지시하겠다. 로렌스의 일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 이곳에 있도록 해.”

대답도 없이 고개만 건성으로 끄덕이며, 마르첼로는 다시 책무더기 속으로 스스로의 몸을 밀어 넣었다.

로제리오는 치밀한 성격이니, 아무리 마르첼로가 똑똑한 아이라도 피해 가기는 힘들겠지.

“이제 슬슬 정리됐네. 흐름 끊어서 미안해, 로렌스.”

“아니요, 아닙니다. 오히려 고맙죠.”

땡땡이를 기록실로 올 정도면, 마르첼로는 분명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다시 시작하죠. 어디까지 진행했었죠?”

* * *

어느덧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하루로는 끝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방대한 양에 무기력해질 정도다.

“신부님, 나, 눈이 너무 따끔거려….”

“으으, 못 해! 더는 못 한다구! 이걸 언제 다 정리하라는 거야!”

하나둘 씩 낙오자가 생기기 시작한다.

신시아와 에델의 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책상을 가득 메운 양피지의 향연. 탑을 이루듯 높이 쌓여 있는 두툼한 책들. 거기에 글씨는 또 왜 이리 작단 말인가.

“아, 그건 종이의 희소성 때문이에요. 중요한 건 편의성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이니까, 조금이라도 많은 내용을 적은 종이에 담기 위해 글씨 크기를 줄인 거죠.”

“…설명 감사합니다, 마르첼로.”

다 죽어 나가는 우리 자매님들과는 달리, 잿빛 수도원 출신인 둘은 아직 쌩쌩하다.

로제리오야 스승님의 제자였던 시절부터 책벌레였으니 그렇다 치고, 이 마르첼로라는 소년은 왜 지칠 기색이 보이지 않는 건가.

“대단하군요. 잿빛 수도원은.”

“과분한 칭찬이에요, 신부님. 그래도 이건 별거 아니에요. 수도원장님은 한 번 기록실에 들어갔다 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3일은 계시니까요.”

그 수녀 란이?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덕분에 어느 정도 정리는 됐습니다. 가장 중요한 교황의 계승 부분은 슬슬 윤곽이 드러났고요.”

교황의 계승. 역대 교황은 빠짐없이, 일곱 신 중 하나의 목소리를 통해 다음 교황 후보로 선정됐다.

말이 후보지, 애초에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한 명이기 때문에 대부분 후보가 아닌 정식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이 계승 부분이 좀 난감합니다.”

너무 옛날 자료가 섞여 있어서 그런가. 기록과 설화, 전설과 신화가 섞여 난잡한 구석이 있다.

“어떤 교황은 일곱 신 모두에게 한 번 씩 성사를 받고 교황에 올랐다고도 하고, 또 어떤 교황은 목소리와 함께 일렁이는 불꽃을 봤다고도 하죠. 어떤 교황은 아예 신들의 세계로 초대받았다고 나오는데… 솔직히 말하면 현실성은 없어 보입니다.”

너무 옛날 자료라 그런 건가. 도무지 ‘이거다’ 싶은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보관이 잘 된 편이에요, 신부님. 천 년 전에는 막 성국이 세워진 시기라 자료가 없을 거고, 500년 전에는 다름 아닌 ‘그 전쟁’이 일어났잖아요.”

마르첼로가 말하는 ‘그 전쟁’이란, 500년 전에 일어난 대륙 전쟁을 가리킨다.

일곱 나라 모두가 빠짐없이 전쟁의 불길에 휘말린 대전쟁.

당대 제국의 미친 황제가 일으킨 전쟁으로, 각지의 기록이나 성유물 등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파괴되거나 소실됐다.

“결국 그 사건의 배후에도 마왕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미친 황제의 배후에는 마왕이 있었다. 천 년 전에 이어 또 다시 마왕이 나타난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도 교황은 목숨을 잃었죠.”

마르첼로가 낮게 읊조린다.

그 당시 교황의 이름은 마르첼로. 그래, 저 소년과 같은 이름의 교황이.

“제국에 가장 먼저 맞선 건 인접해 있는 세 국가 중 성국이었죠. 교황 마르첼로는 ‘성전’을 선포하고 성기사와 사제들을 끌어 모았지만….”

“결국 실패했죠.”

성 마르첼로의 굴욕. 지금도 성직자 학교에 가면 기초 교육 내용에 포함된 중요한 사건이다.

그 일로 성국은 일시적으로 제국에 함락당하고, 수많은 성직자들이 자결하거나 목숨을 빼앗겼으니.

“교황은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다른 추기경은 건드리지 말라는 ‘계약’을 맺었고요.”

마르첼로는 스스로 생명을 포기했다. 성국의 안위를 대가로 말이다.

다행히 후에 등장한 두 번째 용사의 황제가 죽으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성국이 입은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프란체스코 교황님과도 같군요.”

프란체스코 교황님도 다른 성민들을 위해 목숨을 포기하셨다.

물론 죽음의 원인이 그분에게 있는 건 아니다. 전(?) 이단심문회의 국장, 배교자 키리에가 저지른 짓이니.

“마침 말 잘했습니다, 신부님.”

마르첼로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 처음 보는 표정을, 그 소년은 하고 있었다.

“그 두 분만이 아니었어요.”

마르첼로의 목소리는 격양되었고, 분노가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전대 교황은 악행에 빠져들어 목숨을 잃었고, 4대 전의 교황은 마도 공화국에서 건너온 흑마법사 집단에 의해 암살당했죠.”

역대 교황의 비극적인 최후.

“성국 내의 정치적 투쟁 때문에 암살당한 교황만 세 명이고, 그들 모두가 채 60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걸 말하는 소년의 모습은.

“그리고 초대 교황은… 마룡을, 지금은 사라진 드래곤의 시초를 봉인하고 목숨을 잃었죠.”

어딘가 허탈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게 교황이에요. 편안하게 여생을 맞이한 교황은 손에 꼽는다고요.”

“그만해, 마르첼로.”

마르첼로를 막은 건 에델이었다. 마치 어린 남동생을 혼내는 누나처럼 말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야. 네가 화낼 건 아무것도 없어.”

“화낼 일이 없다고요…? 하하, 그쵸. 맞아요. 전 일개 종자일 뿐인데, 이런 거에 일일이 반응해서 뭐 하겠어요.”

…흐음.

“아, 해가 졌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로제 형.”

마르첼로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황급하게, 마르첼로는 기록실을 빠져나갔다.

“쟤가 갑자기 왜 이런담. 미안해, 로렌스. 마르첼로는 내가 나중에 따로 얘기할 테니까….”

“아뇨, 로제리오.”

나는 책을 덮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감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래, 이제 우리 좀 그만 감시하란 말이야.”

“아뇨, 에델. 그가 보고 있던 건 우리가 아닙니다.”

로제리오의 표정을 보았다. 아무래도 내 추측은 정답인 것 같다.

“신시아, 일어나죠. 이제… 책을 정리할 시간입니다.”

“진짜? 이제 안 읽어도 돼?”

“네. 내일은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요?”

“응!”

내일은 시간이 빌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당분간은 계속 그럴지도 모르지.

* * *

모두가 잠든 한밤중. 한 소년이 촛불을 들고 어딘가로 들어갔다.

그곳은 예배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의 곁으로 돌아간 역대 교황의 성해(??) 일부를 모아놓은 비밀 예배실.

“신의 선택을 받아도, 결국 죽으면 전부 끝일뿐이야.”

예배실을 정성스럽게 청소하면서도, 소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은 길고 얇게 살아야 하는 거야. 튀지 않게. 주목받지 않게.”

한창 청소를 이어나가던 도중…, 소년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신부님?”

회색 머리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신부.

로렌스 프랑. 바로 그였다.

“우리 얘기 좀 할까요, 마르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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