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성흔을 삼키는 뱀(3)
* * *
마왕 추종자 로리안.
‘로리안’이라는 이름도 호칭이 분명치 않으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레서에게 멋대로 받은 이름이다.
그전까지 그녀에게 이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밤의 살인마, 핏빛 가면, 도적 살해자…. 수많은 호칭이 그녀의 존재를 수식해주었기에, 역설적으로 이름 같은 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왕국 출신이다. 아니, 다들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그녀가 처음 ‘발견’된 장소나 주요 활동 장소가 남왕국이었기에 그리 추측할 뿐이지, 로리안의 생애에 대해 명확히 아는 자는 없다.
불분명한 출생은 물론이고, 일말의 혈연관계조차, 아무도.
민간인 살해 횟수는 세 자릿수가 넘어가고, 치안이 불안한 남왕국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도적들도 그녀의 사냥감이었다.
로리안의 손에 벽의 얼룩이 되어버린 자들 중에는… 대도(大?)도 있었다.
성국의 성녀, 마도 공화국의 현자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서연방국의 ‘대전사장’이나 공국의 ‘귀공자’들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괴물들.
남왕국의 ‘우상’. 무력에 있어서는 정점에 달한 자조차, 로리안에게 있어서는 일개 사냥감에 불과했다.
로리안에게 목숨을 잃은 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원한 관계도, 심지어는 성별이나 나이대의 공통점도 없다.
신출귀몰한 악귀. 마지막 피해자였던 남왕국의 기사가 남긴 이 글귀는 그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문구였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마왕 추종자라는 가면을 쓰고 다시 나타났는가.
자유로운 영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가 어째서 충실히 ‘운명’의 뜻을 따르는가.
“당신은 미쳐 있군요.”
간단한 이유다. 그녀는 윤리나 도덕적 관념을 적용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운명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 세계가 도달할 미래. 운명의 뜻대로 흘러간 끝에 마주할 삼각주.
그 세계에서 로리안은… 더 이상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오직 사람을 죽일 때 빼고는 언제나 무료함에 괴로워하던 로리안은, ‘운명’이 보여준 미래에선 그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천적인 성격이 바뀐 게 아니다.
바뀐 건 세상이다. 사방이 사냥감으로 넘치는 세상.
그녀의 행동을 억압할 방해꾼들은 모조리 사라진 세상.
그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서.
“하핫.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로리안은, 잠시나마 충실한 마왕의 하수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언제나 충동적인 행동만을 해오던 그녀의 생애 유일한 선택이었다.
“분명 이름이… 신시아였나?”
“그 더러운 입으로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봐, 지금 표정. 어차피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너랑 나는 처음부터 그런 존재인 거야. 소위 말하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부류.”
로리안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 그렇게 판단한 로렌스가 검을 들었다.
“웃는 얼굴을 하며 사람들의 틈에 억지로 섞여 있어도 소용없어. 물고기가 나무 위에서 살 수 있겠어?”
“단죄.”
세바스가, 검의 형태를 한 성유물이 빛을 내뿜는다.
일곱 신 중 한 명, 전쟁과 시련의 신인 우투와 교감을 한 세바스는 한 단계 진화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낡았던 검신은 매끄럽게 변하고, 녹슬었던 가드(코등이)는 빛을 반사할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로렌스가 성유물의 본질을 꿰뚫은 시점에서, 이미 세바스에 걸려 있던 금제는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쿠구구궁.
검이 휘둘러지는 방향 그대로 거대한 선이 그어진다.
로리안의 뒤에 있던 벽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나 거대한 일격이기에, 재빠른 몸짓으로 피한 로리안에게는 닿지 않았다.
“에헤, 이게 샌님이 말했던 그거구나. 직접 보니까… 황홀하네. 어쩌면 네가 말한 그 이단심문관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어.”
칭찬과 기대감이 섞인 말에도 로렌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저 여자는 인간이 아니다. 신의 실수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짐승, 아니, 악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지옥에 가지 않을 겁니다.”
“응? 설마 내 생각을 해주는 거야? 어쩌지, 나 조금 감동할 것 같아.”
“제 친구가 지옥에서 참회하고 있는 중일 테니까요.”
알베르 프랑. 한때의 그릇된 판단으로 죄를 저질러 버린, 너무나 미련한 그의 형제.
그는 지금쯤 일곱 신에게 심판받고 있거나, 혹은 지옥에서 죄에 맞는 형벌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옥의 불길이 형제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은 지옥조차 갈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있는 곳으로는 보낼 수 없다.
짐승만도 못한 악귀에게 지옥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옥이야말로 저 자들에게 있어서는 곧 천국이나 다름없을 테니.
연옥. 악귀에게 어울리는 곳은 영원한 감옥뿐이다.
“죽은 당신의 영혼은 신이 심판하겠죠.”
“또 그 소리야? 정말이지, 성국의 성직자들은 다들 딱딱한 소리만 한다니까.”
“그러니 육체의 심판은 제가 맡겠습니다.”
“…응?”
그녀가 죽여 온 성직자들. 그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로렌스의 모습에, 로리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
“부디 신들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기를.”
로렌스는 살아 있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죽은 형제는 말이 없다. 저 여자에게 복수할 육신은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그러니 자신이 대신할 뿐이다. 신의 심판도, 죽은 형제의 복수도.
“…재미있네. 샌님의 말대로야. 그래, 그 얼굴. 전혀 겁에 질리지 않았어.”
로렌스의 표정은 결연했다. 오히려 무표정에 가까울 정도다.
자신을 죽일 듯이 쳐다보는 로렌스의 얼굴에, 로리안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죽여 온 수많은 사냥감.
가장 맘에 들지 않는 것은 힘없는 약자였다. 생존 본능이 강한 슬럼가의 부류들은 차라리 나았지, 삶에 어떤 희망도 남지 않은 빈민가의 약자들에게선 어떠한 쾌락도 느낄 수 없었다.
고결한 성직자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바지에 오줌을 지릴 뿐이다.
손맛이 좋았던 것은 역시 강자에 속하는 무리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냥감은 대도. 북왕국의 도적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던 남자.
그 남자는 목숨 구걸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존 의지가 빈약했던 것도 아니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자신이 절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 확신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목에 칼을 박아 넣었을 때의 그 황홀감은….
“또! 또 다시 그날처럼, 그 끝내주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겠지? 너라면, 그래, 너라면 말이야!”
로리안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피가 덕지덕지 묻어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단검을.
맘에 드는 사냥감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이 단검을 썼기 때문이다.
“쉽게 죽지는 마? 나도 전력을 다할 테니까!”
검의 날이 서로 부딪힌다.
작은 단검은 참수도(???)에도 밀리지 않고 무거운 위력을 뽐낸다.
마기의 영향인가? 로렌스는 잠시 그리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여자는 마기 같은 것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순수한 본인의 힘, 선천적인 육체에서 나오는 완력이다.
수 번, 수십 번. 마침내 합의 횟수가 세 자릿수에 달하자, 주위에는 뿌연 흙먼지가 가득하여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왜 그래? 아까보다 소극적인데? 설마 벌써 지친 거야?”
지친 건 아니다. 로렌스가 적극적으로 공세에 임할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르첼로. 로리안이 만든 구덩이에 같이 빠져버린 비운의 어린양.
그는 교황 후보이기 전에 소년이다. 자칫 힘을 최대치로 내다가 휘말리기라도 해버린다면, 마르첼로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상황이 불리하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나갈 수 있는 곳은 천장에 난 구멍뿐.
물러서서 숨을 고를 수도 없고, 상황을 바꿀 만한 수단도 보이지 않는다.
저 여자의 말대로 무대나 다름없는 것이다. 한 번 올라서면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무대.
“아아, 저 꼬맹이 때문이구나? 그런데 어쩌지? ‘나는 저 아이를 건들지 않겠습니다’ 같은 시시한 맹세 따윈 하는 거 딱 질색이거든. 알잖아?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야 현명한 사람 아니겠어?”
알고 있다. 로렌스가 조금이라도 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로리안은 제일 먼저 방해되는 마르첼로의 숨통부터 끊을 것이다.
순전히 마왕 추종자의 임무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직 약해. 지켜야 할 것을 잃었을 때, 그때가 되서야 비로소 원래 힘을 내는 존재거든, 사람은. 너도 그렇겠지?’
마르첼로를 죽였을 때의 로렌스의 반응. 그리고 감정이 터졌을 때 나오는 힘.
로리안은 최고의 사냥을 하고 싶었다.
사냥감이 만전을 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냥이 아닌 단순한 장난에 불과하다.
그러니 최고의 쾌감을 얻기 위해선 사냥감의 화를 돋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로렌스 같은 타입은,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화를 낼지 비교적 확실히 알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야 나를 죽일 수 있겠어? 그 멍청한 신부의 복수를 할 수 있겠냐고.”
로렌스 같은 인간은, 얼마 남지 않은 인연을 가장 소중히 생각한다.
“교황 후보는 이만 포기해. 좀 더 날뛰어. 좀 더 즐겨보자고!”
명예는 중요시하지 않지만, 맡겨진 사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완수하려 한다.
“만약 여기서 날 죽이지 못한다면, 다음은….”
그리고, 언제나 사랑에 굶주려 있다.
“네가 아끼는 그 마왕 후보자가 될 거야.”
푸콱.
순간이었다. 로렌스가 로리안의 품으로 파고들어 검을 찌른 건.
마왕 후보자를 언급한 순간, 로렌스의 호흡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냉철한 눈. 아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성을 잃은 건가? 그것도 아니다. 호흡이 변했을 뿐, 흐트러진 건 아니다.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신시아. 로렌스에게 있어선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존재.
감히 그 이름을 불렀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이걸로 됐어…!’
로리안, 당신의 역할은 하나입니다.
로리안이 품에서 또 다른 단검을 꺼냈다.
이 단검에는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이걸 ‘변수’에게 찌르십시오.
그녀의 다른 단검과는 달리 이질적으로 검게 물든 단검.
마기가 실린 이 단검은, 찌르는 것만으로 수많은 저주를 대상에게 심어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즐거웠어. 좀 더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
저 단검은 이상하다고, 피해야 한다고 로렌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로리안에게 일격을 먹인 건 좋았지만, 너무 깊숙이 들어온 나머지 빠져 나갈 틈을 만들 수는 없었다.
“위험…”
찔린다. 당한다. 팔을 잘라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언가가 로리안의 팔을 강하게 밀쳐냈다.
“신부님을.”
검은 날개를 펼치며 하늘 위에서 내려온 그 소녀는.
“건드리지 마아!”
천사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 * *